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선조님 묘소 참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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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3-06-15 00:41 조회1,504회 댓글0건본문
지난주 토요일 포천 금수정과 척약제 선조님을 뵙고 오며 이번 주엔 목왕리에 영면해 계신 익원공 선조님의 묘소에 참배를 가야겠다 계획했습니다.
익원공 선조님 묘소는 작년시제에 참여하려 했으나 군사공파 화성문중 시제와 병천시제가 겹쳐 참석치못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지근에 두고도 참배하지 못하니 검단산에 올라 양평쪽을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영 개운치 못하던 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날씨가 영 꾸물꾸물하니 비가 올 듯합니다. 다음으로 미룰까 생각하다 그래도 하나 믿는 것(?)이 있습니다.
양수리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목왕리 신도비 앞에 도착하니 이내 빗방울이 굵어지며 차에서 내릴 수없을 지경입니다.
익원공파 소개란에 묘소가 신도비에서 800m 거리에 있다고 했는데 800m는커녕 이 비에는 10m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묘소의 위치를 모르고 있거든요.
태서님께 도움을 청하니 신도비 우측의 평산신씨 재실을 끼고 우회전하면 익원공파 재실까지는 차로 올라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재실이라도 둘러보고 돌아 갈 요량으로 재실앞에 도착하여 차 안에서 재실을 올려보는데 이런 언제 왔냐는 듯이 비가 딱 멎었습니다. 믿는 것이 이것이었거든요.
바람도 살살부니 산에 오르기 더 없이 좋은 날씨입니다. 풀이젖어 축축하긴해도 아침에 신고온 등산화가 한 몫을합니다.
익원공 선조님의 아드님이신 휘 승 선조님 설단에 도착 좌측산을 올려보니 산 꼭대기에 문인석 하나가 살짝보입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여기가 바로 조선개국1등공신, 상락부원군 익원공 휘 사형 선조님 묘소입니다.
배례한 후 묘소앞에서 대마도를 정벌하시던 선조님의 기개와 혼일강일도를 제작하시던 그 섬세함을 잠시 생각합니다.
묘소 봉분의 산소는 잔디가 얼마나 잘 자랐는지 잡초 한포기가 없습니다. 씨앗을 매달고 있는 잔디를 보고 있으니 여느 꽃보다 그 아름다움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습니다.
잔디 씨앗을 한 웅큼 훌터 상수리 잎새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는 산을 내려 왔습니다.
물론 내려오는 길에 밀직사사공 선조님께도 참배를 하였습니다.
다음엔 아들놈과 아내와 함께 점심을 싸서 소풍을 올 생각입니다.
익원공 김사형선조님의 묘소는 2001년 6월에 경기도 문화재 107호로 지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로의 안내 표지판, 문화재 지정석, 문화재 소개 안내판이 하나도 설치 된 것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양평군 문화재관리과에 질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도로표지 하나 있어야 되는것 아닌가요?

양평군 서종면 목왕리 소재.....익원공 신도비

익원공 재실...낙포재





익원공 선조님 묘역 가는 길

익원공 휘 사형 묘소 전경


밀직사사공 휘 승 묘소 전경(익원공 둘째아들)


익원공 선조님 묘역 주변에 피어있는 뱀딸기와 꽃을 접사로 잡아보았습니다.



익원공 김사형 선조님 묘소 가는 길은 역사 학습관입니다.
서울이나 경기일원에 사시는 종친께서는 가족과 함께 다녀오시면 좋을 듯합니다.
다들 아시는 길이지만 도움이 될까하여 소개합니다.
서울에서 올림픽도로를 타고 미사리 까페촌을 지나 팔당대교를 건너 양수리로 갑니다.

위 이정표에서 서종.목왕리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2.5km를 진행하면 아래와 같은 표시가 보입니다.

