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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의 김방경(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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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5-27 09:07 조회1,7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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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년 충렬경효왕(忠烈景孝王) 원년 휘(諱)는 거(?), 구휘는 심(諶) 또는 춘(?)이고,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순경 태후 김씨이다(송(宋) 공제(恭帝) 덕우(德祐) 원년, 원 세조 지원 12년, 1275)
춘정월
○ 원에 사신을 보냈다.
그때에, 국가가 조폐한데 원이 다시 동방에 거사할까 염려하여,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 공수(印公秀)를 원으로 보내어 표주(表奏)하기를,
“소방은 근래 정토(征討) 때문에 장정이 다 공역(工役)에 나아가고 노약자가 겨우 농사지으며,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은 가난한 백성에게서 거두니 아주 적은 식량까지도 떨어져서 나무열매와 풀잎을 따서 먹는데, 하물며 군사는 물에 상하고 빠져 죽었음에리까! 비록 살아남은 무리가 있을지라도 짧은 세월에 소생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다시 일본에 거사한다면, 전함(戰艦)ㆍ병량(兵糧)은 실로 소방이 지탱해 낼 바가 아닙니다. 나라가 이미 껍질도 남지 않았으니, 이는 어쩔 수 없습니다. 천안(天眼)이 이르지 않은 바이라, 어찌 그렇게까지야 되었겠느냐 하실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이 지극한 정성을 굽어 거두시고 애달픈 호소를 굽어살피소서.”
하였다.

12월
○ 김방경(金方慶)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삼았다

병자년 충렬왕 2년(송(宋) 단종(端宗) 경염(景炎) 원년, 원(元) 세조(世祖)지원(至元) 13, 1276)
추7월
○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을 원에 보냈다.
절일(節日 원 세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왕은 중서성에 글을 올리어 방경의 공로를 말하고 호두금패(虎頭金牌)를 주어 뒷사람을 권장하기를 청하였다. 방경이 원나라에 가서 예물을 올리는 의식을 마치고 전(殿)에 올라갔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송나라를 공격하여 어린 황제 현(?)을 잡아와서 두 사람이 옷자락을 붙잡고 앞에서 인도하였다. 원주는 어린 황제를 태자의 다음 자리에 앉히게 하였다. 유사(有司)가 방경과 송나라 여러 신하들의 석차를 물으니, 원주는,
“고려는 대의에 순응하여 스스로 돌아왔고, 송나라는 힘이 굴하여 비로소 항복하였으니 어찌 한가지로 다룰 수 있느냐? 다만 송나라의 복왕(福王)은 어린 황제의 할아버지 항렬이며 나이도 늙었으니 김재상의 위에 앉히고 다른 사람은 모두 그 아래에 앉게 하라.”
하고 방경에게 호두금패를 주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금패를 찬 것은 방경이 처음이다. 돌아올 때에 왕은 성 밖에 나아가서 맞이하였다.
이때 흔도(?都)가 방경에게,
“황제가 몽고의 군대는 내가 관장하게 하고, 고려의 군대는 당신이 관장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당신은 일마다 왕에게 미루고 왕은 또 당신에게 미루고 있으니 과연 책임은 누가 지는 것입니까?”
하였다. 방경은,
“ 곤외(?外)에서는 장군이 책임을 맡고, 곤내(?內)에서는 왕이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마침 새새끼가 마당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흔도는 잡아오라 하여 손에 들고 놀다가 바로 쳐죽이고는 방경에게,
“어떻습니까?”
하니, 방경은
“농부가 고생해서 농사를 지어놓으면 저것들이 곡식을 모두 쪼아 없애는데, 당신이 죽인 것은 또한 백성을 생각해서 하는 것으로 압니다.”
하였다. 흔도는,
“내가 보니 고려 사람들은 글을 알고 부처를 믿는 것이 중국 사람들과 같고 늘 우리를 보고 ‘몽고 사람들은 사람 죽이는 것을 생활로 생각하니 하늘이 반드시 미워할 것이다.’ 하여 우리를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죽이는 습성을 주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타고난 대로 따를 뿐이니 죄가 될 것이 없으며 당신들이 몽고인의 노예가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축년 충렬왕 3년(송 당종 경염 2, 원 세조 지원 14, 1277)
춘정월
아들 원(?)을 세워 왕세자(王世子)로 삼았다.
김방경을 사(師), 원부(元傅)를 보(保), 김구(金坵)를 이사(貳師), 허공(許珙)ㆍ홍녹주(洪祿?)ㆍ이분희(李汾禧)ㆍ한강(韓康)을 조호(調護)에 각각 임명하고, 그 밖의 소속 관료들도 일대의 우수한 인재로 충당하였다.

