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軒(기헌) 金琦(김기)의 스승,교유,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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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6-03 03:45 조회1,528회 댓글0건본문
1. 스승 : 운평 송능상, 역천 ★송명흠
★송명흠(宋明欽)
1705(숙종 31)∼1768(영조 4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역10泉). 아버지는 요좌(堯佐)이며,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사화를 피하여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도곡(塗谷)·송촌(宋村) 등지로 옮겨다니며 살았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충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에 제수되어 별유(別諭)가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재·민우수(閔遇洙)·송사능(宋士能)·김양행(金亮行)·신소(申韶) 등과 서신으로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역천집》이 있다. 〈權五虎〉
2. 교유 : 경와 이명원, 죽하 ★김익, 삼주 ★이정보, ★이익보, 이?원, 지산 ★심익운
★김익(金#익04){3}
1723(경종 3)∼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광중(光仲), 호는 죽하(竹下)·약현(藥峴). 제남(悌男)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상석(相奭)이다.
1763년(영조 39)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왕이 인원왕후(仁元王后:肅宗繼妃)의 제삿날을 맞아 매일같이 불공을 드리는 것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어 응교에 제수된 뒤 1769년에 세자시강원 겸 필선에 임명되었고, 1778년(정조 2)에 대사헌이 되었다.
1782년 강화유수를 거쳐 이듬해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임명되었다.
1784년 우의정으로 진주 겸 주청사의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86년에 또다시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9년 우의정에서 물러났으나 바로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元裕漢〉
★이정보(李鼎輔)
1693(숙종 19)∼1766(영조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 아버지는 호조참판 우신(雨臣)이며, 어머니는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
1721년(경종 1)진사시에 합격하고 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32년(영조 8)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대교를 거쳐 1734년 봉교가 되었다.
1736년 병조좌랑·정언·경기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었는데,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상소하였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하였다.
1737년 부수찬·교리가 되고 이조좌랑·교서관교리에 전임되었으며, 1738년 이조정랑·응교·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를 거쳐 1740년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府城)을 쌓고 목장을 설치하여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1742년 승지·부제학·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48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하여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에 선임되었으며, 1750년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1752년 동지경연사·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고, 1754년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 등의 중직을 역임하고, 1756년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 이조판서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대제학·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되었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 하여 여러 번 파직되었다.
글은 주의(奏議)에 능하였으며 생각하는 일은 반복하여 상소하고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나 시조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江漢集. 〈金龍國〉
★이익보(李益輔)
1708(숙종 34)∼1767(영조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겸(士謙). 참판 우신(雨臣)의 아들이다.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41년에 검열·예문관봉교로 재직중 김상복(金相福)·황경원(黃景源) 등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그뒤 정언·교리·응교·사인·필선·문학 등을 거쳐 대사간에 특진되고, 1749년에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남겼다.
1752년에 좌승지에 임명되고, 그뒤 고성군수·예조참의·공조참판·도승지·예조참판·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에 대사헌이 되고 이어 병조판서·수어사·이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다.
이에 앞서 민정중(閔鼎重)이 안도(按道)할 때에 함경도 백성들의 편익을 위하여 제정하였던 상정제(詳定制)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폐단이 생기게 되자 왕명을 받들어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이를 개정하였다.
그뒤 판의금부사·우참찬·회양부사·병조판서·이조판서·판돈녕부사·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續朝野輯要, 國朝榜目. 〈劉元東〉
★심익운(沈翼雲)
1734(영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붕여(鵬如), 호는 지산(芝山). 일진(一鎭)의 아들이다.
1759년(영조 35) 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이조좌랑·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을 때 모역에 걸린 그의 고조부 익창(益昌)의 후손이라 하여 청환직(淸宦職)에 서임될 수 없다는 소론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1760년 예조판서 정휘량(鄭#휘05良)이 일진의 모자가 양자(養子)관계를 파하고자 혈서로 단자(單子)한 사건과, 익운이 손가락을 자른 것은 패륜행위라고 하자, 이 사건으로 1776년 대사헌 박상로(朴相老)의 탄핵을 받아 결국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익창의 손자인 사순(師純)에게 일진이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그는 모든 난(亂)의 시초가 3적(賊), 즉 향당(鄕黨)·주군(州郡)·조정(朝廷)에 있다 하고 모두가 이익만 탐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하였다.
또, 나라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군주와 경대부가 검소하고 부민(富民)이 절용해야 하며, 토지소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百一集. 〈張弼基〉
3. 제자 : 박치원, 김근추, 신돈항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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