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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⑪ (진천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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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0-27 20:23 조회2,1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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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공파 ⑪ (진천군지)



충북 진천군에서 발간한 [진천군지] 등 향토자료에 게재되어 있는 안렴사공 김사렴의 후손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김린 (金隣)



<진천향토지 (1992, 진천상산고적회)>



안동김씨는 420여년 전에 김린(金隣)이 진천읍 장관리에 내주하였다.



○ 監察 金 의 後裔 (감찰 김린의 후예)

고려충신 안렴사 김사렴의 6대손(*증손의 오기) 縣監(현감) 김린이 진천읍 장관리로 래주한 이래 사백여년 자손들이 군내 수백호 살고 있다. 김린의 증손 金孝騫(김효건)은 임진왜란때 執綱(집강)으로 倡義率民(창의솔민)하고 捕賊多級(포적다급)하여 증좌천성하였다.



○ 또 제학공파로 진천군의회의원 金昌洙와 그 일족이 진천읍 교성리에 세거한다.





○ 一門四忠 金天章의 후예

안렴사 김사렴의 10대손인 김천장은 진천읍 사석리에 수대 세거하였으며 영조 술신 이인좌의 난에 형제자질이 일문사충하였다. 그 후손들이 우금 사석리에 세거하고 있다. 전 진천농고교사 金光默과 그제 법원판사 金良默(金良男)의 두 형제와 현충청북도의회의원 金慶會도 그 후손이다.



○ 괴산소수에서 김방경 18대손 俊建이 이백여년전 진천 이월 신월리 月村에 내주하여 군내 수십호 세거하는데 신월리 金海應은 그 孫이다.











<진천군지>

★김효건(金孝騫) : 士廉의 6대손 린의 증손

-김효건(金孝騫)이 이끈 진천의병의 활약

김적(金適) ⇒ 안렴사공파 (문과) 참조

★김정길(金廷佶) : 사렴의 후손

★김천장, 김천주, 김성옥, 김성추 (金天章, 金天柱, 金聲玉, 金聲秋) (? - 1728 영조4 ) : 사렴의 10세손, 11세손

★김영국(金榮國) (? - 1951) : 圭源의 장남

?선안동) ★김경익, 김경직 (金景益, 金景稷)과 누이 임황(任滉)의 처 : 본관은 안동

★김상환(金相煥) : 사렴의 13대손

★김기선(金基先) : 사렴의 후손







▣ 김효건 (金孝騫)



<진천군지, 1994>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의 義兵, 고려조의 충신 안렴사 金士廉의 6대손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592년 (선조25) 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의 세로 북상하여 올라왔다. 왜군의 3진을 맡은 黑田長政의 군은 경남 창원을 거쳐 4월 25일에는 성주에 이르고 김천을 거쳐서 추풍령을 넘어서 영동, 옥천, 청주를 지나 진천을 거쳐서 죽산을 지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때 왜군이 진천으로 들어오니 현감 洪趾는 內浦로 피난 도만하고 경내에는 지휘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 執綱 즉 鄕約所 또는 鄕廳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던 김효건은 진천현 안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山谷間 (지금의 태락리에서 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차단하고 복병을 대기시키고 있다가 고개를 넘어오는 왜병을 급히 몰아치니 상당수의 적이 포살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뒤에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문헌 상산지 진천군지







○ 김효건(金孝騫)이 이끈 진천의병의 활약



<진천군지, 1994>



김효건은 안동인으로 진천현감의 휘하에 執綱 (鄕約所 또는 鄕廳의 책임자로 현감의 자문역할을 함) 이었다.



왜군의 제3진인 黑田長政 軍은 경남 창원을 통해 성주, 김천을 지나 영동, 옥천, 청주를 점령하고 진천으로 쳐들어 왔다.



이때 진천현감인 洪趾는 內浦로 도망하여 지휘할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집강 김효건이 의병을 모집하여 지금의 台洛里에서 院洞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을 매복하고 있다가 적병을 급습하여 타격을 주는 등 활약하였다.



그는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김정길 (金廷佶)



<충청북도인물지 (1987)>



본관은 안동이요, 안렴사 김사렴의 후손이다.

1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밤낮없이 울고 있으니 적장이 "그대는 어찌 우는가"하고 물으니, 그는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에 맺혀 울고 있다"고 답하였다.



적장이 또 "너는 글을 배웠느냐?"고 물으니, 그는 "어찌 글을 배우지 않았겠느냐"고 답하였다. 왜장은 그에게 시를 지어 보라고 하였다. 그는 즉시

童子年將十有二 동자연장십유이

一朝庵作別, +宣  일조암작별?위

可憐夜夜思親夢 가련야야사친몽

長向吾家枕上飛 장향오가침상비 라고 지었다. 글의 뜻은



"저의 나이는 12살인데

하루 아침에 부모님을 작별하게 되었구나

가련하다 밤마다 부모를 생각하는 꿈을 꾸니

그 꿈은 멀리 나의 집으로 날아가 부모님 머리맡에 있노라" 이다.



