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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7[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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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14 20:23 조회1,5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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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7[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2



2) 달전-구즉-당곡-내판으로 이거한 익원공파

濟의 동생 ●색은 효성이 지극하여 감사의 천거로 김천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차자인 ●석광(碩光)의 아들 ●항(恒, 익원공의 10세손)은 용양위부호군을 지냈는데, 그가 연기 금남면 달전리(김학골)로 이거하여 이후 후손들이 대덕 구즉 녹동리 일대에 세거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의 묘소와 묘비가 달전리에 있는데, 묘비에 의하면 그는 당시 뭇 선비들이 부귀와 영화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고 궁벽한 시골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벗삼아 즐겼다고 한다. (박노국 찬, 김충회 서, 1972년 건립)



恒의 자손들은 이후 달전리에서 4-5대를 살다가 다시 연기 당곡으로 이거하였는데, 그같은 사정은 恒의 현손이자 익원공의 14세손인 ●원(員, 1652-1706)의 묘소가 당곡에 있고, 그의 아들 ●聖述의 묘소가 연기 德峴에 있는 것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김원은 그의 묘비에 의하면 자를 대형, 호를 춘강이라 하였고 벼슬은 용양위부호군이다. 문명이 당세에 널리 알려졌으나 불운하여 누차 과거에 낙방하였는데 공의 재기를 애석하게 여긴 ★金錫胄(1634-1684)의 천거로 박탁되어 관로에 들어갔던 것으로 적고 있다. (김태봉 지, 김충회 서, 1966년)

★김석주는 대동법으로 유명한 영의정 김육의 손자이며, 병조판서 김좌명의 아들이다. 본관은 청풍, 호는 식암(息庵)으로 1662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좌랑, 정언, 지평, 교리 등을 역임하고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漢黨20)에 가담하여 당시 집권하고 있던 山黨에게 중용되지 못하였다.

---20) 山黨과 漢黨 :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주도하게 된 서인은 반정공신파와 관망파로 갈라졌는데, 전자를 功西 또는 勳西라 하며 후자를 淸西라 한다. 이와같이 분파된 서인은 다시 공서는 老西, 청서는 少西로 갈라졌다.

인조말년에는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산당이 조직되고 한강 이북에 거주하고 중앙정계와 유대를 맺으면서 또 왕실과도 인척관계를 가지는 권력지향적인 한당이 성립되었는데, 이 당의 수령은 ★김육 ★김석주이었다. 또 ★원두표의 原黨과 ●김자점의 洛黨이 분파되어 서인은 산당 한당과 함께 4분파의 형세가 되었다.

효종때에 들어와 송시열이 다시 정계에 등장하면서 스승 ★김장생의 제자를 중심으로 서인을 재규합하여 새로운 조직체를 이루었다. 이들 통합된 서인은 다시 노 소론으로 분파되어 남 북인과 더불어 사색의 정쟁이 전개되었다.





1674년 복제문제로 남인과 서인간에 예송이 발생하였을 때 그는 ★송시열과 ★김수항 등 산당을 숙청하고 도승지로 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정치가 남인의 세력중심으로 강화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인과 제휴하여 남인을 축출하는데 기여하므로 ★송시열과 다시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그러나 남인의 축출방법에 문제가 있다 하여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반감을 샀고, 이것이 노 소 분당의 한 빌미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처럼 ●김원이 당시 숙종때 당론과 관련되어 매우 주요한 위치에 있었던 ★김석주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던 것으로 미루어 그도 김석주와 같은 입장에 서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집안에 대대로 구전되는 바로는 員이 금남면 달전에 세거하던 창령성씨 가문의 세도에 밀려 너더리 상판으로 이거하였다고 전해 진다. 아마도 그같은 구전이 사실이라면 그 시기는 ★김석주에게 발탁되기 이전일 가능성이 크고 관계에 진출한 이후에는 그가 노론계와 긴밀한 관계였으므로 성씨들과 대립하지 않았을 것이고, 세도에 밀리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員은 聖述, 雲述, 鳳述, 榮述의 4아들을 두었으며 이들이 대대로 내판에 세주하면서 일족을 번성시켰다. ●성술의 가계에서는 5세손인 ●김漢宗(족보이름 道默, 1868-1948)이 충무위부사용과 장사랑도사를 역임하는 데, 그의 노력으로 1884년 충훈부로부터 연기에 거주하는 안동김씨에 대한 면세 면역을 증빙하는 완문을 발급받고 있다.

이 충훈부 완문은 장사랑도사 김한종에게 내려준 것으로 그 내용을 보면 충청도 연기에 사는 인조때의 진무공신 東原군 ●김光의 자손들은 국가로부터 면세와 면역의 특혜를 주어 왔는데 근래에 들어 외방 고을 관리들이 법을 무시하고 침탈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이를 금할 것을 엄명하는 일종의 증빙 문서이다. 당시의 문서는 후손인 ●泰富가 소장하고 있다.



한편 내판2리 마을 중앙에는 이 가계에서 배출한 효자 ●김百悅의 정려문이 있다. 김백열(족보이름 基悅 : 1816-1868)은 익원공의 17세손으로 그는 1816년 내판에서 ●김熙仲의 2자로 태어났다. 5세때 부친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매일같이 병환을 지켜보고 간호하여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 효성이 어찌나 지극하였던지 어느날 신선이 나타나 곶감이 아버님의 병에 특효라고 알려주어 다음날 이를 구하여 드시게 하니 과연 며칠만에 병환이 완쾌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알려지자 하늘에서 낸 효자라고 칭송하였으며 사후 20여년만인 1890년(고종27) 나라에서 조봉대부 동몽교관의 벼슬을 내려주었고, 1913년에는 정문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김백열의 묘소는 당곡리에 있다.

이들 가계의 현대 인물로는 6세손 ●靈會의 4자 ●泰雄 ●泰麟 ●泰恒 ●泰均 형제가 모두 공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8세손 ●元植(泰敬의 자)도 동국대 교수를 역임했다.

鳳述의 가계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효자 김백열을 배출하였을 뿐만아니라 6세손 ●盛會(재요在堯 자)가 서울대학원을 졸업하고 공주교육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동생인 ●斗會가 대전시 건설과장을 지냈으며, 7세손인 ●泰福(時會의 자)은 충남교육위원회 행정사무관으로 옥조근정훈장을 수여 받았다. 한편 김한종의 손자인 ●悳會는 문중의 도유사로서 집안의 대소사와 위선사업에 물심양면으로 전심전력하고 정성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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