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심하(深河)의 전쟁 김응하(金應河)

페이지 정보

김태서 작성일03-06-19 18:09 조회1,855회 댓글0건

본문

심하(深河)의 전쟁 기미년[광해군 11년 (1619)]ㆍ 김응하(金應河). (연려실기술 제21권)

○ 홍립이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하고, 중군(中軍)에 전 첨사오신남(吳信男)을, 종사관에는 군기부정(軍器副正) 정응정(鄭應井)ㆍ전 군수이정남(李挺男)을, 별장(別將)에는 숙천 부사(肅川府使)이인경(李寅卿)ㆍ절충(折衝)이국(李?)ㆍ창성 부사(昌城府使)박난영(朴蘭英)ㆍ 절충유태첨(柳泰瞻)ㆍ절충신홍수(申弘壽)를, 향도장(嚮導將)에는 아이만호(阿耳萬戶) 조영립(趙英立)을, 이상은 도원수 휘하에 속했다. 중군에는 우후(虞候)안여눌(安汝訥)을, 별장에는 절충김원복(金元福)ㆍ절충황덕창(黃德彰)ㆍ군관한응룡(韓應龍)ㆍ김흡을, 향도장에는 하서국(河瑞國)을, 이상은 부원수의 휘하에 속했다.중영장(中營將)에는 정주 목사(定州牧使)문희성(文希聖)을, 중군에는 강서 현령(江西縣令)황덕영(黃德?)을, 좌영장(左營將)에는 선천 군수(宣川郡守)김응하(金應河)를, 중군에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유길(李有吉)을, 우영장(右營將)에는 순천 군수이일원(李一元)을, 중군에는 운산 군수(雲山郡守)이계종(李繼宗)을, 연영장(連營將)에는 청성 첨사(淸城僉使)이찬(李?)을 임명했는데 이것을 10진영으로 나누었다. 《책중일록》

○ 유정은 양마전으로부터 관전으로 나아가고, 도사 교일기(喬一琦)는 우리나라 군사 만여 명을 독촉하여, 원수 강홍립ㆍ부원수 김경서ㆍ종사관 이민환ㆍ무장(武將)문희성ㆍ이일원ㆍ김응하 등을 거느리고 그 동쪽을 쳤다. 유정은 마가채 아귀를 지나 3백여 리나 깊숙히 들어가서 10여 채(寨)를 이겼으나, 4일에 적이 중국 군졸의 복장을 하고 유인하는 속임에 빠져서, 겹겹이 포위되어 군사가 드디어 무너지니, 유정과 유초손(劉招孫)ㆍ교일기가 모두 죽고, 우리 장수 김응하도 힘써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다.《충렬록(忠烈錄)》

○ 저 두 사람(강홍립ㆍ김경서)는, “임금의 밀지(密旨)가 있다.”고 일컫고 중국을 버리고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우리 예의의 나라를 금수의 나라로 떨어뜨렸으니 만약 김응하의 죽음이 없었다면 장차 무엇으로 천하 후세에 말을 하였겠는가. 김장군의 〈묘비〉

○ 김응하는, 자는 경희(景羲)이며, 본관은 안동이요 철원에 살았다. 을사년에 무과에 뽑혔는데 신장이 8척이 넘고 힘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고 활쏘는 재주가 뛰어났다. 기풍이 헌칠하고 행동이 조용하여 무인의 거친 기질이 없었으며, 술을 몇 말이나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명신록》

○ 공 김응하 은 몸과 얼굴이 웅장하며, 큰 소 다리를 한꺼번에 먹고, 더욱 활쏘기를 잘하여 맞추지 못한 경우가 없었다. 선천(宣川) 사람이 북도(北道)에 수자리[戍] 가서 뛰어나게 잘 달리는 호마(胡馬)를 얻었는데, 공은 이 말을 타고 달리며 말 위에서 투구ㆍ갑옷ㆍ활집ㆍ화살통 등을 벗어 땅에 던지고, 말에서 뛰어 내려서는 낱낱이 주어서 다시 말 위에 뛰어 올랐으니, 그 날래고 용맹함이 이와 같았다. 이에 선천의 백성과 군사들은 벌써 공의 재능에 감복하였고 나라 풍속이 평소에 건주(建州) 오랑캐를 가볍게 여겨서 모두 분발하여 이르기를, “묵작(墨綽) 세속에서 건주 오랑캐를 묵작(墨綽)이라 불렀다. 을 섬멸시킬 수 있으니 돌아와 공로로 책봉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늙은이와 어린이가 아니면 모두 공을 따라 출병해서, 이로 인하여 선천 백성들의 죽음이 많았다. 《정재집》

