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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⑥ (대백과사전, 디지털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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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20 23:46 조회2,0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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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⑥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과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안렴사공 김사렴의 후손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金士廉 ⇒ 안렴사공 김사렴 참조

송천서원(松泉書院) ⇒ 안렴사공 김사렴 참조

金公望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金世翊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金王+言(김언)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金澍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우암집(寓庵集)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문암서원 (文巖書院)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태기(金泰基)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용암유고(勇庵遺稿)▣

金在喆▣

조선연극사▣

金在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용암유고(勇庵遺稿)



조선말기의 학자 김사우(金思禹, 1857-1907)의 시문집. 7권 3책 활자본. 저자의 본관은 안동. 자는 인부(仁父), 호는 용암(勇庵)



아버지는 선공감역 호벽(好璧)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호준(浩準)의 딸이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체결 이후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효학(孝學)을 겸비한 학자로서 당시 학계에 명망이 높았다.



이책은 1984년 손자 덕회(德會), 명회(明會)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 모두 김세기(金世基)가 썼다.



권1-3은 서(書) 202편,

권4는 잡저 64편

권5-6은 잡지(雜識)로 경설(經說) 7편

권7은 서(序) 7편, 기(記) 3편, 명(銘) 1편, 발(跋) 1편, 제문 10편, 시 81수,

부록으로 행장, 행장발(行狀跋), 묘갈, 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書중 상간재선생 (上艮齋先生), 답전선생 (答田先生) 등은 대부분 학문에 관한 토론내용이다. 심성(心性)과 학문, 주기(主氣)와 허령심(虛靈心), 만물일체(萬物一體)와 이기(理氣), 체발(剃髮)과 의리(義理), 달덕(達德)과 이심(理心), 성사심제(性師心弟), 인심과 도심등 성리학 전반에 걸쳐 논의하고 있다.



사문문답(師門問答)은 지각과 마음, 각식(覺識)과 심지(心智), 지각과 성(性), 기정진(奇井鎭)의 견해 등을 다루고 있어 당시 전우학파(田愚學派)의 주기적 처지(主氣的 處地)를 살필 수 있다.



한편, 잡저의 명도식인편설(明道識仁篇說), 생지위성주설(生之謂性註說), 용력어인설(用力於仁說), 대학정심설(大學正心說), 달덕설(達德說), 취정록(就正錄) 등에서는 선현의 학설을 훈고(訓 )하여 이기의 문제를 다루었다.



추담별집부록(秋潭別集附錄)은 전우가 시의(時義)에 대하여 저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보낸 글들을 모은 것인데, 창의(倡義)와 도학(道學)의 문제를 논변한 내용으로 전우학파의 처세와 갈등을 고찰할 수 있다.



이밖에 잡지에서는 중용과 사서(四書)의 의의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시 유화양구곡운(遊華陽九曲韻), 덕산구곡(德山九曲), 십이난화(十二蘭畵), 십송화(十松畵) 등은 도학자의 심성수양을 의탁한 내용으로 주목된다.



전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金聖桓>







<청주를 노래한 한시 淸州吟 (임동철, 청주문화원 1998)>

▣ 金思禹



(1856-1907) 한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仁父, 호는 勇菴.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 인곡마을 출생으로 金好壁의 맏아들이다. 艮齋(간재) 田遇(전우)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향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勇菴遺稿] 3권이 있다.





▣ 동림사에서 (金思禹)



청원군 옥산면 동림리의 상동림 마을에 있었던 古寺址

이 절은 곧 우리 선조이신 忍窩公(인와공) 께서 소시적에 일찍이 독서하던 곳인데 지금 두 세 사람의 동지와 더불어 이 곳에 머무르면서 학문을 강하니 대단히 감동하고 사모하여 인하여 본 바로써 시를 짓는다

★忍窩公(인와공) : 金復元(1729-1808), 金公藝후





桐林寺賦感

-寺卽我皇祖忍窩公少 ? 讀書處也 今與二三同志(木+妻)此講學極爲感慕因所視以賦之



瞻彼菴上松 첨피암상송

歲久枝盡(禾+ ) 세구지진 ?



獨帶舊日春 독대구일춘

恰如待我  흡여대아국



放策拾松子 방책습송자

子子深培植 자자심배식



我願雨露潤 아원우로윤

後猶今視昔 후유금시석



而我念皇祖 이아염황조

山空無往  산공무왕촉



推(周변)僕(玉변)當世志 ? ? 당세지

留與後人(亞+斤) 류여후인 ?





암자 위의 저 소나무를 보니

세월이 오래되어 나뭇가지가 다 뭉글어졌구나



홀로 옛날의 봄빛을 띠는 것이

꼭 나를 기다린 듯 하네



지팡이 내려 놓고 솔방울 줍는데

하나하나 깊이도 묻혀 있네



나의 바램은, 雨露가 윤택하여

오래도록 이 모습 남아 있기를



나의 선조를 생각하니

산은 공허하고 자취는 간 데 없네



세상의 뜻을 옥돌에 다듬어 놓고

후인에 주어 새기게 하리라 [勇菴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金在喆



1907-1932 한국연극사 연구의 선구자 국문학자. 본관은 안동. 호는 蘆汀(노정). 충청북도 괴산 출생. 아버지는 思元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이다.



1921년 괴산공립보통학교, 1926년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법문학부 조선문학과에 진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평양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년만에 죽었다.



