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2003 (08-5)---한강 정구의 충렬공 祭文(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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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08 05:31 조회1,560회 댓글0건본문
여름캠프2003 (08-5)---한강 정구의 충렬공 祭文(제문)
충렬공 祭文 --- 문영공(김순)의 외손자 설헌 정포의 후손인 한강 정구 찬
■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9/07 00:11 (from:211.114.248.22) 조회 : 73
충렬공에대한 제문
외선조(外先祖) 김 충렬공(金 忠烈公)의 무덤에 제문
삼가 고합니다. 부군(府君)의 위대하고 거룩한 공은 역사에 빛나서 우리나라의 후세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흠모하는데, 더구나 부군의 외손인 우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은 부군의 손녀로서 우리 청하군 부군(淸河君府君 ★정책(鄭責)에게
시집와서 설헌(雪軒 ★정오(鄭오)과 설곡(雪谷 ★정포(鄭言+甫) 두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 두 선생은 문장이며 기풍과 절개가 백대를 풍미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곡선생의 후손으로 마침 안동부사로 재직하면서 부군의 봉분을 찾아 참배 함으로써 평소에 흠모하는 정성을 바치려고 생각 하였으나 그 소원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병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정사신(鄭士信)은 설곡 선생의 후손으로 대대로 본 고을에서 살아온 자인데, 지금 그를 보내 대신 제물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는 진정 조상의 한 기운을 나눠 받아 피차간의 차이는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제가 몸소 참여하지 못하기에 마치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처럼 유감 스럽습니다. 선영을 멀리 우러러볼 제슬픈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존령께서는 이 정성을 굽어살펴 강림 하소서.
한강집에서 옮김
■ 디지털한국학
★정구(鄭逑){3}
시대 조선
생몰년 1543-1620(중종38-광해군12)
본관 청주(淸州)
자 도가(道可)
호 한강(寒岡)
시호 문목(文穆)
활동분야 문신, 학자
다른 이름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겨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 이듬해 상경하여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생략-----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의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의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정사신(鄭士信){1}
1558(명종 13)∼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부(子孚), 호는 매창(梅窓) 또는 신곡(神谷).
두(枓)의 아들이며, 현감 사성(士誠)의 아우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저작·박사·감찰·정언·예안현감·병조정랑·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전적·예조정랑·수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지평으로서 왕을 따라 평양으로 피난중 반송정(盤松亭)에서 이탈하였다 하여 삭직당하였다.
그뒤 강원도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많은 왜적을 무찌른 공으로 1594년 경상도도사, 1595년 선산군수가 되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선계변무(璿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원종(光國原從)의 훈(勳)에 책록되고, 장례원판결사·밀양부사 겸 경상도중도방어사에 이르렀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저서로는 《매창집》이 있다.
■ 안동김씨 홈페이지
● 대종회 연혁
---1970
1월 26일 忠烈公 齋室 垈地 2필지 438평을 매입하였다. ★好振氏께서 대지 매입비로 參拾萬원을 찬조하였다.
11월 7일에는 忠烈公 齋室을 단기간내에 완공하고 忠烈公 享祀와 아울러 400여명이 참석하여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齋室의 규모는 正門行廊 一棟 約五間과 坍墻 74.5m, 廚舍 一棟 五間을 신축하였는데 貳百萬원이 소요되었다.
---1979
忠烈公 位土畓 730坪을 당시 가격 90萬원에 매입하고
---1982
5月 2日 忠烈公 影幀閣을 八百六萬六千六百원을 들여 新築하였으며
---1984
陵洞 忠烈公 齋室 管理舍(산직이 집)를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都評議公派 ★昌信局長의 집이 헐리게 되어 이 집을 기증받아 현지로 이송하여 건축비 一千二百四十一萬六千원을 들여 十月七日 완공하였다.
---1990
7月23日 忠烈公 묘소가 四百餘年間 ★光山金氏 종산에 모셔져 있어 ★泰亨 會長께서 ★崙會氏와 같이 安東에 내려가 都評議公派 ★冕鎬씨를 만나 光山金氏 종회장을 尋訪하여 祿田面 九松洞 산19番地 忠烈公墓域 二百九十九坪을 讓渡키로 합의하여 우리 산으로 확보하였다.
또한 우리는 光山金氏 문중에 고맙다는 뜻으로 金一千萬원을 희사하였다. 7月 23日 묘역 확장 축대 및 계단 축조 공사를 二千七百五十萬원을 들여 동시에 착공하여 단기간내 훌륭히 완공하니 數 百餘年의 통한을 풀게 되었다. 이에 ★泰亨會長의 공로가 지대하였다
---1993
四月에 陵洞 齋室 管理舍를 一千一百四十二萬二千원을 들여 보수하였고
---1995
陵洞 位土畓 경지정리사업을 一百七十萬원을 들여 하였으며
陵洞 齋室 寢具(담요) 60枚를 보충하는데 一百萬원
---1996
3月28日 개인명의로 된 위토 四匹地를 특별조치법으로 대종회 명의로 등기 이전하였다.
位土畓은 二十八萬원을 들여 정리 작업하였고,
---1998
陵洞 齋室 上樑門을 木刻 현판에 조각하여 게시하는데 一百四十八萬三千원이 所要되었다.
■ 대종회보 제73호 (2001. 7)
●충렬공묘소 題下 임야 영정각부지등기필
영정각 부지와 충렬공묘소 제하 림을 ★광산김씨와 합의 양수키로 한후 안동시 녹전면 죽송동 330번지 대와 동리 19번지 림에 대하여 분할측량을 5월 4일 필하고 등기수속을 밟어 7월 5일 안동김씨대종회 명의로 등기를 완료하였다.
⊙등기된 내용
①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30-1 대 458㎡(약 150평)
②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19-1 임야 2,833㎡(약 936평)
▣ 김태서 - 정리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 김항용 -
▣ 김항용 - 고생하십니다. 감사합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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