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2003 (01)---선안동김씨와 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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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6-29 20:24 조회1,569회 댓글0건본문
여름캠프2003 (01)---선안동김씨와 김방경
어제 국중도(국립중앙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에 잡히는 책이 한권 있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안동지방의 풍수기행을 하면서 적은 책인데 상락대, 소산리, 김방경묘소 등의 내용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게시판에 꼭 소개하라고 손에 잡힌 것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 봅니다.
이번 여름 <안사연 여름캠프 2003>의 일정에 많은 참고가 될 듯하여 연재하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다녀온 곳은 복습하는 기분으로, 이번 여름에 갈 곳은 예습하는 기분으로 읽어 주시기를.....
■ 동양문화산책16 [안동풍수기행, 돌혈의 땅과 인물] (2001.7, 이완규, 예문서원)
p.시작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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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예로부터 창성한 고을이라 古昌(고창)인데, 신라 경순왕3년인 929년에 세분 太師(태사)가 고려태조 王建(왕건)을 도와 후백제 甄萱(견훤)의 군사를 무찔러 삼천리 금수강산의 동쪽을 편안케 하였으니 이에 安東(안동)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또한 낙강과 반변천의 두 물이 합쳐져 그냥 그렇게 오래도록 아름다우니 이름하여 永嘉(영가)요, 누구나 복 받고 살아온 고을이라 福州(복주)요, 착한 사람과 상서로운 조짐이 가득한 땅이라 吉州(길주)다. 그러한즉 이 땅 안동을 고향으로 가진 자, 그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p.132
성씨
지금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엿한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만큼 내남없이 姓氏(성씨)를 따지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흔히 성과 씨를 합하여 성씨라고 하는데 사실 성과 씨는 다른 개념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성과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지만 [春秋](춘추) [左氏傳](좌씨전)의 해설이 가장 일반적이므로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다.
[춘추] 노나라 隱公(은공) 8년 "겨울 12월에 無駭(무해)가 卒(졸)하다" 라는 經文(경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무해가 세상을 떠났다. 우보가 무해의 시호와 족(氏)을 청하므로 은공이 중중에게 씨에 관하여 물었다. 이에 중중이 대답했다. "천자께서 덕이 높은 사람을 제후로 삼으심에 그가 태어난 땅의 지명을 가지고 성을 주시고, 봉토로써 보답하여 봉토의 지명으로써 씨를 삼습니다."
성은 조상이 태어난 땅이다. 그러므로 성에서 族(족)으로 나뉘고 족에서 다시 씨로 나뉜다. 원칙적으로 성은 고칠 수 없지만 씨는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안동을 성으로 하는 A씨가 많은 경우, A씨중의 누군가가 자신의 직계를 다른 일족과 구별하기 위해 B씨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안동 A씨, 안동 B씨가 생겨난 것인데, 이런 경우를 바로 성은 같고 씨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중국에서도 그대로 지켜진 예가 드물다. 보통은 성과 씨를 합하여 성씨라 하고, 그 개념의 차이도 별 구별 없이 사용하곤 한다.
우리나라는 성은 本(본), 本貫(본관) 혹은 貫鄕(관향)이라 불러 성과 씨를 구별한다. 그런데 본관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본관은 바꾸고 씨는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 즉 성은 바꾸면서 씨는 바꾸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보다 씨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안동김씨 가운데 素山里(소산리)에 거주하는 김씨들은 자신들을 소산김씨라 부르는데, 이는 김씨를 유지하면서 성이 바뀐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 소산김씨는 안동김씨 중에서 안동의 소산리 출신의 김씨들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엄밀하게 보아 본관이 바뀌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소산을 본관이라 생각하게 된다.
P.133
선안동김씨
우리나라 제일의 인구를 가진 성씨는 김씨다. 김씨는 가락국의 首露王(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계열과 신라의 閼智(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 계열로 대별된다. 김씨들은 문헌상으로는 600여 개가 넘는 본이 있으며 시조가 뚜렷한 경우도 100여 본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안동김씨는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안동김씨란 안동을 姓(성)으로 하는 김씨다. 안동김씨에는 같은 본을 쓰는 두 개의 유력한 문중이 있다. 우선 역사가 오랜 경주김씨 계열의 안동김씨부터 살펴보자. 경주김씨 계열 중에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홉 아들 중 넷째인 金殷說(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다.