학문적 업적으로는 논문으로 <조선어化의 조선어>가 있고, 저서로는 <조선연극사> 외에 민요 소설 김삿갓 등의 연구를 묶어 출간한 <노정잡고>가 있다. <조선연극사>는 우리나라 연극사 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노정김재철선생의 소고 (김태준, 조선연극사, 학예사, 1939) <李杜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연극사



김재철이 지은 책. 조선어문학회의 조선어문학총서 3집으로 1933년 5월에 간행된 한국연극통사서이며, 金台俊의 서문과 지은이의 小傳 본문 부록(꼭두각시극 각본)의 순서로 되어 있다.



김재철은 27세로 요절한 연극학도로서 그가 경성제국대학의 졸업논문으로 쓴 <한국연극의 사적 연구>가 바로 이 책이 되었다. 거의 미개척지였던 이 분야에 처음으로 학문적 고찰을 한 업적이며, 한국연극을 역사적 맥락에서 잡아보자는 의도 자체부터가 전혀 새로울 때 나온 저서이기도 하다.



문고판(학예춘추, 조선문고, 1939년 재판) 으로 230면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전통연극을 가면극과 인형극으로 양분하고, 거기에다 구극과 신극이라는 제목으로 신역극 이후의 개관을 덧붙여 놓은 매우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한국연극사 자체가 자료부족 및 연구방법론의 미확립으로 인하여 근래에 이르기까지 위와 같은 테두리를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책은 하나의 선국적 업적으로 별반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본문의 제1편 <가면극>은 삼국 이전부터 신라,고려 및 조선왕조에 이르는 사적 고찰을 한 뒤 산대가면극의 연극내용과 무대구조, 가면의 특성 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조선가면극의 계통에 대하여도 간단히 논하고 있는데, 史料의 섭렵이나 비교연극학적 접근에는 모자람이 많으나 여기서 거론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제2편 <인형극> 역시 개관과 내용, 그리고 계통을 논하고 있는데 이 책 말미에 꼭두각시극 각본을 채집하여 실은 것을 보아도 이 분야에의 저자의 깊은 관심을 알 수 있다.



제3편 <구극과 신극>은 개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원각사 창립시기를 1909년이라 하여 뒤에 수정되는 등 고증에 미비한 점이 있으나 대중연극까지 포함하여 신연극 이후의 모든 것을 망라한 것이 특색이다.



도 조선연극사 김재철 지음



<呂石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金在益



1938-1983 경제학자 경제관료. 서울출생.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다음 1968년까지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73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4년까지 한국은행 조사역,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등을 거친뒤 경제기획원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한국경제의 근간을 다루는 경제기획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75년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 1976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1980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 등을 역임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어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금리 저물가정책을 기조로 하여야 한다는 평소 그의 경제관을 경제정책에 반영하였으며 그의 경제정책은 이후 계속 한국경제계획의 기저가 되었다.



대통령 전두환의 미얀마예방을 수행하였다가 1983년 10월 9일 아웅산사태로 순직하였다. <朴相哲>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http://www.koreandb.net/)>

김사렴(金士廉) ⇒안렴사공 김사렴 참조

김공망(金公望)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세익(金世翊)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언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주(金澍)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태기(金泰基)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재광(金在光)▣

김재철(金在喆)▣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http://www.koreandb.net/)>

▣ 김재철(金在喆)



시대 조선, 항일기

생몰년 1907-1932()

본관 안동(安東)



호 노정(蘆汀)

시호

활동분야 연극연구가, 국문학자

다른 이름





1907∼1932. 한국연극사 연구의 선구자·국문학자. 본관은 안동. 호는 노정(蘆汀). 충청북도 괴산 출생. 아버지는 사원(思元)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1921년 괴산공립보통학교, 1926년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고 1928년 4월 법문학부 조선문학과에 진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평양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년 만에 죽었다. 학문적 업적으로는 논문으로 〈Palatalization에 대하여〉·〈조선어화(朝鮮語化)의 조선어(朝鮮語)〉가 있고, 저서로는 《조선연극사 朝鮮演劇史》 외에 민요·소설·김삿갓 등의 연구를 묶어 출간한 《노정잡고 蘆汀雜稿》가 있다. 《조선연극사》는 우리나라 연극사연구의 선구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蘆汀金在喆先生의 小傳(金台俊, 朝鮮演劇史, 學藝社, 1939). 〈李杜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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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광(金在光)



시대 항일기, 대한민국

생몰년 1922-1993()

본관 안동(安東)



호 서강(西剛)

시호

활동분야 정치가

다른 이름





1922∼1993. 정치가.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서강(西剛). 충청북도 청원 출신. 아버지는 동묵(東默)이고 어머니는 유옥(柳玉)이다.



1960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1968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고, 1989년 미국 퍼시픽대학교(Pacific States University)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8월 초대서울시의회 의원, 같은해 10월 민주당(民主黨) 원내총무, 1960년 12월 제2대 서울시의회 의원이 되었다가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



1963년 4월 군정연장반대시위로 서울교도소에 수감되고, 수감중 105인동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같은해 11월 민정당(民政黨) 서대문구갑구 후보로 위원장이 되었지만 그해 8월 한일조약비준반대를 위하여 소속정당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도 사퇴하였다.



1967년 2월 신민당 창당을 발기하였으며, 같은해 6월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이 되어 신민당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을 맡아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1976년 신민당 최고위원,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 12월 이른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4년 11월 정치활동금지가 해제되자 12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창당발기인으로 참가하였고, 1985년 1월 신한민주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하면서 2월 제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7년 11월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상임고문,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으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990년 연임하였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해 7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이 되었다.



한편 1968년 국가진단연구소(國家診斷硏究所) 이사장, 1972년 동아정경연구회(東亞政經硏究會) 회장, 아시아의원연맹(APU) 이사, 건국대학교 재단이사, 그리고 1989년 서울시의정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이정표》가 있다.



참고문헌

里程表(金在光, 東亞政經硏究會, 1991). 〈李瑞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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