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묘,서원,유허비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6-14 19:58 조회1,719회 댓글0건본문
1 시도유형문화재 49 (부산) ■포은시고(圃隱詩藁) 부산 부산진구 부산광역시
2 시도기념물 1 (경기) ■정몽주선생묘(鄭夢周先生墓) 경기 용인시 정재화
7 시도유형문화재 9 (경기) ■충렬서원(忠烈書院) <본문정보> 경기 용인시 정덕화
19 시도유형문화재 272 (경북) ■포은정몽주유허비(圃隱鄭夢周遺墟碑) <본문정보> 경북 영천시 임고서원
25 시도기념물 62 (경북) ■임고서원(臨皐書院) <본문정보> 경북 영천시 임고서원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49호
명 칭 ■포은시고 (圃隱詩藁)
분 류 목판본류
수 량 2권1책
지정일 2002.05.06
소재지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 산51-1 부산시립시민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초기
소유자 부산광역시
관리자 부산광역시
이 책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시집으로, 포은 선생의 아들 정종성이 숙부인 정도가 초록한 『사일본영시(使日本詠詩』, 함전림이 집록한 『봉사명조행록(奉使明朝行錄)』과 그 외 여러 곳에서 모은 부친의 시를 더 추가하여 세종 21년(1439)에 개판한 초간본의 후쇄본이다.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에 소장 중인 『포은시고』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후쇄본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판본이 확실하며, 현재까지 이와 동일 판본으로 보이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정도의 귀중본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책이다.
종 목 시도기념물 1호
명 칭 ■정몽주선생묘 (鄭夢周先生墓)
분 류 묘
수 량 1기
지정일 1972.05.04
소재지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산3
소유자 사유
관리자 정재화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예부정랑, 대사성 등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일본에 가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쓰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문화재명 ★정몽주선생묘(鄭夢周先生墓)
이곳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이며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시조로 추앙되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선생(先生)의 묘소(墓所)이다. 선생의 자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本貫)은 연일(延日)로 정관(鄭瓘)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9년(1360) 과거에 장원급제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예부정랑(禮部正郎), 대사성(大司成), 문하찬성(門下贊成) 등 여러 벼슬에 올랐다. 5부학당(五部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으며, 향교(鄕校)를 세워 유학(儒學)을 진흥하고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세웠으며, 한편으로는 일본(日本)에 가서 왜구(倭寇)를 금지(禁止)할 것을 교섭하는 등 외교활동도 하였다.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날로 커져 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왕(王)으로 추대하려 하자 끝까지 고려왕실(高麗王室)을 지키려 하다가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殉節)하신 뒤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인 경북(慶北) 영천(永川)으로 천묘할 때 면례행렬(緬禮行列)이 용인군(龍仁郡) 수지면(水持面) 경계에 이르자 앞에 세웠던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아가 이곳 현 묘소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나라를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은 지금도 생생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된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9호
명 칭 ■충렬서원 (忠烈書院)
분 류 서원(부동산)
수 량 1동
지정일 1972.05.04
소재지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118
소유자 사유
관리자 정덕화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인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져 선조 38년(1605)에 다시 지었다. 이때 정보와 이시직을 같이 모셨다. 광해군 원년(1608)에 임금이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여(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선현배향과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으나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1924년에 복원하였다.
마을 뒤쪽의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재실이나 장경각·교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에 서원이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 준다. 강당도 교육공간보다는 제향 때 모임 장소로 쓰였다.
전하는 유물로 『유한집』과 『단심가』등을 서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서원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문화재명 충렬서원(忠烈書院)
이 서원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이며 동방성리학(東方性理學)의 시조로 추앙되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선생의 덕망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선조(宣祖) 9년(1576)에 건립되어 광해군(光海君) 원년(元年)(1609)에 사액(賜額)되었으나 대원군(大院君)의 서원(書院) 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24년에 복원하였다. ★정몽주의 초명은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공민왕(恭愍王) 9년(1360) 삼장(三場)에 연달아 장원(壯元)하여 대사성(大司成), 대제학(大提學), 문하찬성(門下贊成) 등을 역임하면서 성리학에 밝아 오부학당(五部學堂),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켰으며 고려(高麗)를 끝까지 섬기다가 이방원(李芳遠) 등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1401)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고 중종(中宗)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서원내에는 포은선생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비롯하여 선생의 손자인 운곡(雲谷) 정보(鄭保)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순절(殉節)한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 등 충신열사(忠臣烈士)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고 포은의 『유한집(遺翰集)』, 단심가(丹心歌) 등이 보존되어 있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272호
명 칭 ■포은정몽주유허비 (圃隱鄭夢周遺墟碑)
분 류 석비
수 량 1기
지정일 1992.07.18
소재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044-5
소유자 임고서원
관리자 임고서원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다. 공민왕 5년(1355) 부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서 3년상을 치르고, 그후 공민왕 14년(1365) 모친상까지 당하여 역시 3년상을 지내였다. 이토록 지극하였던 그의 효성이 조정에 보고 되자, 출생지인 이곳 우항리 마을에 비를 세워두도록 하였다.
비는 반듯하고 널찍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앞면에는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의 ‘효자리(孝子里)’라는 글귀를 세로로 큼직하게 새겼다. 공양왕 원년(1389)에 세운 것으로, 그후 잃어버렸던 것을 조선 성종 18년(1487) 땅속에서 찾아내어 비각을 세워 모시고 있다.
문화재명 포은★정몽주유허비(圃隱鄭夢周遺墟碑)
이 비는 고려시대의 문신(文臣)이며 학자(學者)이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 선생의 출생지(出生地)에 세운 유허비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1355) 부친(父親)의 상(喪)을 당하여 묘소(墓所)에서 3년상을 지내고 그 후 1365년 11월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역시 묘소에서 3년을 지냈다.
그의 지극한 효성(孝誠)이 조정(朝廷)에 보고되어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1389) 그의 출생지(出生地)인 우항리(愚巷里)에 "효자리"(孝子里)라 새긴 비가 영천군수(永川郡守) 정유(鄭宥)에 의해 세워졌다.
그 후 조선(朝鮮) 성종(成宗) 18년(1487) 경상감사(慶尙監司) 손순효(孫舜孝)의 현몽(現夢)에 의하여 잃었던 비를 땅속에서 찾아내어 다시 세우고 비각(碑閣)도 함께 건립하였다.
종 목 시도기념물 62호
명 칭 ■임고서원 (臨皐書院)
분 류 서원(부동산)
수 량 9,299㎡
지정일 1985.10.15
소재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외 21필
소유자 임고서원
관리자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문화재명 임고서원(臨皐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은 고려말(高麗末)의 충신(忠臣)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명종(明宗) 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創建)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되어 선조(宣祖) 36년(1603)에 중건(重建), 사액(賜額)되었다. 인조(仁祖) 21년(1643)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先生)을 배향(配享)하고 영조(英祖) 3년(172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 선생(先生)을 추향(追享)하였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되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先生)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년(1337) 현 임고면(臨皐面) 우항동(愚巷洞)에서 일성군(日城君) 운관(云瓘)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恭愍王) 9년(1360)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예문검열(藝文檢閱)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전법(典法)·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功)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地方官)의 비행(非行)을 근절(根絶)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貧民)을 구제(救濟)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推仰)되었고 시문(詩文),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삼은(高麗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恭讓王) 4년(1392) 이방원(李芳遠)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140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 김항용 -
▣ 김태서 - 잘 보았습니다.
▣ 솔내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