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2003 (08-2)---충렬공 墓碣(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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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08 05:23 조회1,745회 댓글0건본문
여름캠프2003 (08-2)---충렬공 墓碣(墓碑)
충렬공 묘 앞에서 올려다 보면서 우측에는 비면이 마모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옛 묘비가 서 있고, 좌측에는 새로 세운 묘비가 서 있습니다.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우측의 옛 묘비는 1602년 ★이시발 撰, ★조우인 書로 세운 충렬공 묘갈인 듯하고 좌측의 묘비는 1966년 ★김사옥 書로 사촌, 소산, 오은공 후손들이 우측의 옛 묘갈문을 옯겨 적으면서 세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학공파보 내용을 보면 1602년 이시발이 세운 묘비 이전에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2/09/17 15:43 (from:211.114.248.253) 조회 : 25
충렬공 묘소 발견 시기는?
1. 인용 문헌 출전 : 안동김씨 제학공 파보 13P. 충렬공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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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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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김씨 족보
충렬공 묘갈 (1602, 대구도호부사 ★이시발 찬, ★조우인 서)
---묘는 예안 치서 지례촌에 있으며
■ 안동의성 성지순례 후기 (태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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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준식 안동시 문화원장 특별강연
③충렬공 묘비석은 임란 직후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임란 10년쯤 후가 아닐까 생
각한다.
■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1/08 07:31 (from:211.57.153.114) 조회 : 63
충렬공 묘역참배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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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묘갈)을 보니 1602년 이시발 撰, 조우인 書로 세웠던 충렬공 묘갈을 그대로 옮겨서 단기 4299년 병인에 (서기 1966) 오은공 (안렴사공) 18대손 思玉 書, 사촌 소산 오은공 후손일동이 개수한 것으로 되어 있고, 앞면 관직명을 보니 "상락君개국공"으로 씌어있다.
■ 碧梧遺稿(벽오유고)
奎 15711
★李時發(1569~1626)의 遺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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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山郡守墓誌, 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륵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羅烈女傳, 花山洪使君同榜會序, 祭李玉小文(以下 1), 宋史詳節跋이 있다.
■ 작성자 :솔내영환 작성일 : 2003/01/14 09:52 (from:211.105.92.228) 조회 : 82
충렬공묘지문(이시발 지음)번역
벽오유고에서 발견한 충렬공 묘지문에 대한 번역
유림학당 국회씨의 번역
高麗 宣忠協謀 靖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上洛 忠烈公 金方慶 墓誌
(고려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락 충렬공 김방경 묘지)
安東之金, 系出新羅敬順王.
안동 김씨는, 가계가 신라 경순왕에게서 나왔다.
公爲十五世孫. 生麗代. 仕高元忠烈朝. 勳業茂著. 轟갈(1)古今. 載在國史及行狀. 斑斑可攷. *(1=車+葛)
공(충렬공 김방경)은 15세손이 되는데, 고려시대에 나서, 고려 충렬왕대에 벼슬하여, 공업이
무성하게 드러나 고금에 크게 떨쳤으니, 행적이 국사(고려사)와 행장에 있어, 또렷하게 살필 수 있다.
姑撮其表表者言之 則忠直信厚. 得於天性. 制行也勤儉寡默. 立朝也竭忠奉國. 至於行師有律. 戰克攻取. 珍島之役. 日本之征. 此其大較也.
잠시 그 뚜렷한 것만을 모아 말한다면, 곧 충직하고 신후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니, 행동을 절제함에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묵하였으며, 조정에서 복무할 때에는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었고, 군사일에 나아감에 이르러서는 법도가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얻었으니, 진도의 싸움과 일본의 정벌 등 이것이 그 대략이다.
厥後內外苗裔趾美석(2)赫. 三百年于玆. 豈非所謂德厚者流光歟. 墓在禮安縣治西陵洞. 神道有麗王命立碑. (*2=潟-삼수변=신 석, 까치작, )
그 뒤로 안팎으로 후손들이 종적이 아름답고 크게 빛나기를 지금까지 300년이니, 어찌 이른 바 덕이 깊은 사람이 끼친 후광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현 관내 서릉동에 있고, 신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움이 있었다(고 하나)
世久無徵. 姓孫禮生曾監此縣. 竪碣爲標. 今幷與此碣而破折. 嗚呼. 後之人何以知公之墓乎.
세대가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인 ★예생(禮生)이 일찍이 이 현(예안현)을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고 표식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 비석과 더불어 깨져 버렸다. 아! 뒷사람이 어떻게 (충렬)공의 묘임을 알 수 있겠는가?
參奉金坼生員金坪. 以外裔居墓下. 與姓孫參奉慶達 在近諸孫. 謀易他石以新之. 且加封植. 來語余. 余於公. 爲母姓十三代孫. 嘗拜公之墓. 爲之助其資. 仍識其梗槪云.
참봉 ★김탁과 생원 ★김평등 여러 후예가 묘 아래에서 거쳐하였는데, 후손 참봉 ★경달(慶達)과 가까이 사는 여러 후손들과 함께 다른 돌로 바꿔서 새롭게 하기를 꾀하고, 장차 이를 북돋아 세우고자 하여, 찾아와 내게 말하였다. 나는 (충렬)공에 대하여, 어머니의 성(외가)으로 13대 후손이 되니, 일찍이 공의 묘소에 참배하였고, 비석을 세우는 데 재물을 도왔으니, 이 때문에 그 대강을 알게 되었다.
嘉善大夫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大丘府 都護府使 巡察使 李某志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부 도호부사 순찰사 이모(李時發)가 기록한다.
풀어쓴이;김국회(익원공파, 유림학당)
옮긴이:김영환(문온공파)
■디지털한국학
★이시발(李時發)
1569(선조 2)∼1626(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아버지는 진사 대건(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도(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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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 《주변록 籌邊錄》·《벽오유교》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안렴사공(휘사렴)의 6대손인 병천 입향조 김공언 공의 둘째 아들인 김도의 외손자이다. 김도의 따님은 경주이씨 이대건에 출가하여 이시발 등을 낳았다.
아버지는 진사 대건(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도(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때에 충렬공 墓誌를 보고 기록하여 벽오유고에 실리게 되었고, 또한 충렬공 묘갈(묘비)도 세움
♠ 이시발(1569-1626) ---김도의 외손자
○공언의 2자 김도의 외손자 (이대건-)이시발은 경주이씨로 1602년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직시 출렬공(휘방경)의 묘갈을 건립하였고, 그의 유고집인 벽오유고에 충렬공 墓誌가 수록되어 있으며, 김도의 사위 이대건(李大建,) 이시발의 손자 이인혁(李寅爀)은 오창 송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김공언---2/4김도---따님(+이대건)---이시발
★조우인(曺友仁)
1561(명종 16)∼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이96齋). 경상도 예천출생. 우부승지 계형(繼衡)의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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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로는 문집 《이재집》과 가사집 《이재영언》이 있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 괴산 증평 남하리 금반부락 내력비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 공의 후손들이 이 부락에서 조선조 초기부터 살아온 안동김씨 세거지이고 타성도 같이 살고 있으며 인물이 많이 난 고장이다.
-----생략-----
청안향교 전교와 유도회장을 한 ★김사옥씨,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재원 -
▣ 김윤식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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