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12)-金悌甲편(역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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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06-12 00:54 조회1,515회 댓글0건본문
나이 19세에 백형 구암공(伯兄 龜巖公)을 따라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이선생(退溪李先生)을 뵈옵고 드디어 사사(師事)했다. 21세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어 괴원(槐院)의 예에 따라 박사전적(博士典籍)으로 승진했다. 임술년(壬戌年)에 봉양(奉養)하기 위해 빌어서 옥천군수(沃川郡守)를 보직(補職)받는다. 개성경력(開城經歷)을 지내시고 을축년(乙丑年)에 군기시첨정사재감부정 사도시장락원정(軍器寺僉正 司宰監副正 司導寺 掌樂院正)을 지내셨다.
병인년(丙寅年)에 선위왜사(宣慰倭使)로 부산에 갔다온 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제수받고, 정묘년(丁卯年)에 남양부사(南陽府使)로 가시었다. 이해에 마침 대흉년(大凶年)을 당하였는데 모부인(母夫人)이 친목(親睦)에 진력(盡力)하니 종당(宗黨)이 누구든지 귀앙(歸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께서는 친의(親意)를 이어 순종(順從)하더니 일반이 다 구제(救濟)를 입었다. 당시 대사헌 김덕용(大司憲 金德龍)이 대궐안 각반에서 말하기를, "효도여 김모로다. 사람이 부모가 없으리오마는 뜻을 이어받아 효성을 다해 봉양하니(色養) 이와 동등한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하니라.
임기를 채우고 들어와 종부사정 사헌부지평(宗簿司正 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전적직강사성군기사사 정사간원정언사온서령승문원판교(成均館典籍直講司成軍器寺寺 正司諫院正言司 署令承文院判校)을 지냈다. 무인년(戊寅年) 가을에 당상(堂上)에 진급(進級)하여 첨추(僉樞)가 되어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燕京)을 가게 되었다. 전에 관압사(菅押使)가 공마(貢馬)가 많이 도로(道路)에 말러 병으로 죽어 양국에 견책(譴責)을 엄하게 당할 뿐 도사(道死)하는 자도 있어 사람이 다 가기를 꺼리었었다. 이 해에도 봉사자(奉使者)가 발행일(發行日)을 두고 홀연히 병보(病報)를 하여 당노자(當路者)가 공으로 대행케 하여 사람들이 공(公)을 위하여 근심하되 공(公)은 의연(毅然)하게 아무 근심도 아니하고 요동(遼東)에 이르는데, 삼베로 물통을 만들어 친히 점검하여 공마를 멕여 50필이 다 무고히 황성에까지 들어갔다. 태복(太僕)이 칭찬을 별다르게 하면서 황제께 주달(奏達)하였었다. 황제가 특히 명하여 보시고 비단 4필 말 1필 상홀(象笏) 1척을 하사(下賜)하시었다.
<계속>
▣ 김재이 - 귀한자료 잘보았습니다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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