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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140)경향신문(장례 당일 7/5일) 보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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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6-20 20:05 조회1,7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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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7월 05일 / 白凡 金九 국민장 거행 
 

[발생일자] 1949년 07월 05일
[게재지명] 경향신문
[게재일자] 1949년 07월 05일
[제목] 白凡 金九 국민장 거행
== 내용

오늘 7월 5일 조국 해방을 위하여 70여 평생을 민족에 바친 고 백범 김구 선생이 겨레와 하직을 하고 영영 가시는 장례의 날, 이제 이 나라 이 겨레가 천고의 한을 품은 선생의 靈輿를 매게 되다. 비보를 들은 첫날의 슬픔 또다시 복받치고 선생의 명복을 비는 경건한 마음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합하여 보이지 않는 영여 앞에 나부시 배례케 한다. 오늘 선생의 국민장은 다음과 같은 경로시간과 절차를 밟아 효창공원 幽宅에 영을 모시게 되었다.

오전 10시 30분 靈柩 京橋莊 출발(대통령·부통령·국회의장·대법원장·외국사신·국무위원·동지원로·국회의원이 참가 일반 정부·민간대표는 서울운동장 집합)

光化門通­鍾路­서울운동장 도착(12시 정각)

오후 1시 영결식 개식

오후 3시 발인(乙支路­서울역전­龍警前­효창공원)

오후 4시 50분 장지 도착(10분 휴식)

오후 5시 하관식 개식

오후 5시 하관

오후 6시 폐식

山役과 도로수리 民保團員이 봉사

고 백범 선생이 고요히 주무실 효창공원 안 3열사 묘지 西산록묘소의 산역은 지난 6월 29일부터 시작되었는데 효창동 민보단을 비롯한 靑坡洞 동민, 한청마포구단 등 약 5백 명이 첫날부터 이에 호응하여 분묘방충공사 등 조력하고 있는 한편 종래 황폐되어 있던 元曉路의 보도수리도 5일까지에 완료할 작정으로 근처 원효로 1가 민보단원 등이 총출동하여 지난 3일부터 밤을 새워가며 노력을 제공하고 있어 위원회측을 감격케 하고 있다.

국회의원들 조의금

어제 국회본회의에서는 吳錫柱의원 외 35인의 긴급동의안으로 고 백범 김구 선생 서거에 제하여 의원은 매인당 1,000원(약 20만 원)을 지출하여 조의금으로 하고 의장이 대표로 경교장을 조문할 것과 국민장 당일인 오늘에는 임시 휴회하기로 정하고 전 의원은 서울운동장 국민장의식에 참가하자고 제의하여 만장일치로 가결 통과되었다.

(경향신문 1949. 7. 5)

마침내 김구 선생은 靈位마저 길이길이 가시다.

아흐레 전날 밤 따스한 맥은 지고 살빛 차게 변한 때 이미 하늘 우러러 보고 땅치며 통곡한들 소용있었으랴마는, 이제 3천만 겨레 다같이 마음의 어깨 위에 靈柩를 매니 새삼스레 이것이 정말 이별인 양 잦았던 설음 다시 복받쳐 왜이리도 목이 메여라. 설움에 떨리는 연필 간신히 휘잡고 오오 말없는 선생의 뒷모습을 고개숙여 따르며 겨레들 흘리는 눈물밭 위에 소조히 새기며 계시는 크고 높은 님의 마지막 발자국을 더듬었도다. 영원히 잊지 못할 이 날의 기억이여!