정창손 신도비

전창손 묘역


정창손 [鄭昌孫, 1402 ~ 148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 동래(東萊)
별칭 : 자 효중(孝中), 시호 충정(忠貞)
활동분야 : 정치
본관 동래(東萊). 자 효중(孝中). 시호 충정(忠貞).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되었다. 1444년 응교(應敎) 때 한글제정을 반대하여 파직,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응교에 복직, 1446년 집의(執義) 때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하여 재차 파직되었다. 다음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1449년 춘추관편수관(編修官) ·수사관(修史官)을 겸직,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우찬성(右贊成)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봉원군(蓬原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부원군에 진봉(進封)되어 우의정에 오르고 1457년 영의정이 되었다. 1462년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도록 상소하여 삭직되나, 용서받고 부원군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1469년 원상(院相),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된 뒤 1485년 사직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伸寃)되었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정창손묘역 석물 [鄭昌孫墓域石物]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물.
지정번호 : 경기문화재자료 제85호
지정연도 : 1994년 4월 20일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묘
1994년 4월 20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정씨 충정공파종중에서 소유, 관리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창손은 1426년(세종 8) 식년문과,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을 편찬하였다. 1455년(세조 1)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된 뒤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1468년(예종 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책록되었으며, 1475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정창손의 묘역은 원래 광주 방이동에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폐비윤씨(廢妃尹氏) 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고 신도비(神道碑)와 석물이 파손되었다. 1506년(중종 1)에 신원(伸寃)되어 묘역을 개장(改葬)하고 석물을 다시 세웠으며, 1623년(인조 1)에는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정창손과 부인의 묘역은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방이동의 도시계획으로 종중에서는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면서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 제작한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석물은 묘비 2기, 문인석 2쌍, 신도비 1기, 석양 1기가 남아 있으나 이전작업으로 묘역의 모습이 심하게 변하였다.
정창손의 묘비는 직사각형으로 윗부분의 양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1506년에 세워졌다. 부인의 묘비는 머릿돌이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화관석(花冠石) 형태로 1456년(세조 2)∼1486년(성종 17)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문인석 2쌍은 조선 전기 양식으로 관을 쓰고 관복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홀(忽)을 잡고 있다. 신도비는 받침돌 위에 윗변의 양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의 비신(碑身)을 세운 형태이다. 원래의 신도비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어서 1488년에 건립하였으나 1504년에 파손되어 한준겸(韓浚謙)이 서거정의 비문에다 글을 덧붙여 비문을 써서 1623년에 다시 세웠다. 그밖에 양의 모습으로 새긴 돌조각으로 석양이 있다.
다시 700m정도 진행하면 나타나는 표지입니다.

이준경 신도비

이준경 묘역


이준경 [李浚慶, 1499 ~ 157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廣州)
호 : 동고(東皐) ·남당(南堂) ·양와(養窩) ·홍련거사(紅蓮居士)
별칭 : 자 원길(原吉) 시호 충정(忠正)
주요저서 : 《동고유고(東皐遺稿)》
본관 광주(廣州). 자 원길(原吉). 호 동고(東皐) ·남당(南堂) ·양와(養窩) ·홍련거사(紅蓮居士). 시호 충정(忠正). 1522년(중종 17)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533년 사경(司經) 때 김안로(金安老)와의 불화로 파직되고, 1537년 김안로가 처형된 후 재기용되었다. 이어 응교(應敎) ·보덕(輔德) ·승지(承旨)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543년 문신정시에 장원, 한성부우윤에 오르고 대사성을 지냈다.
1544년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이 되었고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1548년 병조판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1550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으로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으로 귀양갔으나 이듬해 풀려나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순변사, 1555년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침입한 왜적을 격퇴,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다.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을 예언한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려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동고유고(東皐遺稿)》 《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이준경선생묘 [李浚慶先生墓]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있는 이준경(1499∼1572)의 무덤.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96호
지정연도 : 1987년 2월 12일
소장 : 광주이씨 종친회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5-1번지
시대 : 조선 중기
크기 : 1기
분류 : 묘
1987년 2월 12일 경기도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은 부인과의 어울무덤[合葬墓]으로 단분이다. 장대석으로 봉분에 호석(護石)을 둘렀고,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다. 상석 사방에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1585년(선조 18) 노수신(盧守愼)이 찬(撰)하여 건립한 묘비는 마모가 심하여 수원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하였고 현재는 비문을 그대로 옮겨 놓아 근래에 세운 것이다.
이준경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할아버지, 아버지가 연루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유배생활을 하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도 영의정까지 올랐고 억울한 인재들에게 등용의 기회를 주는 등 국정을 위해 힘썼다.
다시 1km정도 진행면 보이는 한음 이덕형 신도비각과 삼거리