12월
○ 중찬(中贊)김방경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바로 석방하였다.
방경이 나라의 중신으로 도원수가 되어 권력이 일국을 좌우하고 전장(田庄)이 각 지방에 널려 있었으며 장사들이 날마다 그 집문을 수위하여 그의 이름을 대고 권세를 부리는 자가 있어도 이를 금할 사람이 없었다. 또 왜를 정벌한데 대한 논공행상이 공정하지 못하여 실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장군 위득유(韋得儒), 중랑(中郞) 노진의(盧進義)가 개인 감정으로 방경을 모함하려 하여 흔도(?都)에게 무고하기를,
“방경이 아들 흔(?), 사위 조변(趙?), 의붓아들 한희유(韓希愈) 및 공유(孔愉)ㆍ나유(羅裕)ㆍ안사정(安社貞)ㆍ김천록(金天祿) 등 4백여 명과 공모하고 왕과 공주 및 달로화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강화에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왜를 정벌한 뒤에 무기는 국가에 바쳐야 할 것 인데 방경은 그것을 모두 집에 간직해 두었고 또 전함(戰艦)을 만들어 반남(潘南) 등지에 두었다가 거사하려 합니다.”
는 등 모두 8가지 조항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흔도가 기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와서 석말 천구(石抹天衢)와 함께 왕과 공주에게 보고하고 방경을 고문하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려 하였다. 유경(柳璥)이,
“우리 나라의 법에 고발한 자를 먼저 가두고 피고를 다음에 가두어서 고발자를 국문하여 고발한 내용이 사실일 때에는 상을 주고 허위일 때에 반대로 벌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 고발한 자는 가두지 않고 피고인을 고문하려는 것은 사리에 부당합니다.”
하니, 흔도가 잠자코 있었다. 왕이 경(璥)ㆍ원부(元傅)ㆍ흔도에게 시키어 서로 심문하게 하여 그것이 허위임을 알고 석방하고, 희유(希愈)가 무기를 은닉한 죄만을 들어 장형을 시행한 뒤에 석방하였다.

무인년 충렬왕 4년(송 제(帝) 병(昺) 상흥(祥興) 원년, 세조 지원 15, 1278)
2월중찬(中贊)김방경을 국문하여 대청도(大靑島)에 귀양보냈다.
홍다구가 우리 나라와 과거부터 감정이 나빠서 틈을 타서 문제를 일으키려 했는데, 방경의 사건을 듣고 중서성(中書省)에서 와서 직접 국문하기를 청하고, 흔도(?都)도 위득유(韋得儒)의 말을 원나라에 알렸다. 원주(元主)는 왕과 공주에게 함께 심문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하여 왕은 흔도ㆍ다구와 함께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다시 방경 부자를 국문하였다.
다구는 쇠사슬로 그의 머리를 감고 못질을 할 것처럼 하며, 매질하는 자에게 그 머리를 치라고 소리쳤다. 종일 알몸으로 서서 추운 날씨에 살이 얼어서 먹장빛처럼 되었다. 왕은 다구에게,
“지난번에 흔도와 함께 국문을 끝냈으니 다시 물을 필요가 있는가?”
하였으나 다구는 듣지 않았다. 방경은,
“우리 나라가 상국을 하늘처럼 받들고 부모처럼 사랑하는 터이니 어찌 하늘을 거역하고 부모를 배반해가며 스스로 멸망하려 들겠느냐? 나는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거짓말로 굴복하지는 못하겠다.”
하였다. 다구는 꼭 허위자백을 받으려 하여 지독한 고문을 실시하니, 몸에는 성한 살이 한군데도 없었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고는 하였다. 다구는 비밀리에 왕의 측근을 꾀기를,
“방경이 죄를 자백한다면 죄가 유배하는 데에 그칠 것이니, 당신네 나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느냐?”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믿고 또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방경에게,
“그대로 인정하라.”
하니 방경은,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이 군졸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몸이 짓이겨 없어질지라도 국가에 보답하기에 부족합니다. 어떻게 저의 몸을 아껴서 허위로 자백하여 나라를 저버리겠습니까?”
하고, 바로 다구에게,
“나를 죽이려거든 바로 죽여라. 나는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너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
하였다. 다구는 이에 ‘방경이 집에 무기를 간직했다.’는 것을 죄로 삼아서 대청도(大靑島)장연현(長淵縣) 남쪽 30리에 있다 에, 흔(?)은 백령도(白翎島)에 유배시키고, 다른 사람은 모두 석방하였다.
방경이 유배의 길을 떠나는데 나라 사람들은 길을 막고 울면서 전송하였다.
다구는 왕에게 청하여, 위득유(韋得儒)를 상장군, 노진의(盧進義)를 장군으로 삼았다.

