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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文景公)김수동(金壽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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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3-06-06 19:11 조회1,8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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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말년에 정치가 문란(紊亂)해지자, 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폐하기를 은밀히 모의하였다. 그때 문경공(文景公)김수동(金壽童)이 좌상(左相)이었는데, 성공(成公)이 이미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정하고, 김 좌상의 집으로 찾아가 아뢰었다. 김공이 그 말을 듣자 이윽고 대답하기를, “어찌 한 재상으로서 불시에 와서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가. 그대는 내 머리를 베어 가라.” 하면서, 목을 내밀어 책상 위에 얹었다. 성공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다시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이미 위태로워 우리들은 부득이 이 모사(謀事)를 하였습니다. 사실인 즉 진성대군(晉成大君 성종의 둘째아들로 뒤에 중종)을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하였다. 그 당시 중종은 왕제(王弟)로서 진저(晉邸)에 있었다. 김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나도 가겠으니, 그대는 먼저 가시오.” 하였다. 성공이 일어나 나가자, 김공은 천천히 의관을 정제하고 사람들을 피하여 왔다. 그때 반정을 일으킨 제공(諸公)들은 모두군복을 입고 군사를 거느리고 창덕궁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공이 이르러 말에서 내려 바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곧 병조 판서를 불러 묻기를, “그대들은 군대를 보내 진성대군의 집을 호위하게 하였는가.” 하니, 미처 못 하였다고 대답한즉 곧, “판서가 친히 군인을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라.” 하고 이내 대궐로 들어가 연산군을 폐출하며 울면서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하오니 딱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몹시 인심을 잃었으니 역시 어찌 하겠습니까. 옥체를 잘 보중하시어 가시오소서,” 하였다. 드디어 중종을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뒤에 사직하고 집에 나와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김공은 젊은 나이에 급제하여 주서(主書)가 되어 그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참판(參判)채수(蔡壽)가 그 때 승지로 있었는데, 그의 단정하고 무게 있음을 사랑하여, 마침내 그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채판서의 아들 소권(紹權)의 어렸을 적 이름이 수동(壽童)이었다.
 
   
 출전;해동악부(海東樂府)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중종반정 거사 당시 문경공의 생생한 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정승으로서의 체신을 지키면서 명분있게 사건을 처리한 공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 솔내영환 - 현명하신 처신이었습니다. ▣ 김주회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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