삼거리에서 좌측길로 진행하면

한음 이덕형 불망비

한음 이덕형 영정각


한음 영정

이덕형 묘소

이덕형 [李德馨, 1561 ~ 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
호 : 한음 ·쌍송 ·포옹산인, 시호 문익
별칭 : 자 명보
활동분야 : 정치
주요작품 : 《한음문고》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했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양근(楊根)에서 죽었다.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한음이덕형선생묘 및 신도비 [漢陰李德馨先生墓-神道碑]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와 신도비.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89호
지정연도 : 1985년 9월 20일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묘
1985년 9월 20일 경기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이씨 의정공파 종중이 소유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덕형의 묘와 신도비로, 청계산(淸溪山) 서쪽 형제봉(兄弟峯) 줄기에 있다.
묘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 1기(基), 상석(床石)이 있으며 그 앞에 가로로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쌓았다. 단 아래 좌우에는 동자석(童子石)이 있고 그 앞에 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이 좌우로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의 크기는 높이 155㎝, 너비 60㎝, 두께 20㎝이다.
신도비는 1653년(효종 4)에 세웠으며 묘역 아래 약 300m 지점에 있다.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 비좌(碑座)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크기는 높이 360㎝, 너비 110㎝, 두께 42㎝이고 근래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撰)하였으며,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을 썼다.
다시 2.5km정도 진행하면 우측에 익원공신도비가있습니다.

신도비에서 우측 2시방향을 보면 평산신씨 신도비 및 재실이보입니다.

신도비에서 전방으로 30~40m 진행후 우회전하여 평산신씨 재실을 우로끼고 올라가면 익원공파재실인 낙포재에 도착합니다.

우측으로보이는 낙랑장송이 많이 보이는 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익원공 휘 사형선조님 묘역입니다.


즐겁고 보람찬 참배길 되시길.......
▣ 김태서 - 익원공할아버지 묘소가 한층 푸르러 보입니다. 매번 직접 발로 뛰어 좋은 영상을 올리시니 편히 잘 보고있습니다.귀한 발걸음 해주시여 익원공 후손으로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김항용 - 작년 3월1일 행사가 생각납니다. 성능 좋은 디지털 카메라 사진이 아주 좋습니다. 홈 여러 곳의 관련 사진을 이것으로 교체하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하이마트에 가서 쏘니 DSC P8 제품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캐너(HP 제품)도 샀습니다. 많은 디지털 정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 김영윤 - 기억이 새롭습니다 실물을 보는듯한 선명한 사진을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김정중 - 大作 감사! 감사!!
▣ 김주회 - 와-- 대단합니다. 대작을 만드셨습니다. 지난해에 다녀온 양평 9정승골을 다시 다녀온 기분입니다. 더욱 더 선명하고 시원하게. 발용 종친님의 부지런한 발걸음과 대작 소개!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수고가 크셨겠으나 즐거웠겠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사진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즐겨운 순례 되시었습니다.
익원공 선조님 묘소는 작년시제에 참여하려 했으나 군사공파 화성문중 시제와 병천시제가 겹쳐 참석치못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지근에 두고도 참배하지 못하니 검단산에 올라 양평쪽을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영 개운치 못하던 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날씨가 영 꾸물꾸물하니 비가 올 듯합니다. 다음으로 미룰까 생각하다 그래도 하나 믿는 것(?)이 있습니다.
양수리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목왕리 신도비 앞에 도착하니 이내 빗방울이 굵어지며 차에서 내릴 수없을 지경입니다.
익원공파 소개란에 묘소가 신도비에서 800m 거리에 있다고 했는데 800m는커녕 이 비에는 10m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묘소의 위치를 모르고 있거든요.
태서님께 도움을 청하니 신도비 우측의 평산신씨 재실을 끼고 우회전하면 익원공파 재실까지는 차로 올라 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재실이라도 둘러보고 돌아 갈 요량으로 재실앞에 도착하여 차 안에서 재실을 올려보는데 이런 언제 왔냐는 듯이 비가 딱 멎었습니다. 믿는 것이 이것이었거든요.
바람도 살살부니 산에 오르기 더 없이 좋은 날씨입니다. 풀이젖어 축축하긴해도 아침에 신고온 등산화가 한 몫을합니다.
익원공 선조님의 아드님이신 휘 승 선조님 설단에 도착 좌측산을 올려보니 산 꼭대기에 문인석 하나가 살짝보입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여기가 바로 조선개국1등공신, 상락부원군 익원공 휘 사형 선조님 묘소입니다.
배례한 후 묘소앞에서 대마도를 정벌하시던 선조님의 기개와 혼일강일도를 제작하시던 그 섬세함을 잠시 생각합니다.
묘소 봉분의 산소는 잔디가 얼마나 잘 자랐는지 잡초 한포기가 없습니다. 씨앗을 매달고 있는 잔디를 보고 있으니 여느 꽃보다 그 아름다움이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습니다.
잔디 씨앗을 한 웅큼 훌터 상수리 잎새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는 산을 내려 왔습니다.
물론 내려오는 길에 밀직사사공 선조님께도 참배를 하였습니다.
다음엔 아들놈과 아내와 함께 점심을 싸서 소풍을 올 생각입니다.
익원공 김사형선조님의 묘소는 2001년 6월에 경기도 문화재 107호로 지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로의 안내 표지판, 문화재 지정석, 문화재 소개 안내판이 하나도 설치 된 것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양평군 문화재관리과에 질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도로표지 하나 있어야 되는것 아닌가요?