5월 원에서 흔도(?都)를 불러들였다.
이때 원주는 김방경의 문제로 인하여 차츰 다구와 흔도가 나쁘다는 것을 깨닫고 왕과 방경을 불러들이면서 다구와 흔도도 모두 소환하였다. 다구 등은 비로소 두려워하여 모두 왕을 뵙고,
“황제께서 김시중의 사건을 물으시면 왕이 말씀드리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흔도도 사람을 시켜서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의 나라에 7년간 있는 동안 잘한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아무쪼록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하였다.

추7월
○ 원에서 김방경을 놓아주어, 왕을 따라 귀국하였다.
원주가 왕에게 이르기를,
“방경을 참소한 두 사람이 모두 죽어서 대질 심문할 곳이 없게 되었으나 나는 벌써 방경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를 사(赦)하노라.”
하고, 왕을 따라 귀국할 것을 명하였다.

동10월
○ 다시 김방경을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하고, 홍다구의 당파를 차등을 두어 귀양보냈다.

기묘년 충렬왕 5년(송 상흥 2-이 해 송이 망하였다-원 세조 지원 16, 1279)
3월
○ 대방공(帶方公)징(?)이 독로화(禿魯花)를 인솔하고 원에 갔다.
김방경ㆍ원부(元傅)ㆍ허공 등 고급 관료의 자제 25명에게 모두 3계급을 올려 벼슬을 주어 딸려보냈다.

경진년 충렬왕 6년(원 세조 지원 17, 1280)
추7월첨의중찬(僉議中贊)김방경이 치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방경은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치사할 것을 네댓 번에 걸쳐 요청하였으나 왕은 끝내 들어주지 아니하고,
“지금 천자가 일본을 정벌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보고를 올리고 원수(元帥)를 내세워야 할 터인데 아무런 공과 업적이 없는 자로 보고하면 황제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승지정가신(鄭可臣)을 보내어 간곡히 권유하여 나오게 하였다

12월
○ 원에서 왕을 책봉하여 좌승상 행중서성사(左丞相行中書省事)로 삼고, 김방경(金方慶)을 고려군 도원수로 삼았다.
이때 우리 나라에서는 벌써 병선 9백 척, 뱃사공과 수부(水夫) 1만 5천 명, 군대 1만 명과 군량은 중국의 섬으로 11만 석을 준비하였고, 용품과 기계 일체를 모두 마련해 놓았으나 원나라에서 흔도와 홍다구 등을 보내어 감독하고 우리 나라에서 임금이나 신하는 가만히 서서 그들이 시키는대로만 하게 되어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신사년 충렬왕 7년(원 세조 지원 18, 1281)
3월 원수 김방경이 군대를 인솔하고 합포로 갔다.

하4월 왕이 합포에 갔다. 4일 만에 합포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초하루(병인)에 왕경을 출발하여 15일(경진)에 합포에 도착하고 18일(계미)에 군대와 전함 1천여 척을 사열하였다. 김방경 등이 거느린 우리 군대가 2만 7천여 명, 흔도가 거느린 몽고군과 한군이 5만 명이요, 지난해 10월에 원나라에서 범문호(范文虎)를 보내어 10만 군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바다를 건너 금년 6월 보름에 일기도(壹岐島)로 모이기로 약속되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군량이 13만 3천 5백 60여 석에 달하였다.