김은열의 둘째 아들 金叔承(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김씨가 세칭 先安東김씨로 이들을 흔히 先金(선김) 혹은 舊金(구김)이라 지칭한다. 이 선김의 중시조는 고려원종 (1259-1274)때의 시중(종1품)이자 상락군에 봉해진 忠烈公(충렬공) 金方慶(김방경, 1212-1300)이다. 선김은 김방경을 파조로 하는 충렬공파가 가장 번성하였으며, 그 후손 중 일부가 안동시 풍산읍 素山里(소산리)에 세거하고 있다.
P.134
김방경
상락군 김방경은 고려조의 충신으로 자는 本然(본연). 시호는 忠烈(충렬)이다. 김방경은 나이 열여섯 살에 벼슬에 올라 요직을 거쳤으며, 1270년 배중손(?-1271) 등이 삼별초의 항쟁을 전개하자 이듬해 진도에서 삼별초군을 진압하였다.
1274년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자 김방경은 중군장으로 출정하여 쓰시마 섬을 치고 일본 본토를 향해 나아갔으나 풍랑을 만나 되돌아 와야 했다. 1281년 그는 제2차 일본원정에 참가하였으나 또다시 태풍을 만나 성공하지 못했다. 1283년 그는 마침내 상락군에 봉해졌다. [永嘉誌](영가지) 인물조에서는 김방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공의 어머니께서 구름과 노을을 먹는 태몽을 꾸었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구름 기운이 늘 나의 입과 코에 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 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조금만 성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저자의 큰길에 누워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信厚(신후)하며 꿋꿋하면서도 말이 적고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고 넓어 자그마한 예법에 구애받지 않았다. 여러 典禮(전례)와 고사에 밝아 일을 잘 결단하였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을 단속하여 늙어서도 흰머리가 없었으며 기골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살 적에도 늘 나라 걱정하기를 마치 집 걱정하듯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그는 나이 여든아홉에 소연히 세상을 떠났다.
憂國如家(우국여가)! 제 한 몸 추스르기도 바쁜 내가 어찌 그 경지를 짐작조차 하겠는가마는 김방경의 도량은 분명히 일반인과는 다르다. 역사에 찬란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을 어이 나 같은 속물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랴. 그 분들의 행적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계속---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태영종친께서 소개했던 책입니다. 예문서원에서는 이와 비슷한 [안동 풍수 기행,窩穴의 땅과 인물]도 출간 되었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재원 - 글 감사합니다.
어제 국중도(국립중앙도서관)에서 우연히 손에 잡히는 책이 한권 있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안동지방의 풍수기행을 하면서 적은 책인데 상락대, 소산리, 김방경묘소 등의 내용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게시판에 꼭 소개하라고 손에 잡힌 것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 봅니다.
이번 여름 <안사연 여름캠프 2003>의 일정에 많은 참고가 될 듯하여 연재하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다녀온 곳은 복습하는 기분으로, 이번 여름에 갈 곳은 예습하는 기분으로 읽어 주시기를.....
■ 동양문화산책16 [안동풍수기행, 돌혈의 땅과 인물] (2001.7, 이완규, 예문서원)
p.시작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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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예로부터 창성한 고을이라 古昌(고창)인데, 신라 경순왕3년인 929년에 세분 太師(태사)가 고려태조 王建(왕건)을 도와 후백제 甄萱(견훤)의 군사를 무찔러 삼천리 금수강산의 동쪽을 편안케 하였으니 이에 安東(안동)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또한 낙강과 반변천의 두 물이 합쳐져 그냥 그렇게 오래도록 아름다우니 이름하여 永嘉(영가)요, 누구나 복 받고 살아온 고을이라 福州(복주)요, 착한 사람과 상서로운 조짐이 가득한 땅이라 吉州(길주)다. 그러한즉 이 땅 안동을 고향으로 가진 자, 그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p.132
성씨
지금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엿한 성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만큼 내남없이 姓氏(성씨)를 따지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흔히 성과 씨를 합하여 성씨라고 하는데 사실 성과 씨는 다른 개념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성과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지만 [春秋](춘추) [左氏傳](좌씨전)의 해설이 가장 일반적이므로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다.
[춘추] 노나라 隱公(은공) 8년 "겨울 12월에 無駭(무해)가 卒(졸)하다" 라는 經文(경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무해가 세상을 떠났다. 우보가 무해의 시호와 족(氏)을 청하므로 은공이 중중에게 씨에 관하여 물었다. 이에 중중이 대답했다. "천자께서 덕이 높은 사람을 제후로 삼으심에 그가 태어난 땅의 지명을 가지고 성을 주시고, 봉토로써 보답하여 봉토의 지명으로써 씨를 삼습니다."
