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143) 효창공원의 역사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3-06-24 20:46 조회1,538회 댓글0건본문
효창공원의 역사
史 蹟
제330호 (1989.6.8 지정)
指定面積
36,979평 (122,246㎡)
時 代
조선(1786∼ )
住 所 地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청파동2가 및 마포구 신공덕동 공덕동 일원
효창공원은 본래 조선조 제22대 왕 正祖의 장자로 5세에 작고한 文孝世子(1782∼1786)의 묘소 즉 孝昌園 자리인데, 그후 이 경내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宜嬪成氏, 純祖의 후궁인 淑儀朴氏 및 淑儀朴氏의 소생 永溫翁主를 안장한 곳이다.
효창원은 지금 효창동과 청파동 일대에 걸쳐 소나무·밤나무 등 수림이 울창하여 매우 유수한 곳이었는데, 1894년 5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우리 나라에 불법으로 침공한 일분의 주력부대인 大島 혼성여단이 지금 효창운동장 남단의 솔밭에 주둔함으로부터 그 좋은 경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일제가 1924년 6월 효창동의 일부를 떼어서 효창공원을 개설하고,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문효세자 이하의 상기 묘소를 모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서삼능 경내로 천장함으로써 효창원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조국광복과 더불어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金九 선생은 그 주도하에 조국광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이봉창(1901∼1932)·윤봉길(1908∼1932)·백정기(1896∼1936) 의사의 유해를 고국 땅으로 모시어, 1946년 7월 효창공원의 중심지인 옛 문효세자 묘터에 국민장으로 안장함과 아울러, 안중근(1879∼1910)의사의 虛墓(假墓)를 나란히 모셨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하신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및 주석 李東寧(1869∼1940) 선생과 국무원 비서장 車利錫(1881∼1945) 선생의 유해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환국후 서거하신 曺成煥(1875∼1949) 선생을 공원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1949년 6월에는 임시정부 주석 白凡 金九(1876∼1949) 선생이 민족통일의 한을 품고 흉탄에 쓰러지자 국민장으로 공원 서북쪽 언덕에 모시어 일대가 선열묘역으로 화하였다.
그러나 특히 김구 선생의 묘소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그간 민족통일의 방책 등에서 이견을 보이던 이승만 영도하의 당시 집권세력에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리하여 선열묘소를 교외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부단하였는데, 그 일단으로 1959년 봄부터 제2회 아세아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묘소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을 추진하였다. 이에 독립투사 心山 金昌淑 옹 등이 중심이 되어 孝昌公園先烈墓所保存會가 결성되고, 언론사를 비롯한 각계의 여론이 비등하여 묘소 이전은 보류되었지만, 효창운동장은 약 15만 그루의 나무와 숲 속의 연못 및 섬까지 희생시키고 끝내 1960년에 개설되었다. 이러는 동안 5·16혁명 이후 또다시 선열묘역을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 부근으로 이전하려고 추진하였으나 역시 유족과 사회각층의 반대로 보류되었다.
이같은 경로를 거쳐 1972년 서울시에서 효창공원 조경사업(묘지 진입로 및 석계단 설치·외곽 주변정리·수목 조성 등)을 10개년 계획으로 시작하는 동시에 일반인의 공원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이는 1981.6 유료개방 때까지 계속), 1977년 7월에는 건설부에서 효창공원으로 고시하였다. 1984년 12월에는 서울시의 협조로 각 묘소 앞의 墓表石을 新碑로 改竪하였다. 1989년 11월 義烈祠 및 彰烈門이 건립되고 묘역 확장과 정비가 대충 마무리되었으며, 1989년 6월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 김항용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잘 읽어 보았습니다.
▣ 김태영 - 잘 보았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