5월 일본 정벌군이 합포에서 출발하였다.
○ 흑침(黑?)이 하늘까지 닿았다.

6월 원군(元軍)이 일본병과 패가대(覇家臺)에서 싸워, 원군이 패하였다.

5월 4일(무술)에 모든 군대가 배로 출발하여 27일(신유)에 일본 세계촌(世界村)대명포(大明浦)에 도착하여 통사(通事)김저(金貯)로 하여금 격문을 보내어 설유하였다.
김주정이 먼저 왜군과 교전하였는데 모든 군대가 모두 내려가서 어울려 싸웠다. 낭장 강언(康彦)과 강사자(康師子) 등이 전사하였다. 모든 군대가 일기도를 향하여 가는데, 원나라 장군 홀로물탑(忽魯勿塔)이 거느린 선군(船軍) 1백 13명이 폭풍을 만나 떠내려갔다.

6월 8일(임신)에 태재부(太宰府)의 패가대(覇家臺)그 나라의 박다진(博多津)으로 서해도(西海道)의 축전주(筑前州)에 속한다 에 닿았다. 김방경ㆍ김주정ㆍ박구ㆍ박지량, 원 나라 장군 형만호(荊萬戶) 등이 일본병과 싸워서 3백여 명을 죽였는데, 일본병이 돌진하여 관군의 진용이 흩어지고 홍다구는 말을 버리고 달아났다. 원 나라 장군 왕만호(王萬戶)가 다시 측면으로 공격하여 50여 명을 죽이니, 일본병은 마침내 물러났다.
다구는 가까스로 살아났다가 이튿날 싸움에서 다시 패하였고, 군중에는 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죽은 사람이 모두 3천여 명에 달하였다. 흔도와 다구 등은 여러 번 전투에서 불리하였고, 또 범문호가 기한이 지났는데도 오지 아니하므로 돌아갈 것을 논의하였다. 방경은,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3개 월의 식량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 1개 월의 식량이 아직도 남았으니 남방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싸우면 반드시 섬의 오랑캐를 격멸할 것이다.”
하고 강조하니, 여러 장군은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계미년 충렬왕 9년(원 세조 지원 20, 1283)

12월중찬(中贊)김방경(金方慶)이 치사하였다.
첨의령(僉議令)을 더 내려주고 상락군개국백(上洛郡開國伯)을 봉하고 식읍일천호 식실봉삼백호(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를 주었다.
어느 날 휴가를 얻어서 선대의 산소에 참배하러 가게 되었다. 왕은 그의 아들 순(洵)을 태백산 제고사(太白山祭告使)에 임명하여 그를 따라서 고향에 가게 했는데, 친구들과 수일을 머물고 나서,
“농촌에 가을 일이 한창이어서 백성들이 잠시라도 틈을 낼 수 없는 시기인데 오래 머물면서 그들을 귀찮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고 바로 돌아왔다.

을미년 충렬왕 21년(원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1295)
8월
○ 김방경(金方慶)의 작위를 올려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을 삼았다

경자년 충렬왕 26년(원 성종 대덕 4, 1300)

추8월첨의령으로 치사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방경은 성격이 충직하고 믿음직하고 후하며 엄격하고 말이 적었다. 틀이커서 조그마한 형식에 거리끼지 아니하며 옛 전고(典故)를 잘 알고 일 처리에 결단력이 있었다. 자제를 대하는데도 꼭 예절에 따랐으며 자신의 몸가짐은 부지런함과 검소를 바탕으로 하였다. 친구를 버리지 아니하였고 평생에 임금의 잘잘못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도 나라일을 집안일처럼 걱정하였고, 나라에서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머리털이 희지 않았고 기골이 보통과 달라서 추위와 더위에도 병이 없었는데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나니 89세였다. 이때에 위력 있는 자가 방경을 미워하여 예장(禮葬)을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 뒤에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 김항용 - 귀한 자료 발굴에 감사합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충렬공(김방경) 할아버지께서 충렬왕 9년에 상락군개국백(上洛郡開國伯)에 봉해지고, 충렬왕 21년에 작위를 올려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이 되셨다는 새로운 기록을 접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려사에는 엄연히 충렬왕 9년에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말입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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