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153) 암살배후-8-암살당시 헌병사령관 전봉덕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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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7-07 19:25 조회2,233회 댓글0건본문
전봉덕이란 누구인가?
인명사전에서 볼 수 있는 전봉덕(田鳳德)
1910년 출생
1939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 합격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졸업
1949년 헌병사령관
1950년 예편, 국무총리 비서실장
1969년 서울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1972년 법사학회 회장
1980년 헌법개정시안 작성소위원회 위원장
1981년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 헌병사령관 이전의 "다나카 봉덕"의 경력과 활동은 아예 빠져 있는 셈이다. 1981년 한국법사학회에서는 70세를 맞이한 전봉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법사학연구} 6호를 고희기념논문집으로 꾸몄지만 여기에도 해방 후의 경력만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을 뿐, 일제 시기 친일경찰 경력은 빼놓았다.
그러면 전봉덕의 참된 모습은 무엇일까? 자신의 일제 시기 경력의 한 부분을 은폐하고 아예 잊어버리려고 한 전봉덕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또 어떤 부분이 자신의 경력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떳떳하지 못한 것인가?
일제강점기 친일관료로서의 첫발
1934년 4월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
1937년 3월 졸업, 4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입학
1939년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사법과 합격
1941년 2월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에 임명
일제 강점하에서 "실력":
행정 수행 능력만이 아니라 친일 능력, 곧 일본인 상전에 대해 얼마나 아첨하고 충성하느냐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
파격적인 승진:
보안과장은 주임관 가운데 도의 이사관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등문관 출신의 조선인 관료들에게 흔히 주어진 군수보다 한 등급 위의 자리. 당시 조선인들이 수습기간을 끝내고 나갔던 자리는 대개 군수였다.
조선인 친일경찰 다나카 봉덕
당시 경찰업무:
- 독립운동가의 검거, 각종 "범죄"즉결, 일본어 보급, 첩보수집 등 조선인의 일상생활에 감시억압하기
- 일제의 야만적인 정책은 군대와 함께 경찰력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당시 조선인 친일경찰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선봉에 서서 같은 동포들을 억압하고 감시하여 동족을 체포/고문/학살하는 악질적인 행위를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친일경찰은 민중들에게 원한에 사무친 저주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친일경찰이 된다는 것은 일제에 끝까지 충성하고 일제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대단한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였다.
1943년 9월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
수송보안과:
보안업무 이외에 화물 자동차 등 운송수단을 통제, 감독하면서 일제의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지원하던 곳. 따라서 일제의 침략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는 말기에 이르러서는 임무가 더욱 중요시되었다.
다나카(田中鳳德)로 창씨개명한 전봉덕은 경기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활동하다 뜻하지 않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당시 전봉덕은 일제 경찰의 직위로 경시까지 올라가 있었다. 당시 조선인 친일경찰 간부들로는
도 경찰부장(지금의 경무관) 1명
경시(지금의 총경) 21명
경부(지금의 경정) 105명
경부보(지금의 경감) 220명
따라서 해방 당시 전봉덕은 윤종화 황해도 경찰부장을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친일경찰에 속했던 셈이다.
해방후 미군정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 = 친일경찰에게 악몽 같은 날
해방 후 악질적인 친일경찰들은 민중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충북에서는 3명이 맞아죽기도 했다. 일제에 대한 충성과 동족을 괴롭힌 대가로 출세를 거듭한 고위 친일경찰들은 민중들의 지탄과 보복의 대상이 되어 도망 다니거나 숨어 지내야 했다.
1945년 9월 9일 미군 남한점령, 총독부인수
미군은 일제 때의 친일경찰들로 자리를 채워나갔고, 이에 따라 전봉덕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그대로 눌러 앉게 되었다.
1946년 10월 당시, 경찰간부의 80% 이상이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대거등용 이유:
- 첫째, 남한에 친미반공 국가를 세우려는 미군정이 있었고,
- 둘째, 국내에 민중적 지지 기반이 별로 없던 이승만 세력이 권력장악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친일경찰들은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 학살했기 때문에 독립운동 세력과는 원수지간이었다. 전봉덕은 일제와 투쟁해 온 민족세력이 정권을 잡을 경우, 자신의 민족반역행위를 심판, 처단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충성대상을 일제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으로 바꾸고 "빨갱이"를 때려잡는 "민주반공투사"로 변신하였다.
