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의 김방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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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24 18:44 조회1,445회 댓글0건본문
무신년 고종 35년(송 이종 순우 8, 몽고 정종 3, 1248)
3월북계(北界) 모든 성의 백성들을 옮기어 해도(海島)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때에 몽고 군사의 왕래가 무상하므로 북계 병마사 노 연(盧演)에게 명하여 백성을 옮기어 해도로 들어가게 하였다. 안북부(安北府)(지금의 정주(定州) 동쪽 50리에 있다) 에 위도(葦島)가 있어 평지 10여 리가 경작할 만하였는데, 조수(潮水) 우려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명을 내려 방죽을 쌓고 씨앗을 뿌리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 괴롭게 여겼으나,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몽고 군사가 여러 해 계속하여 물러가지 않았는데도, 섬 사람들은 이것을 힘입어 살아날 수가 있었다. 섬에는 또 우물이 없어 물 긷는 자가 이따금 사로잡히기도 하였는데, 방경은 빗물을 저장하는 못을 만들어서 여름에는 끌어 물을 긷고, 겨울에는 얼음을 뜨게 하니 그 근심이 마침내 없어져 사람들은 그 지혜에 감복하였다.
병진년 고종 43년(송 이종 보우 4, 몽고 헌종 6, 1256)
○ 김창(金敞)이 졸하였다.
창은 안동인(安東人)인데,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최이(崔怡)가 불러다 정방(政房)에 두어 전선(銓選)을 맡게 하였는데 선발 대상에 오른 사람이 수만 명이라도 창이 한 번 보면 그 성명을 다 기억하고, 사정을 하소연하는 일이 있으면 당장에 응해서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나 전주(銓注)는 모두 최이의 말만 듣고 거부하지 못하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에게 손을 빌려 주었는데 내가 어찌 사이에 끼이겠는가?”
하였으니, 그 아부함이 이와 같았다. 창이 권문(權門)에 붙어서 오랫동안 정권을 잡아, 하루에 아홉 번이라도 벼슬이 바뀌어 올라갈 만했으나, 자격에 따라 거의 60세가 되어서 비로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니, 세상 사람들이 승진하는 데에 청렴하다 하였다.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임종 때 그의 조카 방경(方慶)에게 국장(國葬)을 사양한다고 당부하였다
기미년 고종 46년(송 이종 개경(開慶) 원년, 몽고 헌종 9, 1259)
○ 구경(舊京)에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몽고인이 여러 번 육지로 나오라고 책망하고, 태손도 또한 옛 서울로 환도(還都)하고자 하여, 비로소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김방경(金方慶)ㆍ김승준(金承俊)을 출배도감(出排都監)으로 삼았다.
계해년 원종 4년(송 이종 경정 4, 몽고 세조 중통 4, 1263)
12월김준(金俊)을 수태위 참지정사 판어사대사(守太尉參知政事判御史臺事)로, 김방경(金方慶)을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김구(金坵)를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로 삼았다.
준은 곧 인준(仁俊)이다.
방경은 안동인(安東人)인데, 성품이 엄격하고 굳세어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감독하였는데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재상(宰相)이 권신(權臣)에게 참소하기를,
“지금 어사는 전의 어사가 봉공(奉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때마침 방경이 이르자 권신이 힐책하니, 대답하기를,
“전의 어사와 같도록 하려면 나도 또한 그렇게 할 수는 있다. 나는 나라의 창고를 쌓는 것이 요긴하지 여러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다.”
하니, 참소한 사람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견룡 행수(牽龍行首)가 되었을 때 금위군(禁衛軍)이 권문(權門)에 다투어 아부하느라고 숙위(宿衛)가 몹시 게을러지니, 방경이 이에 분노하여 비록 병이 있었으나 휴가를 청하지 아니하였다. 어사대에 들어와서는 법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서 풍채와 절개가 늠름하였다.
무진년 원종 9년(송(宋) 도종(度宗)함순(咸淳) 4, 몽고(蒙古)세조(世祖)지원(至元) 5, 1268)
2월김방경(金方慶)을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았다.
방경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을 적에 백성에게 끼친 은애가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북계
의 40여 성(城)이 상서(上書)하여 방경이 다시와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기사년 원종 10년(송 도종 함순 5, 몽고 세조 지원 6, 1269)
○ 유천우(兪千遇)를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김방경(金方慶)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았다.