적장은 이 시를 보고 그 효성에 감동하여 석방하였다.



그는 적장에게 말하기를 "만약 다른 일본 군사를 만나면 부모님을 뵈옵기가 어렵겠으니 다른 일본 병사들이 나를 잡지 말라는 표를 하여 달라" 고 하였다.



적장은 그의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으면서 "훌륭하도다. 표를 하여 달라는 말이여!" 하고 차고 있던 붉은 종이를 내주면서 다시 잡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끝내 그는 집에 돌아와 부모를 만나게 되었다.



그 뒤에 山東의 3개 면이 그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잘 지냈다.



문헌 진천군지, 내고장 전통가꾸기 (진천군편)











▣ 김천장, 김천주, 김성옥, 김성추 (金天章, 金天柱, 金聲玉, 金聲秋) ( ? - 1728 영조4 )



<진천군지, 1994>



조선후기 영조때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義擧殉節한 충신으로 진천군 문백면 사석리에 있는 4충문 旌閭에 倂旌되고 있다.



김천장과 김천주는 형제로서 안렴사 김사렴의 10세손이며, 김성옥은 김천장의 아들이고, 김성추는 김천주의 아들이니 형제이며 부자간으로 사석리에서 누대를 세거하여 왔다. 본관은 안동이다.



1728년 (영조4)에 청주에서 이인좌가 밀풍군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청주를 점령한 후 반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가늘 길에 진천 지방에 다다랐다. 반군이 밀려오자 진천현감은 아무런 군비도 갖추지 못했으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니 반군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懸衙를 점령하고는 역도 이지경을 현감에 임명하고 진천 북방을 수비케 하고 서울을 향하여 안성, 죽산 방면으로 북상하여 갔다. 이지경은 현감을 자칭하고 지방 청년들을 잡아다가 반군에 편입케 하고 군량미 명목으로 재산과 곡식을 마구 빼앗아 들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김천장, 김천주 형제는 아들과 조카가 되는 김성옥과 김성추를 불러놓고 "나라의 형세가 위기에 처했으니 일반 백성이라도 분발하여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忠義가 혁혁한 김씨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비록 국록은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런 때에 앉아만 있겠느냐" 고 말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인솔하고는 현아로 처들어갔다. 당황한 이지경은 뒷 內衙로 피신하고 역졸들은 달려나와 일대 접전을 벌였다. 김천장은 진두에서 큰 소리로 "역적의 괴수놈은 나오너라, 내 너의 목을 베리라" 고 외쳤다. 김천장은 용전분투하며 닥치는대로 적을 후려쳐 수명을 참살하는 동안 각 집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던 역도들이 몰려들어 矢石을 퍼부어댔다.



이때 김천장은 안부에 관통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싸우다가 쓰러졌다. 그의 아들 김성옥과 조카인 김성추는 김천장이 쓰러진 것을 보고 적군을 막아 싸우며 달려들어가 호위하며 衙門 밖으로 나와 퇴각하였다. 김천주와 성추 성옥등도 반군과 싸우다가 안면이 깨지는등 크게 다쳐 동지와 家童들에게 업혀 집까지 돌아왔으나 김천주와 성추 부자는 그날 밤에 숨지고 성옥은 3일 후에 죽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이들의 의거순절한 사실에 조정에 알려지자 김천장에게는 좌승지를 증직하고 旌閭를 명하는 동시에 祭需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의 아들 김성옥에게는 원종공신에 장사랑을 증직하였으며, 김천주 김성추 부자에게도 각각 증직하고 復戶를 명하였다.



1885년 (고종22)에 김천주와 김성옥, 김성추에게도 김천장의 정례에 倂旌케 하였으므로 이후 4충문이라 칭하였다. 이들이 인솔한 義軍들은 무기가 없어 칼, 도끼, 괭이, 쇠스랑을 들고 적소를 습격하였다고 하여 속칭 "쇠스랑 忠臣"이라고도 한다.



