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대보공(김알지) 다시보기 02---삼국사기(1145년)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7-20 22:11 조회1,627회 댓글0건

본문



대보공(김알지) 다시보기 02---삼국사기(1145년)



1) 삼국사기는

김부식(개경파-신라계) 일파의 묘청(서경파-고구려계)의 난 진압이후 1145년 고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인의 편사관에 의하여 편찬된 역사서입니다.



이 책은 당시의 개경파(신라계)인 고려인종등 왕실과 김부식의 주도하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신라역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반대파인 서경파(고구려계)의 고구려와 그 이전 고조선의 역사는 소략되어 있으며, 단군신화는 아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 이 문제는 연재하면서 계속 거론하고 검토해 나갈 예정입니다.



이 책은 이들 편찬자의 독단적인 서술이 아니라, 《고기 古記》, 《삼한고기 三韓古記》, 《신라고사 新羅古史》, 《구삼국사 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 高僧傳》, 《화랑세기 花郎世記》, 《계림잡전 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 三國志》, 《후한서 後漢書》, 《진서 晋書》, 《위서 魏書》, 《송서 宋書》, 《남북사 南北史》, 《신당서 新唐書》, 《구당서 舊唐書》 및 《자치통감 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2) 삼국사기의 대보공(김알지)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본기에는 탈해이사금(57-80) 조에 대보공(김알지) 탄생설화가 나오고, 미추이사금(262-284) 조에 대보공부터 7세손 미추까지 세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유신의 비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와 신라는 같은 성씨였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현재의 김해김씨와 범신라김씨는 같은 성씨로서 (?기원전 2500경 중국 고대의 황제인) 헌원의 후예요 소호김천씨의 후예라는 기록이 됩니다.

⇒⇒⇒ 이 내용도 앞으로 연재하면서 계속 검토할 사항입니다.









1. 삼국사기의 대보공(김알지) 기록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 80

신라 제4대왕

재위 57∼80



9년(서기 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알지(閼智)라 이름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이름으로 삼았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 掛樹枝 白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 姓金氏 改始林名林 因以爲國號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284

신라 제13대왕

재위 262∼284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미추(味鄒)를] 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味鄒尼師今立 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 出於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







삼국사기 권제41 (열전 제1) 김유신/출생(595)

■김유신(金庾信) 상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유신의 비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와 신라는 같은 성씨였다.-----



金庾信 上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BC 69∼ AD 4

건국시조

재위 BC 57∼AD4



38년(서기전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 4)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

▶ 4) 三國史節要 ·鑄字本 「寢」. 榮 ·「寢」







▣ 김정중 -

▣ 김항용 -

▣ 김태서 -

▣ 김윤식 -

▣ 김발용 -

▣ 솔내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