성은 조상이 태어난 땅이다. 그러므로 성에서 族(족)으로 나뉘고 족에서 다시 씨로 나뉜다. 원칙적으로 성은 고칠 수 없지만 씨는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안동을 성으로 하는 A씨가 많은 경우, A씨중의 누군가가 자신의 직계를 다른 일족과 구별하기 위해 B씨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안동 A씨, 안동 B씨가 생겨난 것인데, 이런 경우를 바로 성은 같고 씨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중국에서도 그대로 지켜진 예가 드물다. 보통은 성과 씨를 합하여 성씨라 하고, 그 개념의 차이도 별 구별 없이 사용하곤 한다.
우리나라는 성은 本(본), 本貫(본관) 혹은 貫鄕(관향)이라 불러 성과 씨를 구별한다. 그런데 본관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본관은 바꾸고 씨는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 즉 성은 바꾸면서 씨는 바꾸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보다 씨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안동김씨 가운데 素山里(소산리)에 거주하는 김씨들은 자신들을 소산김씨라 부르는데, 이는 김씨를 유지하면서 성이 바뀐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 소산김씨는 안동김씨 중에서 안동의 소산리 출신의 김씨들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엄밀하게 보아 본관이 바뀌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소산을 본관이라 생각하게 된다.
P.133
선안동김씨
우리나라 제일의 인구를 가진 성씨는 김씨다. 김씨는 가락국의 首露王(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 계열과 신라의 閼智(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김씨 계열로 대별된다. 김씨들은 문헌상으로는 600여 개가 넘는 본이 있으며 시조가 뚜렷한 경우도 100여 본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안동김씨는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안동김씨란 안동을 姓(성)으로 하는 김씨다. 안동김씨에는 같은 본을 쓰는 두 개의 유력한 문중이 있다. 우선 역사가 오랜 경주김씨 계열의 안동김씨부터 살펴보자. 경주김씨 계열 중에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홉 아들 중 넷째인 金殷說(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다.
김은열의 둘째 아들 金叔承(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김씨가 세칭 先安東김씨로 이들을 흔히 先金(선김) 혹은 舊金(구김)이라 지칭한다. 이 선김의 중시조는 고려원종 (1259-1274)때의 시중(종1품)이자 상락군에 봉해진 忠烈公(충렬공) 金方慶(김방경, 1212-1300)이다. 선김은 김방경을 파조로 하는 충렬공파가 가장 번성하였으며, 그 후손 중 일부가 안동시 풍산읍 素山里(소산리)에 세거하고 있다.
P.134
김방경
상락군 김방경은 고려조의 충신으로 자는 本然(본연). 시호는 忠烈(충렬)이다. 김방경은 나이 열여섯 살에 벼슬에 올라 요직을 거쳤으며, 1270년 배중손(?-1271) 등이 삼별초의 항쟁을 전개하자 이듬해 진도에서 삼별초군을 진압하였다.
1274년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자 김방경은 중군장으로 출정하여 쓰시마 섬을 치고 일본 본토를 향해 나아갔으나 풍랑을 만나 되돌아 와야 했다. 1281년 그는 제2차 일본원정에 참가하였으나 또다시 태풍을 만나 성공하지 못했다. 1283년 그는 마침내 상락군에 봉해졌다. [永嘉誌](영가지) 인물조에서는 김방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공의 어머니께서 구름과 노을을 먹는 태몽을 꾸었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구름 기운이 늘 나의 입과 코에 있다.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 가운데서 왔을 것이다." 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조금만 성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저자의 큰길에 누워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信厚(신후)하며 꿋꿋하면서도 말이 적고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고 넓어 자그마한 예법에 구애받지 않았다. 여러 典禮(전례)와 고사에 밝아 일을 잘 결단하였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을 단속하여 늙어서도 흰머리가 없었으며 기골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살 적에도 늘 나라 걱정하기를 마치 집 걱정하듯이 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임금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그는 나이 여든아홉에 소연히 세상을 떠났다.
憂國如家(우국여가)! 제 한 몸 추스르기도 바쁜 내가 어찌 그 경지를 짐작조차 하겠는가마는 김방경의 도량은 분명히 일반인과는 다르다. 역사에 찬란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을 어이 나 같은 속물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랴. 그 분들의 행적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계속---
▣ 김발용 -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태영종친께서 소개했던 책입니다. 예문서원에서는 이와 비슷한 [안동 풍수 기행,窩穴의 땅과 인물]도 출간 되었습니다.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 김재원 -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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