문헌 진천군지







▣ 안동김씨사충문



<진천군청 http://www.chinchon.chungbuk.kr/>



- 지 정 : 비지정문화재

- 위 치 :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

- 관리자 : 김영달(金永達)

- 수 량 : 1동

- 규 모 : 2평

- 재 료 : 맞배지붕 목조기와집

- 시 대 : 조선(朝鮮) 영조(英祖) 12년(1736)



이 정문은 충신 가선대부(嘉善大夫) 김천주(金天柱)와 그의 아우 천장(天章), 아들 성추(聲秋), 조카 성옥(聲玉) 등 4명의 일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가 난(亂)을 일으켜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켰을 때 이지경(李之景)이 이 자칭 진천현감(鎭川縣監)이 되어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때 사석리(士石里) 여사(如沙)마을에 거주하던 김천주(金天柱), 천장(天章)형제가 자질(子姪) 성추(聲秋) 성옥(聲玉) 과 함께 의거할 뜻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무기도 없이 농기구인 괭이·쇠스랑등을 메고 진천현을 탈환하기 위하여 습격하였으나 중과부적

(衆寡不敵)으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국왕은 정문을 내리고 향제(享祭)케 하였으며, 그 뒤 그의 자질(子姪)인 성추 성옥도 고종(高宗) 22년(1885)에 병정(倂旌)케 하므로써 사충문(四忠門)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들이 싸울 때 쇠스랑으로 용전(勇戰)했다하여 속칭 [쇠스랑]충신이라고도 한다. 이 정문은 맛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그 규모는 2평 정도로 되어 있으며 1958년에 개축(改築) 하였다.



※ 자료: [文化財調書] [文化遺蹟總攬]p. 548











▣ 김경익,김경직 (金景益, 金景稷)과 누이 임황(任滉)의 처



<진천군지, 1994>



본관은 안동이다. 이 3남매는 어머니가 병환에 손가락의 피를 드려서 소생하게 하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경직 내외가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다.



營門에서 3남매의 지극한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김경익 등이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三孝里라 명명하였다. 3남매가 모두 鄕薦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그들의 효성을 칭찬한다.



문헌 진천군지











▣ 김상환 (金相煥)



<진천군지, 1994>



효자로 본관은 안동, 안렴사 김사렴의 13대손이다.

부모의 병환에 변을 맛보며, 단지수혈로 극진히 섬긴 효자로 營邑에 여러번 알렸다.

문헌 상산지, 진천군지











▣ 김기선 (金基先)



<진천군지, 1994>



본관은 안동이며 김사렴의 후손이다. (15대손) 어릴 때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80세로 실명하였는데 앉을 수 있는 수레를 만들어 매일 어머니를 태워 모시고 다녔다. 또 천신에 기도하며 빌어서 오래도록 살았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여모를 살았다. 성묘할 때마다 많은 절을 하여 무릎이 닿는 곳에 상처가 생겼다.



군내 유림들이 글을 올리어 감사의 표창을 받았다.

문헌 진천군지











▣ 金榮國 (? - 1951)



<진천군지, 1994>



군인, 본관은 안동, 金圭源의 장남으로 진천읍 사석리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에 참전하고 1951년 중대장(중위)으로 금화지구 734고지를 사수하다 전사, 대위로 추서되고 미국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문헌 진천군지







○ 군신 金榮國 대위



<진천군 내고장전통가꾸기>



진천읍 사석리 여사부락 뒷산

6.25때 금화지구 734고지 탈환의 신화를 남긴 군신 김영국 대위의 자랄 때의 모습이다.



김영국 대위는 진천읍 사석리 723번지에서 안동김씨 김규원의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6월 6일 김영국 중위의 탁월한 작전능력과 용맹이 인정되어 금화고지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금화지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734고지는 일명 김일성 고지라고도 하는데 탈환하는 편에서 작전상 매우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 국군이나 북괴군이 서로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 70명의 소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700여명의 북괴군을 섬멸하였던 것은 김영국 중위의 용감하고 지혜로운 작전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국군은 3개사단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군수물자와 무기를 노획하였던 것이다.





그후 김대위는 한국군 창설이래 최고의 무훈을 세우고, 미국 대통령이 보내온 영예의 은성훈장을, 맥아더원수가 김대위의 부친께 전달하였으며, 정부에서는 화랑무공훈장과 6.25사변 종군기장을 수여하였고 유우엔에서는 국제연합을 옹호한 공으로 훈장을 보내왔다.



고 김영국 대위의 묘는 진천읍 금암리 앞산에 있다.



소속 제2사단은 김영국 대위의 출신 사단이다. 제2사단에서는 지금도 김영국 대위를 군신으로 추대하여 그의 얼을 군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자료 : 진천군지











<상산인맥지>

★안동김씨

★효건(孝騫) : 린의 증손

★상립(尙立) : 린의 후손

★천주(天柱) : 린의 5세손

★천장(天章) : 린의 5세손

★성추(聲秋) : 린의 6세손

★성옥(聲玉) : 린의 6세손

적(適) : 린의 자, 문과에 장원급제

★정길(廷佶) : 린의 후손

★상환(相煥) : 린의 7세손

★기선(基先) : 린의 후손

★경익(景益) : 기제 경직과 기매 임황지처 3남매는 린의 후손

★극상(克商) : 린의 후손, 숙종조 무과 부장

★세장(世章) : 린의 후손, 숙종조 무과

★린( ) : 안렴사의 후손, 문종조 생원 현감

(문온공파) 익문(益文) 子均의 자, 사마방 洗馬 진천현감







▣ 안동김씨



<상산인맥지>

신라의 태보 휘알지를 위시하여 38왕위를 계승한 경순왕의 4남인 휘은열을 시조로 하고 있은데, 전고대방에는 휘일긍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와전이다.