양평군 서종면 목왕리 소재.....익원공 신도비

익원공 재실...낙포재





익원공 선조님 묘역 가는 길

익원공 휘 사형 묘소 전경


밀직사사공 휘 승 묘소 전경(익원공 둘째아들)


익원공 선조님 묘역 주변에 피어있는 뱀딸기와 꽃을 접사로 잡아보았습니다.



익원공 김사형 선조님 묘소 가는 길은 역사 학습관입니다.
서울이나 경기일원에 사시는 종친께서는 가족과 함께 다녀오시면 좋을 듯합니다.
다들 아시는 길이지만 도움이 될까하여 소개합니다.
서울에서 올림픽도로를 타고 미사리 까페촌을 지나 팔당대교를 건너 양수리로 갑니다.

위 이정표에서 서종.목왕리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2.5km를 진행하면 아래와 같은 표시가 보입니다.

정창손 신도비

전창손 묘역


정창손 [鄭昌孫, 1402 ~ 148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 동래(東萊)
별칭 : 자 효중(孝中), 시호 충정(忠貞)
활동분야 : 정치
본관 동래(東萊). 자 효중(孝中). 시호 충정(忠貞). 1423년(세종 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1441년 사섬서령(司贍署令)으로 전임되었다. 1444년 응교(應敎) 때 한글제정을 반대하여 파직,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응교에 복직, 1446년 집의(執義) 때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하여 재차 파직되었다. 다음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1449년 춘추관편수관(編修官) ·수사관(修史官)을 겸직, 《고려사》 《세종실록》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지내고,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다.
1455년(세조 1) 우찬성(右贊成)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봉원군(蓬原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단종 복위 음모를 고변한 공으로 부원군에 진봉(進封)되어 우의정에 오르고 1457년 영의정이 되었다. 1462년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도록 상소하여 삭직되나, 용서받고 부원군에 복작(復爵)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 ·강순(康純)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1469년 원상(院相),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된 뒤 1485년 사직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중종 때 신원(伸寃)되었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정창손묘역 석물 [鄭昌孫墓域石物]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물.
지정번호 : 경기문화재자료 제85호
지정연도 : 1994년 4월 20일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7-1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묘
1994년 4월 20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정씨 충정공파종중에서 소유, 관리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창손은 1426년(세종 8) 식년문과,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을 편찬하였다. 1455년(세조 1)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된 뒤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1468년(예종 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책록되었으며, 1475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정창손의 묘역은 원래 광주 방이동에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폐비윤씨(廢妃尹氏) 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고 신도비(神道碑)와 석물이 파손되었다. 1506년(중종 1)에 신원(伸寃)되어 묘역을 개장(改葬)하고 석물을 다시 세웠으며, 1623년(인조 1)에는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정창손과 부인의 묘역은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방이동의 도시계획으로 종중에서는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면서 하나의 봉분으로 합장하고 이전의 석물과 새로 제작한 석물을 함께 배치하였다. 석물은 묘비 2기, 문인석 2쌍, 신도비 1기, 석양 1기가 남아 있으나 이전작업으로 묘역의 모습이 심하게 변하였다.
정창손의 묘비는 직사각형으로 윗부분의 양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1506년에 세워졌다. 부인의 묘비는 머릿돌이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화관석(花冠石) 형태로 1456년(세조 2)∼1486년(성종 17)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문인석 2쌍은 조선 전기 양식으로 관을 쓰고 관복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홀(忽)을 잡고 있다. 신도비는 받침돌 위에 윗변의 양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의 비신(碑身)을 세운 형태이다. 원래의 신도비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어서 1488년에 건립하였으나 1504년에 파손되어 한준겸(韓浚謙)이 서거정의 비문에다 글을 덧붙여 비문을 써서 1623년에 다시 세웠다. 그밖에 양의 모습으로 새긴 돌조각으로 석양이 있다.
다시 700m정도 진행하면 나타나는 표지입니다.

