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軒(기헌) 金琦(김기)의 丁生傳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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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6-02 01:24 조회1,579회 댓글0건본문
2003. 6. 1. 일요일 오후
몇 가지 자료를 찾기 위해서 국중도 (국립중앙도서관)에 와 있습니다. 찾고자 하는 자료가 있는 1층 서고자료신청대와 7층 고전자료실은 문이 닫혀 있습니다. 이 두곳은 일요일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3층 정기간행물실과 2층 문학실에서 몇가지 자료를 찾아 복사하고, 인터넷이 있는 5층 디지털자료실에 들어와 인사차 우리 홈페이지에 들어와 있습니다.
방금 복사한 자료가 있어 간단히 소개를 하고, 청주 내려가서 보충해 놓을까 합니다. 일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문학과 학생이신 김수현 님께서 소개해 주신 기헌 김기 선생의 정생전을 찾아 분석한 논문이 몇 편 있습니다.
기헌 김기 선생은 안렴사공파 김공석의 후손으로 안렴사공파 내의 소파로는 여주파 후손이 됩니다. 여주 흥천면 백양리에 있는 김공석 신도비는 조카인 화산군 김주 찬, 송인 서로 되어 있으며, 이 여주파 후손으로는 80년대 초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이름을 날리신 김재익 님도 계십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寄軒(기헌) 金琦(김기)의 丁生傳 (01)
■ 연세어문학 제5집 (1974,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p15
失意의 美學 -미발표 한문소설 丁生傳 考- (송준호)
一. 小引
여기 試考(시고)해 보려는 <정생전>은 이조 영조시대의 불우한 재야 한학자 金琦의 作이다. 본 작품은 비교적 장편에 속하는 것으로, 작자 김기의 遺稿(유고)가 간행될 때에도 수록되지 못하고 그의 후손 家中에서 單本으로 筆寫되어 전해지던 것을 필자가 수년 전에 입수한 것이다.
천?한 인생의 이야기라고 해서 유고에 수록되지 못했다는 이 작품의 내용이 오히려 흥미로와 여기 試考해 보기로 한다.
二. 작자 김기의 생애
김기는 字를 ?圭, 號를 寄軒 또는 西湖라 하였고, 이조 경종2년 임인(서기 1722년)에 경기 여주 백양리 사제에서 안동김씨 ●嗣慶(사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行狀에 의하면, 그는 용모가 청수하고 기상이 탁?하며 性度 擧止가 莊重 凝定(응정)하여 보는 사람들이 모두 원대한 기량의 인물로 定稱했으며, 취학 후에는 文理에 ?달하여 塾師(숙사)들이 때때로 질문에 응대하지 못했고 기억력이 뛰어나 무슨 서적이나 한번보면 모두 기억하여 동리 부노들이 모두 대과에 장원 감이라고 囑望(촉망)하였다.
그러나 18세때 科場(과장)에 나가 당시 선비들의 不正趨勢가 成習이 되어 썩어가는 것을 보고 鄕第(향제)로 돌아와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기로 뜻을 굳혔으며 그는 효성이 극진하여 父公 嗣慶의 병환이 해가 지나도 낫지 않자 온천욕법이 좋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충청도 신창현으로 부공을 모시고 이거하였다가
부공의 병환이 쾌차하자 故庄(고장)에 돌아가지 않고 충청도 옥천으로 이거하였으며, 거기서 당시의 名儒 耕窩(경와) ★李命源에게 후대를 받아 교유하면서 經傳子史를 위시한 제가 잡서를 통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이런 공부들이 모두 성인의 도를 배우는 길이 못된다고 깨닫고 당시 畿湖(기호)에서 학행의 重望을 지고 있던 雲坪 ★宋能相, 木+樂泉 ★宋明欽 두 학자의 문에 차례로 출입하며 聖學에 전념하였다.
그뒤 상경하여 뒤에 相國이 된 竹下 ★金불화변翌(김익), 당시 관직에 있던 ★李鼎輔, ★李益輔, ★李?源 등과 친교를 맺아 그들로부터 한결같이 出仕의 권고를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그 도를 실천할 수 없는 바에야 구차하게 벼슬자리만 지키고 앉았으면 그것은 祿과 헛된 명예만 탐내는 일이 아니겠으냐고 반문하고 사뭇 거절하였다.
그뒤 스승 ★宋 雲坪이 돌아가자 더욱 世情과 멀어져 전라도 무주 雪川에 은거하며 산수 자연 속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유행 역질에 가족이 전염되어 8,9인이 함께 사망하자 가난과 함께 무서운 정신적 痛苦롤 겪었으며,
그러면서도 晏然(안연)히 살아가는 그의 생활을 딱하게 여긴 당시의 陜川(협천)군수 ★沈 翼雲이 자기의 子姪과 향리 자제들을 보내 수업시킴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때에 及門한 제자들 중에 ★朴 致遠, ★金 謹樞, ★愼 敦恒 (연암집, 열녀 함양박씨전에서 立言之士라고 稱道된 학자) 등은 모두 遁世(둔세) 究學한 평민 학자들이었다.
44세 되던 영조 41년에 父喪을 당하자 가난한 생활을 잘 아는 ★沈 군수의 주선으로 장례를 마쳤으며, 그뒤 충청도 영동에 이거하여 喪配한 伯氏 僉知公의 8세된 아들을 데려와 撫育(무육)하여 성취시키고, 만년에는 사뭇 영동에 寓居(우거)하면서 향리 사족 학자들과 교유하며 講學詠詩로 여생을 마쳤다.
尹씨, 吉씨, 郭씨 3配에서 ●東說, ●東祐 두 아들을 두고 73세로 정조 18년 갑인(서기 1794년)에 졸하였다.
三. 작품의 梗槪(경개)
☞ 청주 내려가서 정리하겠습니다.
▣ 김발용 - 휴일도 바쁘게 보내고 계시군요. 주회님의 열정과 노고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 김태서 - 열정적인 자료 발굴에 감사드립니다.
▣ 솔내영환 - 보람찬 휴일 보내셨습니다. 합천군수 심익운의 도움을 많이 받았군요.
▣ 김항용 - 전화좀 주시지 않구요. 늘 감동입니다.
▣ 김태영 - 님의 열정 덕분에 편하게 많은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 김윤만 - 그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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