이 날은 하늘도 유심한 듯 아침 구름은 해를 가리워 무거히 드리웠다. 새벽 1시 무렵 경교장 안은 영구 結棺式이 있어 어젯밤을 앞뜰 仰帳 아래서 꼬박새운 조객이며 상의원들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눈물 속에 식을 마치고 날이 밝자 7시에 현관 앞으로 관을 모시고, 이어서 기독교단체 대표들의 영결을 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서울 시내 가가호호엔 조기가 세워지고 흰 옷에 장상을 달은 겨레들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경교장을 중심으로 장례행렬이 지나갈 가두로 가두로 총동원 모여들었다. 전 시내의 문은 묵묵히 닫히고 전날부터 이 날만은 꼭 참렬하려니 별러 왔던 것이다. 한편 각 지방 방방곡곡에서도 선생의 유영을 모시고 학교마다 단체마다 한데 모여 서울과 한 시간에 영결식을 거행하고 길이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9시경 벌써 경교장 문앞부터 종로·동대문·서울운동장·식장까지 곧은 길 인도에는 발 하나 디딜 곳 없이 사람사람 얼굴얼굴로 꽉 메꾸어졌다. 인산인해란 형용이 모자라게, 하여튼 이 나라가 있어온 지 전무후무한 가두모임이다. 이윽고 9시 50분 영구는 현관을 떠나자 경교장 앞뒤는 오열의 파도, 설움의 바다로 화하였다. 영구는 천천히 내려와 문앞에 장만된 하얀 영여 위에 모셔지고 흰 꽃으로 두루 장식된 다음, 天板 위에는 선생이 하루 한시 잊지 않으시던 태극기가 덮여진다. 이윽고 영구는 좌우 양편 100명의 護喪員들의 어깨에 오르시니 女大합창대원의 조가가 울려 선생을 부르는 듯 구슬프게 계속된다.

중등학교 종합브라스밴드의 주악에 여대생합창대의 애끓는 조가 님은 들으시나이까 들으시나이까를 부르자 영구는 떠나기 싫다는 듯 또다시 호장위원들의 어깨로부터 조용히 내려앉는다. 거리거리에 도열한 백성들의 소리없이 흘리는 눈물 영위는 호장위원들의 어깨에 오른다. 아! 마지막 떠나시는 길 영위를 멘 호장원들의 두 볼에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눈물의 줄. 이리하여 울음과 곡의 아우성 속에 영위는 정말로 경교장 앞을 떠나신다. 때마침 10시 50분 호상의 슬픈 행렬선두 기마대 6기가 광화문 네거리에 있고 그 뒤 進明女中 16명의 국기반이 있었으며, 육해군 합동군악대 前驅의 장병 그리고 그 뒤에 선생이 타시던 서울 2331호가 지금 선생은 안 타셨으되 영을 싣고 상복한 운전수의 운전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선생의 비서 鮮于鎭·都寅權 양씨가 말없이 따른다.

행렬은 그 뒤에 중등대학생의 영차의 장대가 따르며 그 뒤에 선생의 遺影이 三均청년회원에게 인도되고 嚴道海·金宇詮 양 씨가 陪從하고 의장대와 악대·조가대가 따른다. 그 뒤 약 50미터 거리를 두고 장의위원장 吳世昌옹과 有服親 친척이 울부짖으며 따른다. 그 뒤에 대통령대리·부통령대리와 국회의장·대법원장·외국사신·국무위원과 정부 각 기관대표·정당·사회단체·일반의 순서로 행렬은 계속된다.

이리하여 눈물의 행렬은 경교장을 떠나 광화문을 지나 종로에 이르러 영결식장 서울운동장에 향하는 것이다. 유영과 영구가 앞을 지나니 겨레들은 일제히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였다. 눈물을 가리는 손수건의 파도 속으로 부위원장 3명이 자동차로 따르고 정계요인 다수가 자동차로 따르며, 장의위원들은 걸음도 천천히 발을 옮긴다. 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白凡金九之柩라고 흰 글로 쓴 붉은 銘旌이 建實 책임자 6명의 손에 높이 호위되고 그 뒤 80명의 젊은 동지가 영구의 앞뒤에서 영구를 호위한다. 영구 뒤에는 오늘의 슬픈 상주 信씨 내외가 눈물어리어 따르며 바람에 나부끼는 영구의 천막자락도 하염없이 눈물의 행렬은 고요히 진행하였다. 행렬이 종로 네거리에 이르러 영구는 바로 인정 앞에서 잠시 쉬었다. 4년 전 선생이 환국하여 임시정부환국 환영국민대회날 선생의 금의환국을 경축해 울리던 그 인경, 오늘은 소리없고 선생 역시 말이 없다.