이준경 신도비

이준경 묘역


이준경 [李浚慶, 1499 ~ 157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廣州)
호 : 동고(東皐) ·남당(南堂) ·양와(養窩) ·홍련거사(紅蓮居士)
별칭 : 자 원길(原吉) 시호 충정(忠正)
주요저서 : 《동고유고(東皐遺稿)》
본관 광주(廣州). 자 원길(原吉). 호 동고(東皐) ·남당(南堂) ·양와(養窩) ·홍련거사(紅蓮居士). 시호 충정(忠正). 1522년(중종 17)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533년 사경(司經) 때 김안로(金安老)와의 불화로 파직되고, 1537년 김안로가 처형된 후 재기용되었다. 이어 응교(應敎) ·보덕(輔德) ·승지(承旨)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543년 문신정시에 장원, 한성부우윤에 오르고 대사성을 지냈다.
1544년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이 되었고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1548년 병조판서 ·한성부판윤을 거쳐 1550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으로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으로 귀양갔으나 이듬해 풀려나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순변사, 1555년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침입한 왜적을 격퇴,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다.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을 예언한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려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동고유고(東皐遺稿)》 《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이준경선생묘 [李浚慶先生墓]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있는 이준경(1499∼1572)의 무덤.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96호
지정연도 : 1987년 2월 12일
소장 : 광주이씨 종친회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5-1번지
시대 : 조선 중기
크기 : 1기
분류 : 묘
1987년 2월 12일 경기도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은 부인과의 어울무덤[合葬墓]으로 단분이다. 장대석으로 봉분에 호석(護石)을 둘렀고,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다. 상석 사방에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1585년(선조 18) 노수신(盧守愼)이 찬(撰)하여 건립한 묘비는 마모가 심하여 수원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하였고 현재는 비문을 그대로 옮겨 놓아 근래에 세운 것이다.
이준경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할아버지, 아버지가 연루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유배생활을 하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도 영의정까지 올랐고 억울한 인재들에게 등용의 기회를 주는 등 국정을 위해 힘썼다.
다시 1km정도 진행면 보이는 한음 이덕형 신도비각과 삼거리


삼거리에서 좌측길로 진행하면

한음 이덕형 불망비

한음 이덕형 영정각


한음 영정

이덕형 묘소

이덕형 [李德馨, 1561 ~ 16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 광주
호 : 한음 ·쌍송 ·포옹산인, 시호 문익
별칭 : 자 명보
활동분야 : 정치
주요작품 : 《한음문고》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玄蘇)과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했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양근(楊根)에서 죽었다.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고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한음이덕형선생묘 및 신도비 [漢陰李德馨先生墓-神道碑]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와 신도비.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89호
지정연도 : 1985년 9월 20일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묘
1985년 9월 20일 경기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이씨 의정공파 종중이 소유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덕형의 묘와 신도비로, 청계산(淸溪山) 서쪽 형제봉(兄弟峯) 줄기에 있다.
묘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 1기(基), 상석(床石)이 있으며 그 앞에 가로로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쌓았다. 단 아래 좌우에는 동자석(童子石)이 있고 그 앞에 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이 좌우로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의 크기는 높이 155㎝, 너비 60㎝, 두께 20㎝이다.
신도비는 1653년(효종 4)에 세웠으며 묘역 아래 약 300m 지점에 있다.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 비좌(碑座)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크기는 높이 360㎝, 너비 110㎝, 두께 42㎝이고 근래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撰)하였으며,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을 썼다.
다시 2.5km정도 진행하면 우측에 익원공신도비가있습니다.

신도비에서 우측 2시방향을 보면 평산신씨 신도비 및 재실이보입니다.

신도비에서 전방으로 30~40m 진행후 우회전하여 평산신씨 재실을 우로끼고 올라가면 익원공파재실인 낙포재에 도착합니다.

우측으로보이는 낙랑장송이 많이 보이는 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익원공 휘 사형선조님 묘역입니다.


즐겁고 보람찬 참배길 되시길.......
▣ 김태서 - 익원공할아버지 묘소가 한층 푸르러 보입니다. 매번 직접 발로 뛰어 좋은 영상을 올리시니 편히 잘 보고있습니다.귀한 발걸음 해주시여 익원공 후손으로써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김항용 - 작년 3월1일 행사가 생각납니다. 성능 좋은 디지털 카메라 사진이 아주 좋습니다. 홈 여러 곳의 관련 사진을 이것으로 교체하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하이마트에 가서 쏘니 DSC P8 제품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캐너(HP 제품)도 샀습니다. 많은 디지털 정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 김영윤 - 기억이 새롭습니다 실물을 보는듯한 선명한 사진을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김정중 - 大作 감사! 감사!!
▣ 김주회 - 와-- 대단합니다. 대작을 만드셨습니다. 지난해에 다녀온 양평 9정승골을 다시 다녀온 기분입니다. 더욱 더 선명하고 시원하게. 발용 종친님의 부지런한 발걸음과 대작 소개!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수고가 크셨겠으나 즐거웠겠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사진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감사합니다. 즐겨운 순례 되시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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