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유고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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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3-06-07 18:24 조회1,604회 댓글0건본문
서문
이 책은 나의 족선조 기산 김공 휘 석유의 시문집이다
공은 실로 오문의 장덕이요 향도의 망사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저술과 선정유촉에 문필의 기록을 남겼으나 사림에서 공을 칭송한 만제장갈의 유사는 찾을 수 없다
세대는 멀어지고 전란이 거듭됨에 영성주예의 전전이거로 당시 제제고사간에 일행기선의 글이 산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후학의 장연한 감회 금할길 없다
하례은례(夏禮殷禮)를 오능언지(吾能言之)나 기송(杞宋)은 불가징(不可徵)이라 하고 공자께서 한탄하심은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보첩을 상고하면 참판 이돈우 도사 김도화 선생의 광기와 행장이 있다고 하였으나 천운의 순환으로 후일을 기대 하면서 이제 상전구비와 정사초록의 유고를 참고로 아래와 같이 개략을 서술한다
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조 훈업상신 충렬공 휘 방경은 중시조요 조선조 연산당시의 고사 송은 광수선생은 현조이시며 동방부자로 존앙받는 퇴도고제 만취당 사원선생은 구대조이시다
1805년 순조 을축에 삼구단 양0공의 여섯아들중 다섯째로 태어나시니 품성이 총유 하시고 기지가 헌앙하였다
일찍이 유학을 세업으로 삼던 가정에서 승발유염으로 초학을 익히고 성장하여서는 성망 높은 선비 신암이동하 공의 사위가 되셨다
그로부터 외0의 보익으로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한결 정진하여 대의를 효해하고 과업에 일일면진하였으며 늦게는 정재 유치명선생의 강석에 나아가 더욱 심잠하여 유망이 향방에 울연하였다
장년시절 친명으로 장옥에 출입하였으나 청운입신의 이치를 깨닫고 임하에서 정양하였다
5책5권 유고의 심대한 저서중에는 약간의 시편이 있으나
이는 병인양요의 프랑스군함이 양화진을 점령하고 강화에 들어올때 판서 이시원의사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자 간절한 서문과 함께 차운 하였으니
팔월강성정기공 천왕파랑육침중 연상의리정마구 생사증안정비흉 이라고 읊었다
대개 보국교화와 관련된 사십여편의 시가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시장에 힘쓰지 않고 경학과 이학에 전심 하였음을 알수 있다
1855년 철종을묘에는 영남유생 이0병공 등이 중심이 되어 장헌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의 사초가
공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산이상정 선생의 청향소와 칠조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것이 일권이다
2,3,4 권은 모두가 서편으로 외0인 신암공과 기수 정민병공을 비롯해서 류숙후 치후 이신암만0 , 이도정 0령, 이승지 건수공 등 영하명유와 경서를 강론한 서찰이 수백편이다
문친간에는 율원 양휴공에게 질의하고 기계 노선공과 학문으로 깊이 상교하였다
5권은 제문과 약간의 서 기가 있으며 잡저로 칠실대언이 있다
통문편을 살펴보면 안동향교 통도내문을 비롯해서 노강 임천서원통문 갈암선생 분황통문 등이 공의 수중에서 제통되었으니 그 문장의 깊이는 미루어 가히 알수 있다 이렇게 정리된 유고는 등수의 절차를 밟아 대가의 교정과 서문으로 이루어져야 하거늘 그렇지 못한 점 한스럽다
세월을 거슬러 공의 영손 자은 봉종공이 선고간역에 일진 하였으나 유의미수로 몰세하셨다
이제 임오세말의 모일 자은공의 후학수계취회 당시 여자를 수검해서 기산고를 영인 제작하기로 취의 하였다
계중장로분들이 소자에게 머릿글을 쓰라고 청촉하는지라 생각하면 두려울 따름이다
학문과 덕행이 세인의 사표가 되고 고결한 정신은 당세와 후세에 교화의 영향을 끼쳤으나
초옥에서 잠해로 정양한 선인의 권두에 어찌 단문을 붙이리요마는
다만 후일 상고의 자료에 공하기 위해 잠망을 무릎쓰고 전말을 밝혀 삼가 서문을 대신 한다
2002년 임오 계동 상현 족후손 창회근서
*오탈자 한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kjj
▣ 김항용 -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평의공파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자은유고, 만사문집, 기산유고, ----- 계속 이어지는 사촌문중의 유고문집 발간!!! 축하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 김태서 -
▣ 김윤만 - 문집 발간을 축하드리고 서문 소개 감사드립니다.
