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의 김방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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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26 09:09 조회1,502회 댓글0건본문
경오년 원종 11년(송 도종 함순 6, 몽고 세조 지원 7, 1270)
○ 김방경(金方慶)이 진도(珍島)에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방경이 서울로부터 진도로 돌아왔다. 적이 배를 타고 기치(旗幟)를 성대히 벌여 세우고 바다가 들끓도록 징과 북을 치며, 또 성 위에서는 북을 치며 외쳐서 형세를 도우니, 아해(阿海)가 겁이 나서 배에서 내려 나주로 물러나 주둔하려 하매, 방경이 말하기를,
“원수(元帥)가 물러나면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이니, 적이 승세를 타고 몰려오면 누가 감히 예봉(銳鋒)을 당할 것이며, 황제께서 듣고 문책하시면 어떻게 응대하겠소?”
하니, 아해가 감히 물러나지 못하였다. 방경이 홀로 부하를 데리고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적이 전함(戰艦)으로 역습하여 공격하니 관군이 다 달아나매 방경이 말하기를,
“승부를 결단하는 것은 오늘에 달려 있다.”
하고 적 가운데로 돌입하였는데, 적이 배로 포위하여 몰고 갔다. 방경과 사졸이 죽을 각오로 싸웠으나, 시석(矢石)이 다하고 또 모두들 화살에 맞아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미 진도 해안에 다가갔을 때에 칼을 뽑아 든 적의 병졸이 배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김천록(金天祿)이 단모(短矛)로 도리어 찌르매, 방경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차라리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내게 될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으랴!”
하고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을 위사(衛士)허송연(許松延)ㆍ허만지(許萬之) 등이 말렸다. 부상자가 방경이 위급함을 보고 외치며 다시 일어나서 재빨리 싸우매, 방경이 호상(胡床)에 의지하여 사졸을 지휘하되 낯빛이 태연하였고, 장군 양동무(楊東茂)가 몽충(蒙衝)으로 돌격하니 적이 달아나므로 드디어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왔다. 방경이, 장군 안세정(安世貞)ㆍ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은 죄를 따져서 참하려 하였으나, 아해가 말려서 면하였다.
신미년 원종 12년(송 도종 함순 7, 몽고 세조 지원 8, 1271)
하4월
○ 김방경ㆍ흔도 등이 진도를 쳐서 크게 격파하고 온(溫)을 참하니, 적의 장수 김통정(金通精)이 남은 무리를 데리고 탐라(耽羅)로 달아났다.
방경 등이 1만여 인을 모아 흔도와 함께 중군(中軍)를 거느리고서 벽파정(碧波亭)지금의 진도군 동쪽 30리에 있는 나루 어귀에 있다 으로부터 들어가고, 왕희(王熙)ㆍ왕옹(王雍)과 홍다구(洪茶丘)가 좌군을 거느리고서 장항(獐項) 지금은 미상 으로부터 들어가고, 대장군 김석(金錫), 만호(萬戶)고을마(高乙麻) 등이 우군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들어가니, 모두 1백여 척이었다. 적이 벽파정에 모여 먼저 중군을 막았으나, 다구가 먼저 올라가 불을 놓고 협공하니 적이 놀라 무너지매, 방경 등이 분발해서 크게 격파하였다. 적이 다 처자를 버리고 도망하매, 방경이 추격하여 남녀 1만여 인과 전함(戰艦) 수십 척을 노획하고, 진도에 들어가 쌀 4천 석을 얻었다. 적의 장수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탐라로 도망해 들어가니,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강도(江都)의 사녀(士女)와 진기한 보배 및 진도의 주민이 다 몽고 군사에게 노획되었다. 온(溫)은 왕준의 동복형(同腹兄)인데 다구에게 죽었다.
그때에, 적의 장수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南海縣)에 웅거하여 있다가 적이 탐라로 도망해 들어갔다는 것을 듣고 배 80여 척을 이끌고 따라갔다. 방경이 재보(財寶)와 기장(器仗)을 죄다 왕경(王京)으로 나르고, 적에게 함몰되었던 양민은 다 생업을 회복하게 하였다. 사로잡혔던 조사(朝士 벼슬아치) 강위(姜渭)ㆍ김지숙(金之淑)ㆍ임굉(任宏)ㆍ송숙(宋肅)ㆍ이신손(李信孫) 등이 다 돌아왔으나, 몽고 군사에게 노획된 사녀들은 다 쇄환(刷還)되지 않았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재삼 아뢰어 죄없이 사로잡힌 자를 찾아서 내보내주기를 청하니, 몽주(蒙主)가 조허(詔許)하여 적의 무리의 가족 외는 다 살펴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 흔도 등이 끝내 그렇게 하려 하지 않으매 탈타아가 황제의 명에 의거하여 굳이 다투었으므로, 조금은 가려서 내보내게 되었으나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매우 많았다.