○ 심하(深河)의 전쟁에 그 가족과 영결하고 뒷일을 처리하고는 인신(印信)을 봉하여 고을 아전에게 주면서, “적을 만나면 내가 반드시 전사할 것이니, 이것을 차고 갈 수 없다.” 하였다.  ○ 그때 영유 현령(永柔縣令)이유길(李有吉)이 김응하와 같이 죽었는데, 죽을 때에 한삼(汗衫)을 찢어서 ‘5월 5일 죽다.[五月五日死]’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말 갈기에 매었더니, 말이 군중을 지나 뛰어서 3일 만에 집에 돌아가서 슬피 울고 곧 죽었다. 이에 그 말을 유길의 무덤 밑에 묻었다. 그 무덤이 파주 광탄(廣灘)에 있는데 지금 사람이 ‘말무덤’이라 이른다.《명신록》

○ 과거에 공 김응하 이 좌영 군사를 거느리고 김경서 군에 소속되었는데, 부차령(富車嶺)에 이르러 여러 군졸이 가볍게 전진하다가 패하니, 공이 수하 군사 3천 명으로써 말을 채찍질하여 진을 버렸다. 진이 이루어지자 홍립에게 고하기를, “속히 우영에 전령을 내려 맞아서 싸우게 하시오.” 하니, 홍립이 우영장 이일원을 시켜 서로 돕게 하였다. 공이 일원에게, “우리 군사는 험한 곳에 웅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으나, 일원이 듣지 않더니, 적 수천 기병이 두 진 사이를 가로질러 끊자 일원은 도망쳤다. 얼마 후에 적 6만 명이 1리 밖에 진영을 맞대고 정예 병력을 뽑아서 그 앞을 침범하자 공이 포수를 시켜 일시에 적병에게 총을 쏘아 세 번이나 물리쳤더니,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에 가득 차서 포와 화살을 쏠 수가 없었다. 이에 적이 힘을 합하여 쳐들어오니, 아군이 즉시 전멸하였다. 공이 홀로 손에는 활을 들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서 버드나무 밑에 기대어서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헛 나가지 않고 한꺼번에 여럿을 맞추니 적의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었다. 이때 공은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수없이 몸에 맞았지만, 두꺼운 갑옷을 입어서 뚫고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적을 치며 홍립을 크게 꾸짖기를, “너희들이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리고 구원하지 않는구나.” 하였다. 또 칼이 부러지자, 빈 주먹으로 버티면서 더욱 분전하였는데, 이때 한 적병이 뒤에서 창을 던져서 드디어 땅에 엎어져 목숨이 끊어졌다. 그래도 오히려 칼자루를 놓지 않고 노한 기운이 한창 일어나니, 적이 서로 돌아보며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홍립 등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오랑캐 추장이 양 진의 시체를 묻게 하였는데, 공의 시체만은 썩지도 않은 채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김응하 묘비《우암집》

○ 아군이 우미령(牛尾嶺)을 넘었다. 원수의 군영은 영(嶺) 위에 있고, 좌영은 영(嶺) 밑 평지에 있었는데 이튿날 날이 밝아서 보니, 명 나라의 패전한 군사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간간이 아군에 들어오니 아군이 떠들썩하여 좌영에서 명 나라 패잔병을 진중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갑자기 오랑캐가 많이 밀어닥쳐 먼저 좌영을 침범하므로 응하가 거마목(拒馬木)나무로 말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것. 을 진 앞에 둘러치고 부대를 나누어 포를 쏘게 하니, 오랑캐 기병이 길이 막혀서 뚫고 오지 못하고 여러 번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갔다 하였다. 그때 홍립은 전군을 이끌고 영(嶺) 위에 있으면서도 좌영에서 벌떼처럼 왕래하며 긴급함을 알려와도 망연히 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오랑캐 기병들은 패잔병의 말을 연이어 매어 놓고, 철기병이 말 뒤에 따라오면서 병기로 말을 몰아 내달려 거마목을 무너뜨리게 하였다. 이에 좌영에서 포를 쏘니, 오랑캐의 선두가 넘어지자 뒤따라온 적병이 연달아 밟고 넘어오는데, 좌영에서는 군사가 적어서 버티지 못하고 드디어 패하였다. 이리하여 응하가 말을 잃고 걸어서 큰 버드나무 밑에 나가 활로 쏘아 죽인 적의 수가 매우 많았는데, 이때 오랑캐 군사들은 공의 주위를 담처럼 둘러서고 숲같이 나열하여 있으면서도 응하가 서있는 백 보 안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하더니, 한참 후에야 오랑캐가 어지럽게 들어와서 응하가 전사하였다. 김려기(金麗奇)가 전한 《정재집(定齋集)》