▣ 솔내영환 -
이 책은 나의 족선조 기산 김공 휘 석유의 시문집이다
공은 실로 오문의 장덕이요 향도의 망사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저술과 선정유촉에 문필의 기록을 남겼으나 사림에서 공을 칭송한 만제장갈의 유사는 찾을 수 없다
세대는 멀어지고 전란이 거듭됨에 영성주예의 전전이거로 당시 제제고사간에 일행기선의 글이 산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후학의 장연한 감회 금할길 없다
하례은례(夏禮殷禮)를 오능언지(吾能言之)나 기송(杞宋)은 불가징(不可徵)이라 하고 공자께서 한탄하심은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보첩을 상고하면 참판 이돈우 도사 김도화 선생의 광기와 행장이 있다고 하였으나 천운의 순환으로 후일을 기대 하면서 이제 상전구비와 정사초록의 유고를 참고로 아래와 같이 개략을 서술한다
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조 훈업상신 충렬공 휘 방경은 중시조요 조선조 연산당시의 고사 송은 광수선생은 현조이시며 동방부자로 존앙받는 퇴도고제 만취당 사원선생은 구대조이시다
1805년 순조 을축에 삼구단 양0공의 여섯아들중 다섯째로 태어나시니 품성이 총유 하시고 기지가 헌앙하였다
일찍이 유학을 세업으로 삼던 가정에서 승발유염으로 초학을 익히고 성장하여서는 성망 높은 선비 신암이동하 공의 사위가 되셨다
그로부터 외0의 보익으로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한결 정진하여 대의를 효해하고 과업에 일일면진하였으며 늦게는 정재 유치명선생의 강석에 나아가 더욱 심잠하여 유망이 향방에 울연하였다
장년시절 친명으로 장옥에 출입하였으나 청운입신의 이치를 깨닫고 임하에서 정양하였다
5책5권 유고의 심대한 저서중에는 약간의 시편이 있으나
이는 병인양요의 프랑스군함이 양화진을 점령하고 강화에 들어올때 판서 이시원의사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자 간절한 서문과 함께 차운 하였으니
팔월강성정기공 천왕파랑육침중 연상의리정마구 생사증안정비흉 이라고 읊었다
대개 보국교화와 관련된 사십여편의 시가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시장에 힘쓰지 않고 경학과 이학에 전심 하였음을 알수 있다
1855년 철종을묘에는 영남유생 이0병공 등이 중심이 되어 장헌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의 사초가
공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산이상정 선생의 청향소와 칠조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것이 일권이다
2,3,4 권은 모두가 서편으로 외0인 신암공과 기수 정민병공을 비롯해서 류숙후 치후 이신암만0 , 이도정 0령, 이승지 건수공 등 영하명유와 경서를 강론한 서찰이 수백편이다
문친간에는 율원 양휴공에게 질의하고 기계 노선공과 학문으로 깊이 상교하였다
5권은 제문과 약간의 서 기가 있으며 잡저로 칠실대언이 있다
통문편을 살펴보면 안동향교 통도내문을 비롯해서 노강 임천서원통문 갈암선생 분황통문 등이 공의 수중에서 제통되었으니 그 문장의 깊이는 미루어 가히 알수 있다 이렇게 정리된 유고는 등수의 절차를 밟아 대가의 교정과 서문으로 이루어져야 하거늘 그렇지 못한 점 한스럽다
세월을 거슬러 공의 영손 자은 봉종공이 선고간역에 일진 하였으나 유의미수로 몰세하셨다
이제 임오세말의 모일 자은공의 후학수계취회 당시 여자를 수검해서 기산고를 영인 제작하기로 취의 하였다
계중장로분들이 소자에게 머릿글을 쓰라고 청촉하는지라 생각하면 두려울 따름이다
학문과 덕행이 세인의 사표가 되고 고결한 정신은 당세와 후세에 교화의 영향을 끼쳤으나
초옥에서 잠해로 정양한 선인의 권두에 어찌 단문을 붙이리요마는
다만 후일 상고의 자료에 공하기 위해 잠망을 무릎쓰고 전말을 밝혀 삼가 서문을 대신 한다
2002년 임오 계동 상현 족후손 창회근서
*오탈자 한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kjj
▣ 김항용 -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평의공파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자은유고, 만사문집, 기산유고, ----- 계속 이어지는 사촌문중의 유고문집 발간!!! 축하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 김태서 -
▣ 김윤만 - 문집 발간을 축하드리고 서문 소개 감사드립니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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