11월○ 김방경(金方慶)이 개선하여 돌아오매,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로 삼았다.
계유년 원종 14년(송 도종 함순 9, 원 세조 지원 10, 1273)
2월김방경(金方慶)을 중군병마원수(中軍兵馬元帥)로 삼아 원(元)의 장수 흔도(?都) 등과 함께 탐라를 치게 하였다.
그때에 적의 형세가 날로 치성하여져서 경기까지 침입하여 도로가 통하지 않으므로 왕이 근심하였는데, 홍다구(洪茶丘)가 원에 갔다가 돌아와 달로화적 이익(李益)과 단사관 마강(馬絳)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군사를 낼 것을 의논하니, 왕이 방경을 원수로, 변윤(邊胤)을 부원수로 삼아 정기(精騎) 8백을 거느리고 흔도 등을 따라가게 하되, 왕이 월(鉞 생살권(生殺權)의 상징으로 한 방면을 맡아 나가는 장수에게 주는 도끼 모양의 신표)을 주어 보냈다
하4월
○ 김방경(金方慶)ㆍ흔도(?都) 등이 탐라를 쳐서 평정하였다.
방경이 연졸(練卒)과 수군(水軍) 1만여 인을 거느리고 흔도ㆍ홍다구와 함께 반남현(潘南縣)지금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이다 에 주둔하여 여러 도의 전함을 모아, 서해도(西海島) 전함 20척을 거느리고 가야소도(伽倻召島)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 패몰(敗沒)하여, 남경 판관(南京判官)임순(任恂), 인주 부사(仁州副使)이석(李奭) 등 1백 15인이 물에 빠져 죽고, 경상도의 전함 27척도 패몰하였으므로, 전라도의 전함 1백 60척만으로 추자도(楸子島)에 머물러 바람을 살피며 기다렸으나, 한밤에 바람이 급히 부니 갈 바를 몰랐다. 어둑새벽에 이미 탐라에 가까이 갔는데 풍랑이 용솟음쳐서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하게 되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이 한 거사에 달려 있으니, 오늘의 일이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하니, 이윽고 풍랑이 그쳤다.
중군(中軍)이 함덕포(咸德浦)지금 제주(濟州) 동쪽 31리에 있다 로부터 들어가니, 적이 바위 사이에 복병(伏兵)하였다가 뛰어나와 크게 외치며 항거하였다. 방경이 소리를 질러 여러 배가 아울러 나아가도록 독려하니, 대정(隊正)고 세화(高世和)가 앞장 서서 적진에 돌입하매 사졸들이 승세(乘勢)하여 앞을 다투어 나아가고, 장군 나유(羅裕)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매,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이 비양도(飛揚島)제주 서쪽 80리에 있다 로부터 곧바로 적의 보루를 찌르니 적이 자성(子城)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관군이 외성(外城)을 넘어들어가 불화살을 사방에서 쏘아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으니, 적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적중으로부터 투항해 온 자가 말하기를,
“적이 형세가 궁급하여 도망하려고 꾀하니 급히 공격하십시오.”
하였는데, 그런 뒤에 적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이 그 무리 70여 인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목을 매어 죽으니, 적의 장수 이순공(李順恭)ㆍ조시적(曹時適) 등이 육단(肉袒 항복의 표시로 윗도리를 벗는 것)하고 항복하였다.
방경이 장수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사녀(士女)가 외치며 우는데, 방경이 말하기를,
“괴수만을 죽일 터이니 너희들은 두려워 말라.”
하고, 괴수 김윤서(金允敍) 등 6인을 잡아 거리에서 참하고, 항복한 자 1천 3백여 인을 여러 배에 나누어 실으니, 그 나머지 주민 사녀는 예전처럼 편히 살게 되었다. 적이 죄다 평정되매 흔도가 몽고 군사 5백을 주둔시키고, 방경도 장군 송보연(宋甫演)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머물러 진수(鎭戍)하게 하고 돌아왔다.
윤6월 원이 탐라(耽羅)에 달로화적(達魯花赤)을 두었다.
○ 김방경(金方慶)을 시중(侍中)으로, 변 윤(邊胤)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삼았다.