○ 이전에 응하가 우미령(牛尾嶺)을 넘기 전에 어떤 늙은 할멈이 지나가며, “군사가 이 영(嶺)을 넘으며 안 될 것인데 왜 잠시 여기서 멈추지 않는고.” 하니, 응하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며 잡아다 베고 드디어 영을 넘더니 군사가 과연 패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神)이 먼저 고하였으나, 응하는 이미 죽을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김여기가 전한 《정재집》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응하가 화살이 다하여 말을 찾아 달아나려고 좌우를 돌아보았으나 그때는 이미 좌영 군교 지득남(池得男)이 공의 좋은 말을 훔쳐 타고 도망한 뒤였으므로 공이 드디어 죽었다. 공의 자손들이 이 일을 호소하여 득남을 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요행히 면하였다.” 하는데, 응하가 칼 한 자루와 활 한 개로 사방에서 오는 오랑캐를 혼자 감당하였으니, 반드시 살지 못할 것은 화살이 다하기 전에도 알 수 있었던 일이며, 일이 그 지경에 이르면 달아나도 벗어나지 못할 것인데, 자손들이 그 부조(父祖)를 그르침이 많도다. 《정재집》

○ 조정에서 김응하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용만(龍灣)에다 사당을 세우고 공의 화상을 그려 모셨더니 병자년 난에 오랑캐가 그 사당을 불태웠다. 이에 선천 백성들이 공을 위하여 선천에다 사당을 짓고 제사지내려 하니 부사가 두려워하고 꺼려서 마침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김장군의 행적과 만사를 기록하여 〈충렬록(忠烈錄)〉이라 이르고, 세상에 간행하였고, 박정길(朴鼎吉)은 시를 짓기를,
백 길의 심하(深河)와 만 길의 산에는
지금까지 모래밭에 피 흔적이 얼룩졌네.
강 위에서 초혼(招魂)하지 말아라.
오랑캐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리.
[百丈深河萬?山 至今沙?血痕斑 英魂且莫招江上 不滅匈奴定不還]
하였다. 《정재집》ㆍ《속잡록》

