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9)-金時讓편(번역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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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6-03 22:12 조회2,063회 댓글0건본문
그 해 겨울에 과연 공의 말과 같이 오랑캐가 군사를 몰고 들어왔다. 회계(會稽)의 부끄러움은 한강의 물로도 씻기 어려웠다. 정축년(丁丑年: 1637) 봄에 상감이 환도(還都)하여 바로 공(公)을 불렀으나 병으로 인해 힘껏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상감께서 비답(批答)하기를 "요전에 내가 남한산성에 있을 때 자주 경(卿)을 생각했었다. 지금 경이 비록 병중에 있다고 하나 나와 더불어 의롭게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고자하니 당연히 빨리 올라오라."고 하자, 공은 황공(惶恐)하여 아픈 것을 무릅쓰고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상감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물로 간병하며 말을 나누었다. 공(公)이 상소문에서 대략 말하기를 "패군(敗軍)하여 군율(軍律)을 잘못한 자를 즉시 군중에서 베는 것은 고금(古今)의 불변의 법칙입니다. 장신(張紳)·김경징(金慶徵) 등은 얼마나 추궁할 사정이 있었습니까? 이숙번(李叔蕃)은 정사원훈(定社元勳)인데도 태종(太宗)은 그의 교만 방자함 때문에 그 훈적(勳籍)을 삭탈(削奪)하였는데, 장신(張紳)이 종사(宗社)를 함몰케 한 죄를 교만 방자함과 비교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나라의 형(刑)을 바로 잡지 않아 자살하게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어찌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겠습니까? 장신이 자살한 것을 듣건대, 바로 자기 집으로 들어가 죽었다고 하는데, 국법에 형(刑)을 받은 사람은 저자와 군중에 버려지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금오랑(金吾郞)의 직무를 잘못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데, 대간(臺諫: 司憲府와 司諫院)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큰 전란이 있은 후에 조정의 신하는 사심(私心)을 깨끗이 씻어내고 일심으로 봉공(奉公)하게 하여 어지간히 하늘의 뜻이 돌아오도록 하여 국세(國勢)를 만회(挽回)하려는데, 지금 한 나라의 시비(是非)를 공정하게 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움만 건지는 것을 급무(急務)로 하니 나라가 끝내 어느 지경에 이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감이 답하여 이르기를 "상소의 말이 심히 마땅하도다. 나도 또한 여기에 잘못이 있노라. 김경징(金慶徵)· 강진흔(姜晋昕) 등은 대간(臺諫)의 안율(按律)을 다시 청하라."고 하였다. 오월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명하니 병으로 사양하고 수개월을 객사(客舍)에서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수찬(修撰) 이조(李稠)가 건의하여 아뢰기를, "김모(金某: 時讓)와 같은 역량(力量)과 재식(材識)을 어느 곳에서 얻겠습니까? 비록 안질이 있다고 해도 총명이 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불러 올려 서울에 두고 국정에 자문하소서."라고 하였다.
상감이 윤허(允許)하여 드디어 공을 부르니 병으로 두 번이나 사양하였다.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내가 경의 충성을 아노라. 언론(言論)이 남보다 뛰어나 심원(甚遠)하니 경(卿)을 도하에 두고 보좌해주기 바라니 발걸음을 삼가지 말라."고 하였다. 공(公)이 또 간곡(懇曲)하게 청하여도 상감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부득이 입경(入京)하였다.
비국(備局)이 아뢰되, "김모(金某)는 눈병은 비록 중하나 정신은 옛날과 같으니 청컨대 당상(堂上)에 임명하고 집에 있으면서 모시게 하소서."하였다. 공(公)은 굳이 마다하고 환향(還鄕)하였다.
신사년(辛巳年:1641) 조정이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하게 되었는데 대제학(大提學) 이식(李植)과 총재(摠裁)인 재상(宰相)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김모(金某)는 전고(典故)를 잘 아는지라, 이제 한 사람의 사필(史筆)로 증거를 정함에는 반드시 이 사람에게 기대하오니 함께 일하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상감이 윤허(允許)하고 공(公)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주었다. 교지(敎旨)를 내려 공(公)을 불렀으나 계속 글을 올려 사양하다가 부르심에 가기로 마음을 굳혀 여주(驪州)까지 왔는데 병이 심해져 상소하고 비답(批答)을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계미년(癸未年: 1643) 5월 4일에 충주의 사제(私第)에서 돌아가니 나이가 63이었다. 부고(訃告)를 상감에게 아뢰니 크게 슬퍼하며 조회도 걷고 부의(賻儀)와 가자(加資)를 내렸다.
그 해 8월 18일 기묘일(己卯日)을 택하여 괴산(槐山) 침령(砧嶺: 현 능촌리. 일명 방아재)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선영(先塋)을 따라 장사지냈다. 장사(葬事)는 관비(官費)로 하였다.
