백범(123) 서거당시의 회고 -이종찬(전 국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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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5-23 17:34 조회1,733회 댓글0건본문
이종찬씨의 당시 회고
1949년 6월 26일의 일이었다. 백범 김구선생이 괴한의 총을 맞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바로 그 날 저녁이었다. 아버님이 눈물이 글썽거리시면서 "참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정말 원통하구나." 이렇게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물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가 파한대로 서대문 경교장으로 쫓아갔다. 그 앞길은 인산인해였다. 모두들 줄을
서서 백범 선생의 시신을 보고자 경교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도 그 틈에 끼었다. 빈소에 들어가니
선생의 시신은 두루마기를 입은 채 누워계셨고, 얼굴은 붕대와 반창고로 여기저기 막아있었다.
워낙 사람들이 줄서서 들어오는 것이어서 더 머물러 있을 수없이 밀려 나왔다. 나는 경교장 입구로
나오면서 양옆으로 사람들이 새끼줄에 죽 서있었다. 나는 냉큼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앞에
앉았다. 빈소에 들어갔던 고위인사들이 차례차례 경교장 정문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는 소리를 들었다. 몸집이 뚱뚱한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이
뒤룩뒤룩 걸어나오 것 아닌가. 웬 살이 그리 쪘는지 생각하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뒤에서
작은 목수리가 처음에는 들렸다. "저놈이다. 우리 선생님을 죽인 것 저놈들이다. "
그 순간 갑자기 그 소리가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저놈들이다" 고함 가까운 소리가 마치 합창을 이루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 틈에 헌병들이 달려와서 내가 앉은 줄 앞에 스크럼을 짜고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는
채병덕 장군을 서둘러 모셔가는 것이다. 나는 그때 문득 민심이란 것을 느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민심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벽보가 붙었다. 우리 집과 평소에 가까이 지낸 장흥(張興) 헌병사령관이
교체되고 일제의 고등계로 악명 높은 전봉덕(田鳳德)이 장군으로 발탁되어 헌병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벽보를 본 행인들이 저 마다 혀를 차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다.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총으로 쏘아 돌아가시게 하고는 곧이어 헌병대에 끌려왔다. 당연히 철창 속에 갇혀야 할
범인을 오히려 밖에서 밥을 먹이고 있지 않은가. 이에 격분한 장흥사령관이 대노하여 당장 유치장에
잡아 가두라 하였는데 그 다음 헌병사령관이 교체되었다.
그 날 저녁 늦게까지 나는 경교장 주위를 맴 돌았다. 도무지 백범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다. 경교장 앞은 벽보가 수시로 붙었다.
이번에는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우천(藕泉 趙琬九)할아버님이 맡으셨다는 소식과 함께 그분의 성명이
벽보로 붙었다. 성명에는 백범선생을 암살한 경위에 대하여 납득할 수 없는 5개항의 질의를 했다.
다음날 학교에서는 벌써 백범선생에 대한 추모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 저기 우는 소리/
하늘도 땅도 울고 바다조차 우는 소리/
끝없이 우는 소리 님이여 듣습니까. 님이여 듣습니까? 」
우리는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국민장 날 우리는 모두 나갔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경주이씨 라고 알고 있습니다.
▣ 김윤만 -
▣ 김태영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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