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의 문인 (27) - 몽촌 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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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5-28 03:18 조회1,525회 댓글0건본문
퇴계(退溪)의 문인 (27) - 몽촌 김수
■ 퇴계학연구 (퇴계선생 제자전기4) 제18집 (1998, 국제퇴계학회 경상북도지부)
P173
115. 김수(金,日+卒)
김수는 字가 자앙(子昻), 號가 몽촌(夢村)이며 본관은 안동인데 서울에 살았다. 가정(嘉靖) 정미년(1547)에 태어나 일찍 도산에서 선생(=퇴계)을 좇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총명한 재능과 빼어난 결단력으로 주목받아 화려한 벼슬들을 두루 거쳤다. 임진년(1592)에 경상감사로서 도내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충청·전라의 병력과 협조하며 충성을 다 하였는데 용인에 이르러 궤멸되어 돌아왔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공이 충성을 다하지 않고 몸을 숨기고 난을 피하기만을 일삼는다고 지목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문을 돌려 장차 토벌하려고 하였다. 공이 그 불손함에 격노하여 곽재우가 난민(亂民)이라는 장계를 올려 죽이고자 하였는데, 마침 ★학봉 김공이 초유사가 되어 힘써 화해시켰다.
계사년(1593)에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당시 팔도가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 10만의 군수조달의 책임이 모두 공에게 있게 되었다. 공은 정성을 다하여 처리하여 모자람이 없도록 하였다.
광해군 초년에 은거하고 있던 ★곽재우를 기용, 부총관에 임명하여 매번 운검(雲劒)34)을 지게 하였는데 도총관이었던 공은 재우에게, "공은 오랫동안 곡기를 끊고 지냈으니 어찌 이를 감당하리오" 라고 이르고는 대신 짊어지면서 조금도 지난 날의 묵은 감정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비로소 공의 도량에 감복하였다. 벼슬은 판중추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言行錄(언행록)>
"小學과 近思錄, 心經 가운데 어느 책이 가장 중요합니까" 라고 물었다. 선생(=퇴계)이 대답 하시기를 "小學은 체와 용이 고루 갖추어져 있고, 近思錄은 의리가 정밀하여 모두 읽지 않을 수 없지만 처음 배우는 사람이 공부하는 데는 心經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기에는 주자의 편지글보다 나은 것이 없다. 벗과 문인들의 자질과 병통이 모두 달라 재목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고 증세에 따라 처방하셨으니 수 많은 문답 가운데 어찌 우연히 나에게 적합한 것이 없겠는가? 진실로 침잠하여 음미하다 보면 마치 면대하고 가르침을 받는 듯 할 것이니 스스로 수양하는 공부에 어찌 도움이 적다 하리오." 라고 하셨다.
<시(詩)>
매양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홀로 탄식하였거니,35)
지금에사 그대 있어 천연(天淵)을 노래하네.
기공(沂公)의 오묘한 뜻 순공(淳公)에게 드러내었거니,36)
천년 뒤에 그 뉘 있어 옛 글을 풀어낼까.
<선생(=퇴계)에 대한 공(=김수)의 제문>
산림에 해 긴데, 강학의 공 깊으셨네.
도(圖)와 잠(箴) 벌려 두고, 날마다 공경하셨지.
경(敬) 공부 이치(理致) 추구, 두 가지 고루 하셔,
사색과 실천으로 한 평생 보내셨네.
성취가 깊으시고 수립함이 우뚝하여,
푸른 하늘 흰 해처럼, 드높기 태산처럼,
성대(聖代)의 참된 선비, 하늘 백성 선각자로세.
일상의 요긴한 글 수수한 맛이 있어,
실천하고 남은 힘 시문(詩文)에 쏟아, 진위(晉魏)의 문인들 뛰어 넘었네.
거룩할손 선생이여! 드물게 나시는 분.
깊은 소양 두터운 쌓음, 펼치어 크게 이루셨네.
풍도 듣고 사모하여 멀리서 찾아왔지.
따뜻하게 맞이하여 부지런히 가르치사,
이끌고 깨우쳐 근본을 세우게 하셨네.
차례따라 인도하사 어리석음 깨치게 하시고,
깊은 넓은 학문으로 한량없이 베푸셨네.
아아 성인의 학문, 면면히 이어 온 한가닥,
선생이 얻으시어 끊어질 듯 이으셨네.
----- 생 략 -----
오호라 선생이여, 오늘에 가시다니!
나라에는 기둥 없고, 세상은 길을 잃어,
선생이 나심으로 우리 학문 부지터니,
선생이 가심으로 우리 학문 외롭도다.
어리석기 나 같은 자, 다행히도 가르치사,
거듭거듭 깨우치고, 격려하심 간절했네.
▣ 김발용 - 좋은공부 하였습니다. 몽촌공 선조님 기억하겠습니다.
▣ 김윤만 -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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