제가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읽는데 김방경(金方慶)을 칭송하기를 "충성이 곧고 믿음이 두터우며, 인품의 그릇이 크며, 고전(古典)을 많이 알아 일을 결단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였다. 공(公)이 바로 이 자손(子孫)이 아닌가? 얼마나 흡사한가? 공은 내행(內行)을 닦고 청렴(淸廉)함을 지키고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었으니, 비록 평소에 서로 지내지 않던 자도 또한 간격이 없었다. 나라를 위하는 계획(計劃)과 책략(策略)에 이르러서는 적을 짐작하여 위험스러움을 단호히 처리한 즉, 마땅히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들어보지 못하여, 장부(丈夫)라고 하는 자들도 공의 말을 들으면 마침 놀라움을 느끼곤 했다.
을해년(乙亥年: 1625) 여름에 오랑캐 사신(使臣)이 우리 역마(驛馬)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네 말을 사용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반드시 우리 동쪽에 들어와 말을 먹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동쪽의 지형을 살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경업(林慶業)이 오랑캐의 협박을 받을 때 공이 말하기를, "내가 임경업(林慶業)의 사람됨을 아는데, 죽을 줄 알면서 피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끝내는 기어이 도망하여 그 후에 죽었는데 모두 공의 말과 같았다.
예로부터 충성(忠誠)과 지혜(智慧)를 가진 선비가 어진 임금을 만나면, 하는 말을 듣지 않음이 없고 계책이 행하지 않음이 없는 고로, 난리가 나도 다스릴 수 있고 위태로워도 편안하게 할 수 있었으니, 신하와 임금 모두가 영화(榮華)롭게 후세에 이름을 전했는데, 공의 충지(忠智)가 어찌 옛사람들보다 못하랴?
공이 인조(仁祖)와의 만남의 기회는 역시 영원한 것이었다. 큰 일이 있으면 상감은 반드시 공에게 묻고, 공의 말이 있으면 상감은 반드시 그 충성(忠誠)과 재지(才智)를 칭송(稱頌)하였으며, 증질(增秩)하여 표창(表彰)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끝났을 뿐이고, 대책에 그 한 두개를 썼을 뿐, 여전히 미처 다 쓰지 못하였다.
조영평 금성(趙營平 金城)의 방략(方略)은 한(漢)나라 조정의 공경(公卿)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는데, 홀로 위상(魏相: ?-BC59 서한의 어사대부. 宣帝에게 직접 흉노를 치게 상소하였음)이 이를 써서 강(羌: 오랑캐의 일족)을 평정하는 공(功)을 세웠다. 공이 있을 당시에는 어찌하여 이렇게 도와주는 정승이 없었던가?
공(公)은 책에 눈이 지나가면 그것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니, 기억력은 타고난 자질었다. 제사(諸史)를 침착하게 보는 동안에 전기(傳記)는 절로 통하였으니, 학사(學士)·대부(大夫) 중에 사람이 혹 단정하고 능한 자가 있지마는, 공은 역대에 제작한 헌장(憲章)·문물(文物)·이사(吏事)·재화(財貨)·역사문서 등등 세세하고 미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완료하여 이 가운데 옛것에 공과 같은 이가 또 있었던가?
기사년(己巳年: 1629)에 금나라 사람들이 인삼(人蔘) 수 천근을 보내어 푸른 베(靑布)와 바꾸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쌀과 베를 팔고 사서 이에 응하였는데, 5년 만에 금(金)나라 사람들이 또 그 수효대로 되지 못한 것을 투정하였다. 안팎의 일을 맡은 신하들은 눈이 어둡고 마음이 막혀 기억하지 못하였다. 상감이 이를 공(公)에게 묻게 하니, 공(公)이 여러 고을에서 나눠 받은 것의 많고 적음과, 각 도(道) 감사(監司)와 비변사에서 아뢴 날짜까지를 입으로 외우고 글로 썼다. 그 후에 그 장부를 구하여 맞추어 보니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었는데, 상감이 곧 탄복(歎服)하여 이르기를, "세상에 드문 총명(聰明)이다."고 하였다. 그 외에 어린아이 때 우연히 어떤 집 벽에 전답(田畓) 결수(結數)를 기록한 것을 보았는데, 잠깐 눈을 지나쳤지만 또한 일생토록 잊지 않았으니 공(公)은 이인(異人)이라 할 만하다.
인조(仁祖) 말년(末年)에 정승을 임명하려 하였는데, 공(公)을 주목하였으나 공(公)이 병으로 인하여 할 수가 없었다. 공이 문장을 하는 데는 작은 가닥만 보고 조탁(雕琢: 쪼고 다듬음)하지 않고도 만들어 냈으며, 대론(大論)으로 소(疏)를 지음에 있어서도 종이를 잡고 서서 써내려 가는데 사람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부인(夫人)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익재선생(益齋先生) 제현(齊賢)의 후손이요, 증 승지(贈 丞旨) 군수(郡守)인 대수(大遂)의 따님이다.