염천이나마 흰구름이 영구 위에 감돌아 영구가 움직이는 마지막의 발자국이 遲遲하게 앞을 나가지 않으며 종로 네거리 양 옆에 서서 선생의 최후에 결별하려는 시민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높아진다. 이리하여 선생이 남기신 유덕인 양 길고 긴 눈물의 행렬은 종로는 물론 을지로6가, 청계천 하구에까지 모인 인산인해의 복입은 시민들의 오열 속에 1시 20분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 앞에 다다랐다.

城東原頭서 斷腸의 영결식

위대한 애국자 고 김구 선생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영결식은 예정보다 약 1시간 30분 늦어 5일 하오 2시 30분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선생의 서거를 슬퍼하는 전 민족의 통곡 가운데 엄숙히 집행되었다. 이 날 영결식장으로 지정된 서울운동장에는 선생의 불같은 애국심과 고결한 인격을 흠모하는 청년과 학생을 비롯하여 종교단체·노동자·상인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 남녀동포들이 이른 아침부터 앞을 다투어 입장하여 정각 두 시간 전인 상오 11시 경에는 이미 넓은 운동장을 사람의 바다로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우방 중국인들의 조의를 표하는 검은 복장과 선생의 만고불멸의 애국 정열을 상징하는 가지가지의 만장이 유난히 눈에 뜨이었다. 십분, 이십분, 침묵의 시간이 지나 경교장을 출발한 선생의 영구가 운동장에 가까워짐에 따라 장내의 분위기는 점점 긴장하여 갔다. 그것은 마치 배에서부터 가슴으로 벅차게 무엇이 떠미는 것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더 한층 심각해 보였다. 흉탄에 쓰러지던 그 순간까지 조국통일의 비원을 가슴에 품은 채 이제 선생은 조국산천과 하직하고 황천길을 영영 떠나시려고 하니,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홀로 가시는 선생인들 그 얼마나 원통하며 보내는 3천만 역시 얼마나 가슴 아프랴! 기다리는 사람들은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선생의 혼과 만난 후 실컷 울자는 듯이 일부러 눈을 감고 있는 청년도 있었다. 님을 기다리는 서글픔 가운데도 시간은 흘렀다.

하오 1시 20분 李국무총리와 申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각부 장관, 국회의원 그리고 유엔한위대표 일행 등 10여 만 군중이 눈물에 잠긴 채 고대하고 있는 영결식장으로 육해군 군악대가 연주하는 장송행진곡에 발맞추어 말없이 선생의 영위는 나타났다. 남녀학생 합창대가 부르는 김구 선생 애도가의 노래는 듣는 사람의 창자를 끊는 듯,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지게 하였다. 운동장에 말없이 도착한 김구 선생의 영위는 동지들의 손으로 제단 위에 안치되었다. 선생은 이미 가시고 다만 선생의 초상화만이 슬픔에 잠긴 동포들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고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은 하오 2시 10분부터 朴允進씨 사회하에 시작되었다. 국방부 육군장병의 은은한 조포에 이어 일동의 국기경례, 애국가봉창과 육해군 합동군악대의 주악이 있은 후 국민장 장의준비위원장 오세창씨의 대리로 趙素昻씨의 식사에 들어가 이제부터 고 김구 선생의 국민장을 시작하는 것을 선포한다고 선언한 후, 선생의 국민장의를 여기서 맞게 된 것을 무엇으로써 이를 보충하여 조국통일을 할 것인가, 백범 선생의 정통을 계승하여 제2·제3의 백범이 나올 것과 민족진영이 단결하여 자주독립을 완성하여야 되겠다는 말에 이어 柳林씨로부터 투쟁과 유랑으로 엮어진 선생의 약력보고가 있었다. 뒤이어 남녀학생연합 합창단의 조가가 있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중국으로부터 환국한 후 수차에 걸쳐 국민에게 조국통일을 부르짖던 그 자리에 선생은 지금 고요히 잠들고 계시며 마지막으로 이 강산과 작별하고자 한다. 억지로 참고 있던 울음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하여 넓은 운동장은 순식간에 오열의 도가니로 변하였다.