1946년 4월 미군정 경무부 공안과장
1947년 10월 경찰전문학교 부교장
또 전봉덕은 신익희(申翼熙)를 도와 국민대학 창설에 관여하고 대학에서 법학통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반민특위를 피해 군대로 튀다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 제정
많은 친일파들이 당시 "성역"으로 간주되던 군대, 특히 헌병대로 도망쳐 들어갔다. 친일경찰들의 도피에는 이승만과 신성모 국방장관 등이 도움을 주었다. 전봉덕도 예외는 아니어서 군대로 도망쳤고,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것을 모면한다.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장교반 입학, 12월 육군 소령임관
1949년 3월 육군 중령, 헌병 부사령관
헌병대는 악질적인 친일경찰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반민특위에서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에게
"군이 친일 부역배들의 도피처가 될 수 있오?"
라고 항의했지만, 끝내 군내의 친일경찰들은 건드리지 못하였다.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
절호의 앙갚음 기회:
친일경찰들이 중심이 되어 반민특위 활동에 열심이던 소장파 의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구속한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진 것이다.
헌병사령부는 특별수사본부를 만들고, 전봉덕은 헌병 사령관 장흥을 제치고 수사본부장이 되어 수사를 진행했다. 구속된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헌병사령부에서 죽사발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T_T 사건은 눈엣 가시같은 국회 소장파 의원들을 제거하려는 이승만의 의도대로 조작되었고, 전봉덕은 이승만의 충실한 충복으로 눈에 들게 된 것이다.
김구 암살사건을 맡아서.
1949년 6월 26일 낮 1시, 백범 김구, 안두희에게 암살됨.
- 전봉덕, 경교장에 나가 직접 사건의 수습을 지휘
- 경찰로부터 안두희를 강제로 빼내 사령부로 호송, 극진한 치료, 보호
- 경무대 이승만에게 사건 보고
- 이승만, 전봉덕을 헌병사령관에 임명, 수사를 지휘하게 함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이승만이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고 사건을 원만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전봉덕같이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충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봉덕도 이러한 이승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헌병사령관으로서 전혀 수사도 해보지 않고 첫 공식발표를 통해
"배후는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범행인 것 같다 :P"
고 하였고, 김구 계열의 한독당원들이 격렬히 항의하자, 그는
"언동에 주의해서 법망에 걸리지 말라"
는 협박조의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전봉덕은 그 뒤 사건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배후를 은폐하는 데 주력하면서 수사를 끝냈다. 전봉덕은 이러한 공로 때문에 이승만의 충복으로서 다시 한 번 인정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도 사건 배후에 깊이 개입돼 있다는 의혹을 떨쳐 내지 못하였다.
전봉덕페이지 처음으로
그후 화려한 경력으로
김구 암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서인지, 전봉덕은 헌병사령관을 끝으로 군에서 물러났다. 그후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50년 예편,국무총리 비서실장
1954년 재향군인회 서울지회장
1956년 서울시 교육위원회 법률고문
1960년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1961년 고등고시 시험위원, 혁명재판사 편찬위원회 위원, 서울시 시정자문위원회 위원장
1962년 법제처 법제조사위원회 위원, 대한교육연합회 법률고문
1969년 서울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1970년 국제변호사회 상무위원
1973년 한국법사학회를 창설, 회장취임
1975년 국제관광공사 법률고문
1976년 대한적십사사 서울지사장
1978년 한국법학원 원장
1980년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부위원장
1981년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
198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전봉덕은 1992년 4월 잠시 귀국했다가 국내에서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다시 거론되자 서둘러 출국했다.
전봉덕이 변신과 출세의 과정에서 보여 주는 화려하고 다양한 경력은 한편으로는 해방 후 친일경찰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가 해결되지 못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봉덕의 삶과 경력은 우리 사회의 시대적 흐름을 거부하는 반민족적, 반민중적 역사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글: 김무용(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朝鮮總督府, {官報}.
德力新一郞, {朝鮮總督府警察官署職員錄}, 朝鮮受驗硏究社, 1938.
한국법사학회, {법사학연구} 6호,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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