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무신정권(14)민란의 계속-경주(동경)민란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3-06-11 23:05 조회1,997회 댓글0건

본문

1190

경주 지방 민란



동경민란 東京民亂



1190년(고려 명종 20) 이후 약 15년 동안 동경(경주)을 비롯하여 운문(雲門) ·초전(草田) ·



진주(晉州) ·전주(全州) 등지에서 일어난 민란.





그 중에는 신라부흥을 내세운 복고적(復古的)인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무신집권(武臣執權)에 의한



중앙정부의 부패와 지방관리들의 탐학(貪虐)이 심하여 민생고에 견디다 못해 폭발한 농민들의 반란이다.



1190년 1월 제1차 반란이 일어났는데, 안찰부사(按察副使) 주유저(周惟免)는 반란군을 진압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반군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지자 조정에서는 남로착적사(南路捉賊使)를 파견하였다.



1193년에 운문(慶北 淸道)에서 김사미(金沙彌)가, 초전(울산)에서는 효심(孝心) 등이 제2차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과 이지순(李至純) ·이공순(李公純) ·김척후(金陟侯)로



하여금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지순이 반군과 내통하여 관군이 자주 패하였으며, 전존걸은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인 이지순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을 분하게 여겨 자살하였다. 조정에서는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대장군 고용지(高勇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삼아 난을



평정하고 김사미 ·효심 등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잔적(殘賊)의 끈질긴 반항으로 오래 계속되어, 1199년(신종 2)에 일어난 명주(溟州)의



적군(賊軍)과 김사미의 잔당이 합세함으로써 토벌작전은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그 후에도 1200년



밀성(密城) 관노(官奴)의 난, 동경 이의민의 족당(族黨)과 주리(州吏) 사이의 충돌, 또 금주(金州:金海)



잡족(雜族)의 난, 1202년 탐라 반란사건, 동경 별초군(別抄軍)의 난 등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진주민란과 동경 중심의 민란이 가장 대규모적인 것이었는데, 동경민란 중에서는



이비(利備)를 두목으로 한 일당과 패좌(雅佐)를 두목으로 한 일당 등이 가장 완강하였다. 이들은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삼아 민심을 선동하였고,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은 연이은 반란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토벌군을 동원하였다.



대장군 김척후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 대장군 최광의(崔匡義)를 좌도사(左道使),



강순의(康純義)를 우도사(右道使)로 삼아 반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군의 세력을 두려워한



김척후가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아 반군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김척후 대신



정언진(丁彦眞)을 새로 중도사에 임명하였다. 정언진은 성황사(城隍祠)에서 기도 중이던 이비를



체포하고, 또한 그의 부하 함연수(咸延壽)에게 패좌를 포살(捕殺)하게 함으로써 장기간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 1204년 조정에서는 동경을 경주로, 유수를 지사(知事)로 격하하였으며, 반군 토벌에



공을 세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경상도를 상진안동도



(尙晉安東道)로 개칭하였다. 1233년(고종 20) 몽골의 침입으로 국정이 소란해지자 최산(崔山) ·



이유(李儒) 등이 또 난을 일으켰으나 상장군 이자성(李子晟) 등이 이를 평정(平定)하였다.















▣ 김항용 -

▣ 김재이 - 귀한

▣ 김태서 -

▣ 김주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