○ 명 나라 신종(神宗)이 조서로 김응하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그 처자에게는 백금을 내리고 〈묘비〉차관(差官)을 보내어 용만관(龍灣館)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글에, “방군(邦君) 어사(御史)와 호분 백윤(虎賁百尹)들은 들어라. 동번국(東藩國)의 충신 김응하 장군은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였으니, 짐(朕)의 마음에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죽은 자를 위하여 상작(上爵)을 주노라. 아아, 처음 이 추한 북쪽 오랑캐가 무엄하게도 남쪽으로 말을 먹여[南牧 남침] 사나운 무리를 거느리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였다. 더욱 내 계책이 정하였으니 어찌 감히 정벌하지 않으랴. 나의 대장(大將)과 우방(友邦)의 대군을 독려하여 하늘의 토벌을 받들어 행할 때 장군은 죽을 마음을 가졌고 사졸도 살 뜻이 없었도다. 전군이 모두 패하였으며 교활한 오랑캐가 승세를 타니 여러 장수들은 살기에 급급하였는데 장군만은 죽음을 바쳤도다. 장군의 의리는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나 장군의 죽음은 내가 부끄러워하노라. 아아, 안에는 중국이요 밖에는 이적(夷狄)이니 수양(修攘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것)함이 도리를 얻으면 오랑캐가 절로 복종하고, 수양(修攘)함이 도리를 잃으면 오랑캐가 중국을 어지럽게 하나니, 과인이 생각하지 않고 덕을 밝히는 데 어두워 만리를 정벌하여, 나의 장졸을 몰아다가 오랑캐의 땅에 피와 살을 버리게 하였으니 과인이 부끄러워 하노라. 민심은 일정하지 않아 오직 은혜만을 생각하니, 어루만져 주면 나를 임금으로 여기나 학대하면 나를 원수로 여기는도다. 과인이 위로는 천심(天心)을 거스리고 아래로는 민심을 어기는 것을 피하지 아니하고 가볍게 큰 일을 일으켜 군수물자 운반에 원망이 일어나니 드디어 장군만이 혼자서 싸우는데 구원병이 없게 되었으니 과인이 부끄러워 하노라. 붉은 충심을 누가 본받으며 백골을 누가 거두리오. 당상(堂上)에 늙은 어미는 문에 기대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끊기고 규중에 홀로 된 아내는 망부석(望夫石)이 되었으니 내가 심히 슬퍼하노라. 비록 그러하나, 과인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워 해도 아무 쓸모가 없고 장군의 죽음은 죽어서도 빛이 있도다. 가을 서리 같은 큰 절개와 흰 태양 같은 맑은 충성은 만고토록 강상(綱常)을 붙들고 인신(人臣)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대의를 밝히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였으니, 장군은 비록 한 번 실패로 죽었으나 만고에 죽지 아니하였도다.
아아,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죽지 않았으면, 당(唐)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요, 문천상(文天祥)이 죽지 않았으면, 송(宋)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으면 내 나라에 신하가 없었을 것이다. 충신과 열사가 어느 시대에 없으리오마는 몸을 잊고 나라에 바친 그대 같은 이가 뉘 있으리오. 천지에 순수하고 강한 한 기운이 만고에 뭉쳐 있더니 장군은 이 기운을 타고나서 장군이 되었도다. 삼군(三軍)에게 장수는 탈취할 수 있으나, 필부의 마음은 탈취할 수 없고, 오악(五嶽)은 움직일 수 있으나, 한 절개는 움직이기 어려운 것을 이로써 알겠다. 만약 장수들의 충성심이 모두 장군과 같았으면 장군이 어찌 패하여 죽었으며, 과인이 어찌 오랑캐 추장에게 욕을 당하였으랴. 아아, 충성이 장군과 같고 용맹이 장군과 같고 지혜가 장군과 같았으나 고립되어 구원이 없었음은 과인이 죄로다. 덕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함은 옛부터 그런 은전이 있었으니 충신을 표창하고 절의를 드러내는 것이 오늘 날만 없으리오. 나는 선왕의 업을 계승하여 예물을 갖추어서 장군의 처자에게 사례하고 요동백(遼東伯)으로 증직하노니, 나의 작은 정성을 드러내어 구원(九原 저승)에 있는 충혼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속잡록〉

○ 세상에서 말하기를, “김응하가 죽으니 명 나라에서 요동백을 추봉하였다.” 하니 망녕된 말이다. 〈충렬록〉에 기록된 여러 사람의 만사와 전기에 모두 이런 내용이 없고, 명 나라 사람이 지은 〈충의록(忠義錄)〉에도, “조선 장관 김응하 등에게도 휼전(恤典)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것을 보아도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시골 선비가 조서를 모방한 것으로 그 글이 매우 상스럽고 졸려하였는데, 조경남이 이것을 기록하여 드디어 잘못 전해졌다. 송시열이 응하의 신도비문을 지으면서 드디어 엄연히 요동백이라 일컬었으니 애석하다. 《몽예집(夢?集)》

○ 군보통인(軍保通引) 김철현(金鐵賢)이 공을 따라 바야흐로 버드나무에 기대어 활을 쏠 때에, 모든 군사가 다 흩어졌으나 철현만이 그 자리를 지키며 떠나지 않고 공의 갑옷 속에 엎드려 화살을 집어 주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철현이 외치기를, “화살통이 비었습니다.” 하니 공이 돌아보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네가 달아나고자 하느냐.” 하였다.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의리상 장군과 같이 죽겠으니 장군과 함께 한 칼에 죽어서 소인이 도망가지 않음을 밝히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함께 죽었다. 조정에서 철현의 자손에게 10대 동안 세금을 면제시키고, 용만(龍灣)에 사당을 세워 철현의 화상을 공의 곁에 그려 두었다. 《몽예집》

○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버드나무 밑에 한 장수가 가장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았다. 조선에 만약 이런 사람이 두 서너 사람만 더 있었다면 대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명신록》

○ 응하가 버드나무 밑에서 기대어 적을 쏘고 그 밑에서 죽었기 때문에, 적이 그 나무를 ‘장군버들[將軍柳]’이라고 이름하였다. 《일사기문》

○ 효종조에 공의 아우 응해(應海)가 역옥(逆獄)의 공초에 관련되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응하의 아우이니,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곧바로 북병사(北兵使)로 임명하였다.(김장군 비문)

