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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공(김알지) 다시보기 01---김알지(金閼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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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7-20 22:08 조회1,5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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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공(김알지) 다시보기 01---김알지(金閼智)





다음달 여름캠프2003 일정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경주에서 1박하면서 직계선조가 되시는 왕릉5곳(원성왕릉, 신무왕릉, 계림, 내물왕릉, 문성왕릉)을 답사할까 궁리중에 있습니다.



포항에서 경주로 들어가면서 양동민속마을과 옥산서원(삼국사기와 해동명적 소장. 해동명적이라는 책에 김뉴 선조님의 필적이 모간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음)을 답사하고, 곧바로 불국사 아래쪽에 있는 괘릉(=원성왕릉)을 보고 올라가면서 신무왕릉, 계림과 내물왕릉, 미추왕릉과 숭혜전을 보고, 터미널 다리 건너 문성왕릉을 답사하는 코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윤식 종친님께서 소개해 주신 대보공과 신라김씨에 대한 자료를 잘 보았습니다. 이 기회에 대보공(김알지) 할아버지와 그 이전의 선계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 디지털한국학

김알지(金閼智)

65(탈해이사금 9)∼? 신라인으로 경주김씨의 시조.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이사금 9년에 왕이 금성(金城)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우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니, 황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이 궤에서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보고 돌아와 왕께 고하니 왕이 친히 가서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수려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탈해왕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씨로 하였으며, 성장함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알지’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도 알지설화가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삼국사기》와 약간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은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박·석 양씨보다 먼저 경주지역에 정착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뒤에 그 비중이 커지게 된 김씨부족이 그들의 토템인 닭과 그들의 조상을 연결하여 이같은 설화를 탄생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알지’라는 명칭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삼국유사》에서는 그것이 ‘아기’라는 뜻이라고 했으며,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를 따르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Ar’부족, 즉 ‘금(金)’부족의 족장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알지의 아들은 ★세한(勢漢, 또는 熱漢)이며, 그뒤의 계보는 ★아도(阿都)―★수류(首留, 혹은 水留)―★욱보(郁甫, 또는 郁部)―★구도(俱道, 또는 仇刀)로 이어지며 구도의 아들은 김씨로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다. 미추이사금은 알지의 7세손이 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金哲埈, 歷史學報 17·18合輯, 1962;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新羅上古世系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1954). 〈李炯佑〉











▣ 김정중 - 반갑습니다 제가 지금 경주에 숙소(8월5일)를 백방으로 알아 보고 있습니다. 콘도등등...도움 주실 분 안계시는지......

▣ 김항용 -

▣ 김태서 -

▣ 김윤식 -

▣ 김윤만 -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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