처음에, 천우가 좌승선(左承宣)이 되어 오래 정병(政柄)을 잡았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다 따라붙었다. 방경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있을 적에 길에서 그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揖)하였다. 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명을 받든 몸이라, 3품 이하는 다 은피(隱避)하는데, 그대는 어찌 그러하오?”
하니, 방경이 말하기를,
“그대와 나는 다 3품이나, 그대가 조삼(?衫)주D-003 차림의 명을 받든 몸이니, 내가 예를 행하고자 할 따름이오.”
하여, 오래도록 서로 따지다가 방경이,
“해가 저물었소.”
하고, 드디어 먼저 갔는데, 천우가 이 때문에 깊이 유감을 품었다. 그래서 방경의 친족으로 벼슬을 구하는 자는 다 억제하였으나, 방경은 개의하지 않았다. 뒤에 진도(珍島)를 공격할 때에 천우의 전장(田庄)이 장사(長沙)에 있었으나, 방경은 요란 피우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경오년 원종 11년(송 도종 함순 6, 몽고 세조 지원 7, 1270)
○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장수 몽가독(蒙哥篤)과 함께 서경에 와서 진수(鎭戍)하였다.
전에, 세자가 임연이 난을 일으켰음을 듣고 몽고에 청병(請兵)하매, 몽가독《원사(元史)》에는 망가도(忙哥都)로 되어 있다 을 안무사(按撫使)로 보내어 서경에 와서 진수하게 하였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려 할 때에 중서성(中書省)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제 몽가독이 서경에 오래 주둔하여 대군(大軍)을 기다리면, 임연은 이미 배명(背命)하였으므로 반드시 군사의 식량을 대어 주지 않을 것이니 연에게 가담하지 않는 자를 뽑아서 데려가야 하리다.”
하였다. 그때에 김방경이 표문을 받들고 몽고에 갔는데, 이장용(李藏用)이 말하기를,
“방경은 두 번 북계(北界)를 진수하여 백성에게 끼친 은애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방경이 말하기를,
“관군(官軍)이 서경에 이르러서, 만약에 대동강을 건너간다면, 왕경(王京)이 절로 소란하여질 것이니, 황제의 명을 받아서 강을 건너가지 말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매, 드디어 몽주(蒙主)에게 아뢰니, 몽주가 윤허하고 관군에 조(詔)하기를,
“대동강을 건너는 자는 죄준다.”
하였다. 가다가 동경(東京)에 이르러, 왕이 이미 복위하여 입조(入朝)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대로 머물러 기다렸다. 최탄이 서경에서 반하여 여러 성의 수령을 죽였을 때에도 박주수(博州守) 강빈(姜?), 연주수(延州守) 강천(姜闡)만은 예대(禮待)하고 말하기를,
“김공의 덕을 내가 어찌 감히 잊으랴!”
하였는데, 두 사람은 다 방경의 친족이었다.
이때에 와서, 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르니, 부로(父老)가 와서 음식 대접을 하고 울며 말하기를,
“공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어찌 탄ㆍ신(愼 한신(韓愼))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고, 탄 등도 조석으로 뵈러 왔다. 탄 등이 몽고 군사로 인연하여 속으로 빈틈을 타서 나라를 삼킬 뜻을 두고, 몽가독에게 후하게 선물하여 속여서 꾀었으나, 방경이 그때마다 계략으로 막았다.
이에 앞서, 연(衍)은 왕이 청병(請兵)하여 구도(舊都)를 회복할 것을 염려하여, 명을 거역하고자 지유(指諭)지보대(智甫大)를 시켜 황주(黃州)에 주둔하고, 신의군(神義軍)으로 하여금 초도(椒島)에 주둔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탄 등이 그 꾀를 알고 몽가독에게 몰래 말하기를,
“연 등이 관군(官軍 몽고군(蒙古軍))을 죽이고 제주에 들어가려 하오. 청컨대, 관인(官人)이 사냥 나간다고 말을 퍼뜨리고서 경군(京軍)이 왕래하는 상황을 서로 알리고서, 우리가 주사(舟師 수군)로 보음도(甫音島)ㆍ말도(末島)보음도는 강화부(江華府) 서쪽 30리에 있고, 말도는 강화부 서쪽 5리에 있다 로 나아가고, 관인은 군사를 거느리고 착량(窄梁)착량은 지금 손돌항(孫突項 : 손돌목)이라 부르며, 강화부 동남 갑관(甲串 : 갑곶) 하류에 있는데, 포구가 좁아서 이름이 되었다 으로 가면, 저들이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할 것이오. 이미 그 실정을 알고 나서 황제에게 갖추 아뢰면, 왕경(王京)을 빼앗을 수 있고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은 남의 것이 아니될 것이오.”