○ 기미년 전쟁에 광해군이 이첨과 더불어 원수 홍립에게 형세를 보고 향배(向背 항복과 공격)를 정하라고 은밀히 명하였으니, 이는 오랑캐로 하여금 군사를 우리나라에 먼저 옮겨서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홍립 등이 전교를 받았기 때문에, 적을 만나도 애당초 힘써 싸우지 않고 전군이 오랑캐에 항복하였는데, 김응하만이 홀로 분연히 따르지 않고 별도로 그가 거느린 군사를 내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으니, 그 의열(義烈)은 진실로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또한 명 나라 여러 장수들도 감히 따를 수 없는 바이니, 그 절의를 표창하여 후세를 가르침은 진실로 옳은 일이다. 그런데, 조정으로부터 시편(詩篇)을 널리 구하여 한 책을 만들어 내어 훈국(訓局)에 명하여 나라 안팎에 간행 배포하고, 이어서 중국에까지 들어가게 한 것은, 그 뜻이 전적으로 응하의 절의를 표창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은밀히 명했던 흔적을 숨기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이첨이 감히 상소한 것도 또한 여기에 원인이 있으니, 통분을 금치 못하겠다. 《동리소설(東里小說)》

○ 4일에 명 나라 장수들이 먼저 행군하고 아군의 3영이 뒤따라 나아가니, 도로는 평탄하나 산골이 연이어 뻗어서,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려, 영졸(營卒)들이 각각 거마작(拒馬?)을 메고 앞으로 겨우 수십 리를 가서 부거지(富車地) 노성(好城)에서 60여 리의 거리에 있다.에 도착하니 대포 소리 세 번이 연달아 들렸다. 이에 홍립이 말을 빨리 달려 길 왼편 언덕에 올라 보니, 회오리 바람에 갑자기 일고,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기 때문에 곧 좌영은 맞은 편 높은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중영은 원수가 올라간 언덕에 진을 치고, 우영은 남쪽 변두리 한 언덕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따. 좌영은 이미 벌판에 진을 쳤었으나 적의 기병이 벌써 가까이 있어 이동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근처 부락 백여 집에 명 나라 군사들이 불을 질러 연기가 바람이 따라 와서 진영 위에 덮었다. 잠시 후에 진 상공(陳相公)ㆍ우 수비(于守備)ㆍ교 유격(喬遊擊)이 필마단기로 와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가 모두 함몰되었고 제독도 전사하였다.” 하였다. 대개 유정이 새벽에, “가합령(家哈嶺) 밖은 적의 경비가 전혀 없다.”는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빨리 달려 먼저 가서 수십 리에 걸쳐서 군사를 나누어 부락을 약탈하게 하여 군대의 대오를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랑캐 장수 귀영가(貴盈哥)가 3만여 기를 거느리고 서로에서 밤새 내내 달려와 새벽에 가합령을 지나서 산골짜기에 매복하였다가, 불의에 뛰쳐 나와서 앞 뒤를 가로막아 끊으니 명 나라 군사의 여러 진영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채 모두 함몰되었다고 한다. 우 수비와 진 상공은 즉시 달려 가고 교 유격은 말하기를, “나는 귀국 군사를 감독하니 갈 수 없다.” 하였다. 연기와 먼지 속을 바라보니, 적의 기병이 크게 닥치는데, 양쪽 날개처럼 멀리 에워싸고 먼저 아군의 좌영을 치니 홍립이 전령을 내려 우영(右營)으로 하여금 달려와 구원하게 하여 좌영과 진을 연합하게 하여서 겨우 대열을 이루자, 적의 기병이 달려와 충돌하니, 기세가 비바람과 같았다. 포와 총을 한 번 쏘고 나서 두 번째 화약을 장전하기도 전에 적의 기병은 벌써 진중에 들어와 순식간에 좌우영이 모두 함몰되었다. 이에 선천 군수김응하, 운산 군수이계종(李繼宗), 영유 현령이유길(李有吉), 우영천총(右營千摠)김요경(金堯卿)ㆍ오직(吳稷)ㆍ좌영천총김좌룡(金佐龍)은 모두 전사하고, 좌영천총신충업(申忠業)은 도망가고, 우영장 순천 군수이일원(李一元)은 벗어나 달려서 중영으로 들어왔다. 《책중일록》




▣ 김항용 -
▣ 솔내영환 - 충무공 김응하 선조님의 옛 기록을 한곳에 모아 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 김재원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