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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김영돈 할아버지 집에서 죽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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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6-03 05:15 조회1,5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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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 무자년 충목왕 4년(원 순제 지정 8, 1348)

추7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김영돈(金永旽)이 졸하였다.
영돈은 동생 영후(永煦)와 함께 재상의 지위에 올라 당세에 유명하였다

12월 왕이 김영돈의 집에서 훙(薨)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병이 나서 김영돈의 집으로 이어(移御)했었는데, 5일(정묘)에 훙하니 재위가 5년이고 수(壽)가 12였다. 왕의 천성은 총민(聰敏)하였으나 즉위한 처음부터 모후(母后 덕녕공주(德寧公主))가 권세를 부리고, 강윤충(康允忠)ㆍ배전(裵佺)ㆍ신예(辛裔) 등이 서로 이어가면서 정권을 잡았으므로 왕후ㆍ김영돈 등이 오래된 폐단을 정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는 윤충과 예의 모함에 빠지게 되니, 식자(識者)들이 애석해 하였다. 뒤에 원에서 충목(忠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씨(李氏) 이색(李穡) 는 이렇게 적었다.
근세의 태평 시대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들 명릉(明陵 충목왕을 말한다)을 일컫는데 ‘대개 5년 간 조야(朝野)가 깨끗하고 조용하여 사류(士類)는 즐거워하였고 백성은 의지할 수 있어 이른바 조금 안정이 되었었다.’ 하였으니 역시 지나친 말은 아니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 忠穆王.   무자 4년(1348), 원 지정 8년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02/02 21:35  

○ 가을 7월 임신일에 천변이 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旽)이 졸하였다.
○ 12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 손홍량(孫洪亮)과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인호(金仁浩)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정묘일에 왕이 ★김영돈(金永旽)의 집에서 훙(薨)하였다. 이때 신예(辛裔)ㆍ전숙몽(田淑蒙) 등이 서로 이어 나라일을 전단(專斷)하였으므로 북전(北殿)의 불량배들은 비록 제거되었으나 몇 달이 안 되어 그들의 옛 친척과 친구들이 경상(卿相)의 자리에 배치되었다. 대언(代言) 정사도(鄭思度)가 아첨으로 등용되어 오래도록 정방(政房)에 있으니,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몰려들었다. 이때 사람들이 신예를 지목하여 신왕(辛王)이라 하였다. 또한 모비(母妃)는 젊은 나이로 그 사이에 있어, 강윤충(康允忠)과 배전(裵佺)이 드나들면서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상벌을 마음대로 행하였으므로, 왕후(王煦)와 ★김영돈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옛 폐정을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윤충 등의 모함에 빠져버리니 식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 덕녕공주가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 기철(奇轍)과 정승 왕후에게 명하여 정동성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 호군 신원보(申元甫)를 원에 보내어 국상(國喪)을 고하였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태영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자료가 종합 정리되었습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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