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6[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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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14 20:22 조회1,950회 댓글0건본문
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06[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1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5,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
P85
4. 익원공파
안동김씨 익원공파는 파조를 김士衡(1341-1407)으로 하는데 그는 김方慶의 현손으로 안렴사공파의 파조인 김士廉의 아우이다. 고려말 공양왕대에 삼사의 좌사와 도평의사사를 지냈고 고려말의 토지제도가 문란해지자 사전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성계의 조선개국에 적극 참여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졌고, 上洛伯의 작호와 1천호의 食邑18) 1천호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18)食邑은 국가에서 왕족 공신 봉작자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한 지역 또는 收租地 내지 收租戶를 일컫는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식읍이 존속하였다. 그러나 식읍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식읍제는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은 채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고 조선시대에도 한동안 유지되다가 세조 이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1398년에 정사공신에 올랐고, 1399년 우의정, 1401년 좌의정, 퇴임한 뒤에는 상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익원의 시호를 받았다.
익원공의 묘소와 신도비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고, 영정각이 경남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에 있다. 그의 부조묘는 원래 궁현에 있었으나 현재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로 옮겨졌다.
1) 궁현의 익원공파
이 익원공파에서 연기에 인연을 맺는 가계는 익원공의 6세손인 ●湄(함열현감)이 진주류씨가 세거하던 강서 궁현(고락동)으로 이거하면서 인연을 마련한다.
익원공의 5세손인 ●맹함은 음직으로 통례원 찬의를 지냈던 인물로 그의 부인은 청주한씨 韓明진(?-1454, 한명회의 아우)의 딸이었다. 장인인 ★한명진은 정난공신으로 서원군에 봉해졌고 병조판서에 증직된 인물이며, ★한명회의 아우이다. (묘비 이규헌 찬, 송완빈 서).
아마도 청주한씨와의 이같은 인연이 경기지역에 세거하던 이들 익원공의 가계가 청주지역으로 이거 정착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익원공파의 청주 궁현-내판으로의 입향과정을 살펴보기 위하여 간략하게 도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맹함(孟喊)에게는 5자가 있었는데, 장자인 ●濠는 직장을 역임하였고, 차자인 ●湄(?-1528)는 함열현감을 지냈으며, 3자인 ●湜은 중종대에 사헌부지평과 장령을 역임하였다. 4자인 ●엄(淹)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역임하는 등 그의 자제들이 모두 관로에 진출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때는 마침 연산군 시기로 연산군이 혼정을 베풀자 처자인 ●湄(함열현감)는 처인 진주류씨의 친정이 있는 청주 서면 팔봉(고락동)으로, 3자인 ●湜은 사헌부의 장령으로 있으면서 반정후 권신들의 난정을 강하게 성토하고 사직한뒤 단양우씨
(우현손의 녀, ★우현손은 우공로의 아들로 1465년 급제하여 김해부사와 회령부사를 역임한뒤 호조참의와 형조참의를 거쳐 충청수사, 병사, 경상좌병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혼정에 벼슬을 버리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공주 탄천면 분토동에 은거하여 살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경당이라는 호가 생겼으며, 슬하에 3남1녀를 주었는데 ●김식은 그의 하나뿐인 사위였다. 그의 유허비가 탄천면 송학동에 있다)
의 터전이 있는 공주 탄천면 정치리로 각각 이거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 집안은 부여 저석리, 송간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결국 연산군의 난정이 익원공파의 연기지역 세거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익원공의 6세손인 ●湄(함열현감 : 함열에 송덕비가 있음)가 이 지역 입향조인 셈이다.
함열현감공의 묘소는 현재의 청주시 현암동 고락리에 있는데, ★박윤섭이 찬한 묘표에 의하면, 원래 이곳에 세워졌던 묘비가 400여 성상을 지나면서 풍우로 깎기고 절단되어 1988년에 새롭게 세웠다 하였다.
성품이 중후,관대하고 덕성이 남달라 언사와 행동이 예의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함열, 안음, 영춘 등지의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백성을 위하고 사랑함에 칭송이 거리에 가득찼으며 청렴결백하여 함열에는 去思碑(송덕비)가 건립될 정도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벼슬을 버리고 청주 서쪽의 궁현으로 은거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함열현감이 잡았던 터는 지금 궁현리 ●김정식씨의 집터라고 전해진다.
그러면 이제 좀더 자세하게 함열현감 ●湄가 이 지역에 터를 잡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湄의 부친인 ●孟喊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통례원의 찬의 벼슬을 하였고, 처가가 청주한씨였다. 그런데 미의 부인인 둘째 며느리는 진주유씨로 그녀의 아버지는 통례원 찬의를 역임한 ★柳岸秀(류안수)였다. 그가 이곳을 은거지로 택한 것은 이같은 인척관계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현재도 이 지역에서 류통찬으로 불려지는 유안수는 당시 대단한 재력가였고, 같은 통례원 찬의를 역임했던 ★맹함과는 막역한 사이였을 것이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사돈으로의 인연도 맺어졌을 것이다. 더구나 湄로 보면 처가가 있기도 하고 외가가 있는 청주 근방을 은거지로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진주유씨 유안수는 아들이 없어 외손들인 안동김씨와 한양조씨가 지금까지도 외손봉사를 하고 있으며, 그만큼 처음 입향 당시 처가인 유씨나 한양조씨들과는 아주 긴밀한 인척으로 한 집안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湄의 차자인 ●騏瑞는 전함사별좌를 역임하였고 그의 슬하에는 2남을 두었는데 장자가 濟이고 차자가 색(삼수변策)이었다. 이들 형제의 가계를 간략히 약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湄---騏瑞---濟---獻光---각(恪)---聲振---청주 궁현(고락동)
-----------색---1)繼光
--------------- 2)석광(碩光)---항(恒, 달전 이거)---聲哲(구즉 이거)---현(現)---德臣---원(員, 당곡 이거)---1)聖述---내판(너더리)
함열현감공의 장손인 ●濟는 사포서별제를 지냈고, 그의 증손인 ●聲振은 4세의 어린 나이에도 3년상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사위는 우암 송시열의 형인 ★송시희(宋時熹)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의 묘갈을 ★송시열이 지었다. 이 가계에서 한말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在衡(1890-1966)이 배출된다.
●김在衡은 1890년 궁현에서 ●김원묵의 4자로 출생하여 일제에 나라가 병합되자 민중계몽에 앞장서 1911년 신명의숙, 1914년 조치원에 정신의숙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매일신보 판매업에 종사하다가 기독교인이면서도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김재석, 조동식 등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 500여장을 문의, 미원 등지에 배부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다가 체포되어 2년 4개월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출옥후인 1922년에는 청원군 다락리의 이석영, 전병수 등과 합자하여 정명의숙을 설립, 육영사업에 힘썼다. 그런가하면 소작인 조합을 결성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고, 다락리 예수교회와 송룡리 육영의숙을 건립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계룡산 신도안에 三聖敎를 발족하고 후에는 檀君敎에 입교하였다.
이듬해 안동김씨 위선사업에도 전념하여 대동보를 완성하였고,
만년에는 은적산 정상에 檀君聖祖碑와 충혼비를 건립하고 전각을 건립하다가 1966년 서거하였다.
1977년에 독립유공자로 포장받았고, 1984년 묘 앞에 기적비가 건립되었으며 (김명회 찬, 조수형 서),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재형의 3남인 ●基會도 부친의 유업을 이어 찬의공 묘소 이장과 위토 매입, 익원공 재실을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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