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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138) 울음바다된 하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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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6-20 00:41 조회1,6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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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짙은 효창공원에
선생은 永眠하시다.
行人아, 발 멈추고 靈前에 절하자

  슬픔에 넘친 인민의 오열이 이제 하관이라는 기약된 시간에 마지막 적별을 앞두고 황혼은 적막케

한다.  [오호 백범 김구선생이시여] 황혼이 짙은 장지에서 무심히 떠나가신 선생의 靈與앞에 애끓는

수천군중!  울음아 쏟아져라, 이제  또 어느 날 선생의 그 애족의 대의를 부르짖는 그 소리 그 모습을

다시 보랴!  1949년 7월 5일의 황혼이여 잠시 그 밤을 머무르라.  장의행렬은 삼천만의 눈물과 哀愁를

 담뿍 실은채 차례로 도착한다.  생존시 애용하시던 靈車의 뒤를 따라 배종하는 都. 鮮于 두비서가

고인이 쓰시던 붓, 벼루, 먹 등을 가지고 들어오는 모습도 처절하고 선생이 서거하신 이후 울음과

분통에 싸이여 지내온 열흘동안 그리고 오늘 이른 아침부터의 장의식으로 지쳤음인지 장의부위원장

조완구씨가 두 사람의 젊은이 어깨에 부축되어 들어오고 있음도 애처러워 보인다. 

弔歌隊에 참가하였던 연약한 여학생들도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曝陽속에서 피로함도 모르는 듯

슬픔과 울음에 싸여있다.  이윽고 백범선생의 유해를 모신 靈與가 오후 8시 45분 묘소 앞에 도착한다.

  영여를 손수 메고 온 상여 멘 청년들은 선생의 생존시에 사람을 받던 젊은이들이기에 終始 영여를

떠나지 못한 채 영여에 매달여 몸무림 친다.  울어도 울어도 시원찮고 땅릉 치고 울어도 다시 못 오

실 이 길을 어찌하리?  그칠줄 모르는 울음을 억제하고 이윽고 9시 10분 비로소 하관식이 시작되었다.


  하관식은 황혼이 차차 짙어 어두어 가는 효창 언덕 옛 동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삼의사의

묘지로부터 200미터 남으로 떨어진 곳에서 백범 김구선생을 애끼는  수많은 겨레가 운집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먼저 박윤진씨의 司儀로 애국가 봉창에 이어 구슬픈 弔樂이 있은 다음 분향.

헌화가 있었고 조소앙씨의 떨리는 목소리의 제문낭독이 있었다.


祭文


[維檀紀4282년 7월 5일 국민장위원회 발기로 한 묶음의 꽃과 한 줌의 향으로써 영결의 제를 올리나이다.  선생은 50여 년을 丹誠을 다하여 하나도 민족을 위함이 아닌 게 없었고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시었다.  아! 선생의 최후가 이처럼 될 줄이야 뉘라서 알았으리요.  팔십 평생을 조국을 위하여 바치셨으나 선생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시었으니 노소동포가 선생의 유한에 울지 않을 자가 있으리요,  그러나 그 선생의 정신만은 우리들과 더불어 길이 존재케 하오리다.  嗚呼哀呼]

그리고 상주 김신 내외의 분향이 있은 다음 서울교향악단의 弔樂裡에 하관이 시작되었다. 

효창언덕은 차차 어둠이 짙어지고 하늘에는 초생달이 빛없이 걸려 있는데 모여든 겨레들은 헤어질

줄 모르고 땅을 치며 목을 놓아 우는 곡성과 아우성은 구천에 사모칠 듯 하였다.  백범선생은 이제

정말 어둠 속에서 촛불로 하관을 마치고

[奉悼安東金氏宗中]이라는 輓詞를 덮은 다음 장의위원장의 入土가 있었다. 

 다음 일동은 백범 김구선생의 영원한 명복을 비는 묵상으로 엄숙한 하관식은 끝막았다.


  때는 10시 5분!  이리하여 민족의 거인 백범 김구선생은 효창 언덕에 길이 주무시게 되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재원 -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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