하니, 몽가독이 기뻐서 승낙하였다. 몽가독탄의 내상(內廂)으로 있는 오득공(吳得公)이라는 자가 이것을 알고 방경에게 밀고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방경이 몽가독에게 가니, 제군(諸軍)이 다 모였다. 방경이 말하기를,
“이제 어디로 사냥가시오?”
하니,
“황주ㆍ봉주(鳳州)로 갔다가 초도에 들어갈 것이오.”
하매, 방경이 말하기를,
“황제의 분부가 계신데 어떻게 강을 건너오?”
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강물 건넌 것을 죄주시면, 내가 홀로 당하리다.”
하매, 방경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는데 관인(官人)이 어찌 강을 건널 수 있겠소. 그렇게 하려면 황제의 명을 여쭈어 보아야 하오.”
하였다. 방경이 비밀히 보대(甫大) 등에게 일러 군사를 물리게 하니, 몽가독이 방경의 충직(忠直)이 천성에서 나옴을 알고 크게 공경하고 존중하여 사실대로 고하기를,
“왕경을 멸하려는 자는 탄 등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참언(?言)이 들어가지 않아서 국가가 편안하였다.
6월
○ 참지정사(參知政事)신사전(申思佺)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김방경(金方慶)을 남적추토사(南賊追討使)로 삼았다.
방경이 군사 6천여를 거느리고 몽고의 송만호(宋萬戶) 등 군사 1천여 인과 함께 쫓아가 치다가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바라보니 적이 영흥도(靈興島)지금의 남양(南陽)인데 일명 연흥(燕興)이다 에 정박하였으므로, 방경은 치려 하였으나 송만호가 두려워서 말리니, 적이 달아났다. 적중에서 도망해 돌아온 남녀가 아울러 1천여 인이었는데, 송만호가 적의 무리로 생각하여 모두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방경이 돌려보내 주기를 행성(行省)에 청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자가 많았다
9월
○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장수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珍島)를 쳤다.
그때에 몽고가 아해를 원수(元帥)로 삼아 보내어 군사 1천을 데리고 와서 방경과 함께 적을 쳤다. 때마침 적이 나주(羅州)를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全州)를 치니,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함께 항복하자고 의논하였는데, 전주 사람들도 그렇게 할까 망설였다. 방경이 도중에서 이를 듣고는, 거느린 군사를 버려 두고 밤낮으로 남으로 달려가서 먼저 전주 사람들에게 첩(牒)하기를,
“모일(某日)에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 고을에 들어가겠으니, 군량을 장만하고 기다리라.”
하니, 전주에서 첩으로 나주에 알렸다. 적이 이를 듣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서 갔는데, 이때부터는 다시 노략하지 않았다.
11월아해(阿海)가 김방경(金方慶)을 잡아 가두었다가, 그 뒤에 석방하였다.
방경과 아해가 삼견원(三堅院)지금의 해남현(海南縣) 서쪽 60리에 삼기원(三岐院)이 있는데, 이곳인 듯하다 에 주둔하여 진도(珍島)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적의 배에는 괴상한 짐승의 그림을 그렸는데 강을 덮어 물에 비치며, 마치 나는 듯이 움직였다. 싸울 때마다 적(賊)은 북을 치고 외치며 돌진하는데,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여 여러 날을 버티었다. 마침 참소하는 홍찬(洪贊)ㆍ홍기(洪機) 등이 있었는데, 적중에서 도망하여 돌아와 말하기를,
“방경이 적과 내통하였다.”
하므로, 아해가 방경을 잡아 가두었다가 묶어서 달로화적(達魯花赤)에게 보내니, 보는 사람들이 다 울었다. 방경이 그곳에 이르러 찬과 대면하여 밝히니, 찬이 무망(誣罔)으로 복죄하매 방경을 석방하였는데, 왕이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여 위로하고 타일러서 다시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 김태서 - 분량이 많아 읽기 좋게 나누어 올립니다. ▣ 김발용 - 귀한글 잘 읽었습니다. ▣ 김태영 - ▣ 김주회 - 연일 계속되는 귀한 자료!!! 잘 보고 있습니다. ▣ 김윤만 - 동사강목 공부를 잘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귀한 자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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