이 지방에는 제학공파,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정의공파, 개성윤공파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그중 안렴사공파 후예가 대부분이다.



이에 래주한 연대순으로 기록하자면 고려조의 충신 안렴사 휘사렴의 6대손(*증손의 오기) 감찰 휘린이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로 래주하여 사백여년 그 자손이 세거한 이래 많은 충효가 계출하여 번연하고 있다.



또한 시조의 8세손 상락부원군 충렬공 휘방경의 5세손인 제학공 휘익달의 15세손 휘俊健이 근 이백년 전에 진천군 이월면 신월리로 래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이외에도 타파의 후손이 산거하고 있다.







▣ 孝騫(효건)



<상산인맥지>

린의 증손, 선조조 임진왜란에 집강으로 창의솔민하고 포적다급하니 그 공으로 증좌천성하다.







▣ 尙立(상립)



<상산인맥지>

린의 후손 인묘조 정묘호란에 사절하다.







▣ 天柱(천주)



<상산인맥지>

린의 5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척?대적하여 ?적순절하니 양무공신으로 책록되고 사충문에 정려하다. 증가선대부 예조참판







▣ 天章(천장)



<상산인맥지>

린의 5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척?대적하여 ?적순절하니 양무공신으로 책록되고 사충문에 정려하다.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년참찬관하고 가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하다.







▣ 聲秋(성추)



<상산인맥지>

린의 6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죽창과 웅장으로 대항하니 사충문에 정려되고 증장사랑하다.







▣ 聲玉(성옥)



<상산인맥지>

린의 6세손, 영조조 이인좌란에 죽창과 웅장으로 대항하니 사충문에 정려되고 증장사랑하다.







▣ 適(적)



<상산인맥지>

린의 자, 호우천이니 광해조 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조정랑을 역임한 문장가이다.







▣ 廷佶(정길)



<상산인맥지>

린의 후손, 12세에

---(중략)---

어린이의 지혜와 효심으로 부모는 물론 山東3面이 역뢰기덕하여 무사안저하였다.







▣ 相煥(상환)



<상산인맥지>

린의 7세손, 친병에 ??단지한 효자이다. 사림이 계달영읍하다.







▣ 基先(기선)

<상산인맥지>

린의 후손,

---(생략)---







▣ 景益(경익)



<상산인맥지>

기제 경직과 기매 임황지처 3남매는 린의 후손이다.

---(생략)---







▣ 克商(극상)



<상산인맥지>

린의 후손, 숙종조 무과 부장







▣ 世章(세장)



<상산인맥지>

린의 후손, 숙종조 무과







▣  (린)



<상산인맥지>

안렴사의 후손, 문종조 생원 현감







(문온공파) ㅇ 益文(익문)



<상산인맥지>

子均의 자, 사마방 洗馬 진천현감











<상산문화>

김적(金適) 안렴사 사렴의 7대손

★김상립(金尙立) 인묘조에 무과

★김극상(金克商) 안렴사 사렴의 10세손. 강희병진에 무과

★김세장(金世章) 숙묘조에 무과

★김린(金 ) 문묘조에 중생원, 안렴사 사렴의 증







▣ 金適(김적)



<상산문화>

안동인 안렴사 사렴의 7대손이라. 萬曆庚戌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이조정랑이었다.

혼조를 당하여 건의하되 대의를 밝히고 정론을 넓히며 從長善處하라고 말하여 權奸臣을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輿地에 말하기를 江亭이 고을 서쪽 5리에 있고 주인 정랑 김적이 文翰의 사람에 지나고 지조가 굳고 확실하여 혼조를 당해서 명리를 사양하였다. 호는 牛川이다.







▣ 金尙立(김상립)



<상산문화>

안동인이라. 인묘조에 무과에 올라 정묘에 충절을 지켜 죽다.







▣ 金克商(김극상)



<상산문화>

안동인 안렴사 사렴의 10세손이다. 강희병진에 무과에 올라 부장을 지냈다.







▣ 金世章(김세장)



<상산문화>

안동인이라. 숙묘조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 金 (김린)



<상산문화>

안동인이라. 문묘조에 중생원 벼슬은 현감을 지내니 안렴사 사렴의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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