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2003 (09-3)---충렬공의 만년행적3 (충렬왕과 충선왕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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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09 06:51 조회1,610회 댓글0건본문
여름캠프2003 (09-3)---충렬공의 만년행적3 (충렬왕과 충선왕의 사이에서)
■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4/01 18:24 (from:211.57.153.114) 조회 : 30
말년의 충렬공 할아버지 08 --- 석사학위논문03 (1993.8, 류선영)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1993.8, 류선영, 전남대)
이러한 두 차례에 걸친 김방경 무고사건은 김방경의 권력성장과 관련되었다. 당시 김방경의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막강하였다.
---이때 방경은 중찬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 일을 맡은 외에도 또 호두금부를 받고 원수가 되니 권세가 온 나라를 좌우하고, 그의 전답과 장원이 없는 데가 없었으며, 부하 장사들은 날마다 그의 문에 모여 들고 세력에 붙어 위엄을 빙자하는 자가 중앙과 지방에 횡행하였지만 금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19, 충렬왕3년12월)---
그는 국내적으로 최고직인 첨의중찬에 올랐고, 원으로부터는 호두금패를 받은 원수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막강한 권력장악에 대해 반대세력의 견제가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김방경 무고사건은 크게 보면 원 공주의 거령구나 응방 관계자, 그리고 내료배 등 원실이나 왕실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기존 세력을 제거하려는 모의로 이해된다.
이와 더불어 이 사건에는 김방경의 세력이 그 만큼 커진 데 대한 충렬왕의 견제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은 홍다구가 문초하여 김방경이 몇 차례 숨이 졌다 깨어 났을 때 홍다구의 권유를 받아 들여 김방경에게 죄를 자복하더라도 천자가 사실을 밝혀 죽이지는 않을테니 자복하여 고통을 면하기를 권했다.
이에 대해 김방경은 "주상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은 군인 출신으로 직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몸이 죽어 없어질지라도 나라에 다 보답할 수 없사온데, 어찌 한 몸을 아끼어 없는 죄를 자복해서 사직을 저버리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또 진상을 밝히기 위해 김방경 부자와 위득유,노진의 등이 원에 끌려갈 때, 충렬왕은 중서성에 글을 올려 위득유 등을 위해 변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방경의 세력장악에 대한 충렬왕의 일정한 견제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고 대상자 모두가 삼별초 토벌, 일본정벌 출정자 등 군사적 실력자였던 것은 군사적 실력자들을 견제하려는 고려 내부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무고가 풀림으로써 김방경은 복직되어 첨의중찬상장군판감찰사사가 되었고, 또 세자사를 겸하게 되었다. 김방경의 복직으로 홍다구와 연결된 밀직부사 이분희, 지신사 이습 등은 귀양보내져 죽게 되었다.
이어 1279년 그는 충렬왕의 폐행으로 알려진 안렴사 권의를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한 죄를 들어 탄핵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1차 일본원정 이후 논공행상의 불공평이 지적되는 등 문제가 일어나자 곧 사직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는 세 차례나 사직을 원하였으나 충렬왕은 원의 일본정벌에 그가 있어야 됨을 이유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방경은 마침내 앞에서 살핀 것처럼 신정 하례사로 원에 갔고 원제에게 일본정벌의 명을 받았던 것이다.
1281년 제2차 일본정벌로 실패하였다. 이후 김방경은 조인규의 참소를 받았다. 조인규는 왕이 행차할 때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예를 취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들어 김방경을 참소하였고, 이에 김방경은 순마소에 갇혔던 것이다. 이후 김방경은 곧 풀려났지만 그는 다시 사직을 원하였고 마침내 1283년(충렬왕9) 72세의 나이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고, 또 1295년 그가 첨의령, 상락군개국공으로 봉해지고 세자의 청으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하사되었다.
1299년 조비무고사건 때는 궁궐에 나아가 조비를 옹호하는 등 개입을 했고, "퇴임 후에도 항상 나라 일을 걱정했다" 고 한 것처럼, 그는 치사한 후에도 일정하게 정사에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충렬왕과 충선와의 왕위분쟁으로 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이때 그는 조비를 변호하는 등 충렬왕에 대립하여 충선왕의 편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1300년(충렬와26) 89세로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가 예장으로 치러지지 못했던 것은 그나 그의 아들 흔이 충선왕에 협조함으로써 충렬왕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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