17세에 공에게 출가하였는데 천성(天性)이 순하고 착하며 정숙하고 밝았다. 공(公)과 같은 해에 출생하였는데 공(公)보다 10년 후에 돌아가니 나이는 73이었고 공(公)의 묘에 합장(合葬)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군수(郡守) 곡( )이요, 차남(次男)은 바로 관찰공(觀察公)이요, 큰사위는 사간(司諫) 이도장(李道長)이요, 둘째사위는 군수 (郡守) 김홍석(金弘錫)이요, 셋째사위는 승지(丞旨) 민점(閔點)이다. 측실(側室) 아들 둘이 있어 섭(燮)이라 하고, 만(巒)이라고 한다. 군수(郡守)는 직장(直長) 윤성득(尹誠得)의 딸을 처(妻)로 맞이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관찰공(觀察公) 맏아들인 추만(秋萬)으로 후사(後嗣)하였는데, 생원(生員)으로 부사(府使) 홍착(洪) 따님을 처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두니 봉지(鳳至)·인지(麟至)이다.
관찰공(觀察公)은 정언(正言) 허실(許實)의 따님을 처(妻)로 맞이하여 2남1녀를 두니 장남(長男)은 군수의 뒤를 이었고 차남(次男)은 어려서 잃었으며 사위는 서경조(徐敬祖)이다. 이도장(李道長)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원정(元禎)은 문과에 합격한 부사(府使)이고 원록(元祿)은 문과(文科)에 합격하였고 원례(元禮)는 어려서 죽고 원지(元祉)가 있으며, 사위는 참봉( 奉) 장영(張金永)·유학(幼學) 최두망(權斗望)·곽전(郭鐫)·박명징(朴明徵)이다. 김홍석(金弘錫)은 4남 5녀를 두었는데 제(濟)·오(澳) 외에는 어리고, 사위는 진사(進士) 박수검(朴守儉)·생원(生員) 안초(安 集)·유학(幼學) 오한주(吳翰周)이며, 2녀는 일찍 잃었다.
민점(閔點)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안도(安道)·종도(宗道)는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임명을 기다리고 있고, 홍도(弘道)·주도(周道)는 진사(進士)이며 딸은 어리다.
명(銘)에 이르노니,
선철(先哲)의 말에
"눈이 통달한 것을 명(明)이라 하고,
귀가 통달한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이 통달한 것을 지(智)라 하고,
지(智)가 통달한 것을 덕(德)이라 하였는데,
이 네 가지를 가진 자를 고금(古今)에 인재(人才)라 칭한다."함을 믿으리로다. 그 전체 중에 열의 하나도 얻기가 어렵도다.
하담(荷潭) 김공(金公)이여!
사철(四徹)이 그 성품(性品) 속에 모두 구비되어 있도다.
불룩한 큰배에 새겨진 만 권의 책이여!
역대(歷代)의 난(亂)을 다스린 사적(事迹)
두 눈에 환한데 누가 빠져나가리.
오랑캐의 수레에 대한 사정은 그릇되게 멀리 두고
같은 조정에서 다투는 일은 가까이 하였다가
뒤에 성패(成敗)를 당하고서야 손가락을 꼽아 보게 드러남이여!
그 마음과 지식이 합하여 하나의 덕이 되고 저울이 되니
칼자루를 잡은 자는 공(公)의 두 세 개의 상소문을 읽어보시라.
충성으로 가득함과 마음의 공정함으로
바탕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볼 수 있으리니
태양 같은 황제도 그의 참된 충성이 모자라다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무용(武用)을 빛나게 일찍이 하지 못했던가?
아아! 멀게는 상락(上洛: 諱 方慶)은 고려조(麗朝)에 시구(蓍龜)였고
공은 지금 그 후손으로 그 뒤를 따라 그 아름다움을 이었으니
비록 작위(爵位)는 크다 해도 나이로는 그대의 할아버지에게 손색이 없구나!
대저 누가 할아버지의 자손(子孫)이라 아니 하리요?
멀리 천년을 이어온 하나의 자취로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後) 경술(庚戌. 1670. 현종11년) 팔월(八月) 일(日) 세움.
<끝>
▣ 김주회 - 계속되는 선조님 신도비 묘비문 타이핑 작업!!! 감사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김시양 선조님 신도비문은 장문이네요. 한편의 전기문 같습니다.
▣ 김태서 - 귀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아이구 수고 大, 多.
▣ 김발용 - 감사합니다. 하담선조님 배위께서는 "역옹패설" 익제선생의 후손이시군요.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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