탐라에서의 공을 상준 것이다. 나유(羅裕) 이하 장수들에게 차등을 두어 관작을 제수하였다. 방경이 개선할 때에 왕이 교외에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고, 들어와 왕을 뵈매 손수 홍정(紅? 붉은 가죽띠) 1요(腰)를 내렸으며, 장수와 사졸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어서 위로하였다. 방경은 진도 싸움으로부터 탐라 정벌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힘을 다하고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적절하게 조치하여 전함(戰艦)ㆍ병기(兵器)ㆍ양향(糧餉)에 두루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변윤은 병마사(兵馬使)로서 먼저 가서 준비하고 방경과 함께 협심(協心)하여 성공하였다.
가을에 방경이 조명(詔命)을 받고 원(元)으로 가니, 원주(元主)가 불러서 만나고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게 하여, 어찬(御饌)을 거두어 주고 이어서 금안(金鞍 금으로 장식한 안장)ㆍ채복(綵服)을 내리니, 총애가 비할 데 없었다.
갑술년 원종 15년(송 도종 함순 10, 원 세조 지원 11, 1274)
동10월 원(元)의 정동군(征東軍)이 합포(合浦)를 떠나매, 도독사(都督使)김방경에게 명하여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따라가게 하였는데, 방경이 삼랑포(三郞浦)에서 일본 군사를 크게 격파하였고, 원군(元軍)은 물러나 돌아왔다.
도원수(都元帥)홀돈(忽敦)과 우부원수(右副元帥)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유복형(劉復亨)이 전함(戰艦)을 사열하였다. 김방경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ㆍ김흔(金?)이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고, 임개(任愷)가 부사(副使)가 되며, 추밀부사(樞密副使)김신(金侁)이 좌군사(左軍使)가 되고, 위득유(韋得儒)가 지병마사가 되고, 손세정(孫世貞)이 부사가 되며, 상장군(上將軍)김문비(金文庇)가 우군사가 되고 나유(羅裕)ㆍ박보(朴保)가 지병마사가 되고, 반부(潘阜)가 부사가 되니, 삼익군(三翼軍)이라 불렀다. 흔(?)은 곧 완(緩)이다.
몽한군(蒙漢軍 몽고와 중국 본토의 군사) 2만 5천과 우리 군사 8천과 초공(梢工 사공 곧 선장)ㆍ인해(引海)ㆍ수수(水手 수부) 6천 7백과 전함 9백여 척으로 합포에 머물러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렸으나 여진이 시기에 뒤지므로, 일시에 배를 띄워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니, 쳐서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일기도(壹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해안에 진을 쳤는데, 지량과 방경의 사위 조변(趙?)이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했다가 다시 와서 싸우므로, 다구가 지량ㆍ변과 함께 쳐서 1천여 급(級)을 죽이고, 삼랑포에 배를 두고 길을 나누어 나아가니, 죽인 것이 너무 많았다. 왜병이 불쑥 이르러 중군(中軍)을 공격하니 긴 칼이 좌우에 엇갈리되, 방경이 심은 듯이 서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뽑아 소리 질러 크게 호령하니 왜가 겁이 나서 달아나매, 지량ㆍ흔ㆍ변ㆍ이당공(李唐公)ㆍ김천록(金天祿)ㆍ신혁(申奕) 등이 힘껏 싸우니 왜병이 크게 패하여 주검이 삼더미 같았으므로, 홀돈이 말하기를,
“원나라 사람들이 싸움을 익혔다고는 하나 어떻게 이보다 더하랴!”
하였다. 제군(諸軍)이 함께 싸우다가 저물어서야 그쳤다.
방경이 홀돈ㆍ다구에게 말하기를,
“병법에 ‘천리의 현군(懸軍 이어지는 원군 없이 홀로 적지에 깊이 들어간 군사)은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 하였거니와, 우리 군사가 적기는 하나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왔으므로 사람마다 자진해 싸우니, 곧 맹명(孟明)의 분선(焚船)이요, 회음(淮陰)의 배수(背水)입니다. 다시 싸웁시다.”
하였으나, 홀돈은 말하기를,
“병법에 ‘소적(小敵)이 굳게 지키더라도 힘이 빠지면 대적에게 사로잡힌다.’ 하였거니와, 지친 군사를 몰아서 날로 더하는 무리를 대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군사를 돌려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복형이 유시(流矢)에 맞아 먼저 배에 올랐다. 드디어 군사를 물려 돌아오는데, 마침 밤이요 크게 비바람이 불어 전함이 바위 언덕에 부딪쳐서 많이 부서지고, 신(侁)이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합포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황제와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부사(樞密副使)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제군(諸軍) 중에 돌아오지 않은 자가 1만 3천 5백여 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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