계속하여 趙琬九씨의 분향에 이어 金奎植 박사로부터 선생에 대한 헌화가 있었는데, 김규식 박사는 병환에 있던 몸을 무리하고 나온 듯 측근자들이 부축하고 있었다. 다음 선생의 명복을 비는 일동의 배례가 있은 후 조사에 들어가 먼저 李국무총리가 국민장 부위원장의 자격으로 별항과 같은 목메인 조사에 이어 李대통령대리로 李공보처장과 부통령대리로 李비서실장 등이 각각 별항과 같이 대독하였다. 계속하여 김규식 박사, 嚴恒燮씨, 유엔한위대표 씽 박사, 외국사절단대표로 영국 홀트씨, 중국영사 등의 순서로 애도에 잠긴 조사가 있었다. 이상으로 선생의 명복과 과거의 혁혁한 공적을 회고하는 조사가 끝난 후 분향에 들어가 상주 김신군 부부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분향에 이어 일동의 묵상이 있은 후 서울교향학단이 연주하는 장송곡이 시작되자 장내는 완전히 울음바다로 화하여 곡성이 천지를 흔드는 듯하였다. 하오 4시 좀 지나 육군의 장병이 발사하는 弔銃 소리를 끝으로 선생과 이 나라 겨레와의 마지막 하직은 끝난 것이다. 이제 선생은 영원한 평화의 나라로 떠나시게 되었다.

영결식을 끝마치신 선생의 영구는 운동장에 들어오던 순서로 동 하오 4시 20분경 단장의 통곡소리를 뒤로 하고 선생이 영원히 주무실 효창공원을 향하여 떠나시었다. 선생의 영위는 동일 하오 6시 반경 3천만 겨레가 슬퍼하는 가운데 효창공원 묘지에 안장되시었다.

 


상가 완전 철시, 화교도 조기 달고 애도

백범 김구 선생의 국민장의 날인 5일은 새벽부터 중학생들이 종로 기타 남대문통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우리의 영도자의 최후의 길을 마음껏 정성껏 온갖 정열을 다하여 순식간에 깨끗하게 되었다.

이 날 서울 장안의 가가호호는 물론 특히 중국인촌 水標洞에도 조기를 달고 진심으로 애도의 의를 표할 뿐만 아니라 완전 철시까지 하고 자숙한 바 있었고, 해방후 오늘까지 무시 못할 남대문에 암시장, 기타 명동거리 피엑스에서도 이 날만은 자체를 볼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국민 각자가 속마음에 우러나는 애도의 힘, 즉 이것이 단군의 혈통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 마음을 살리어 남북화평통일을 완수하자.

가두풍경

이 날 서울 시내 뒷거리는 영을 떠나보낸 상가집 동리모양으로 유난히 쓸쓸하였다. 집집마다 대문은 닫히었고 집보는 사람 한두 사람 외엔 장례행렬 가두로 통틀어 나갔다. 도심지 가두의 얼음장수·엿장수도 이 시간엔 손님 한 사람 없어 하품만 하였다. 소공동·명동같은 한나절에 인파를 이루는 번성가에도 인적이 잔잔하고 바람에 휴지 구르는 소리 호젓하였다. 영구를 봉송한 뒤 헤어져 돌아오는 겨레들의 표정은 아직껏 수심을 못 잊는 듯 하였다.

이상 경향신문에서


▣ 김주회 -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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