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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169)임시정부시절 백범김구의 은신처탐방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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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08-27 18:38 조회1,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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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시절백범金九의 은신처탐방기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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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내용
1)金九와 한인 애국단
2)중국인들의 金九사랑
3)야간도주 가능토록 도와줘
4)金九의 생명을 구해준 저부인 / 성남市 모란 상인들의 성금으로…
 
 



 



3)야간도주 가능토록 도와줘




나는 그날 밤 인사말에서 『본인도 50여년 전 중국 호남성에서 유격대원으로서 항일전에 참가한



사람이다』고 했다. 모두는 박수를 치면서 동지로서의 축배를 내게 권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대륙유격대원이라면 최고로 여겨준다. 다음날 이번 여행목적지인 金九 은신처에 간다고 생각하니



흥분됐는지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흥市 도착 이틀째(2000년 12월10일). 나는 드디어 64년 前 金九가 상해에서 도망쳐



이곳에 와서(1932년 5월 하순) 숨어살던 비밀가옥 앞에 섰다.



기흥시 매만가 76의 4번지. 金九가 은신했던 2층 방문에 「대한민국 金九선생 항일시기 피난처」



라는 간판이 단정하게 붙어있었다. 네 칸 정도 크기의 이층방. 벽에는 金九사진과 나란히 이곳을



피난처로 알선해준 당시 절강성장의 사진도 걸려있다. 그런데 실지로 이집 주인은 저씨가 아니라



저씨의 수양아들 진동손씨다. 바로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강물은 호수인지 하천인지 구별할 수



없었으나, 나를 안내하는 신문사 문화부장 하찬생은 『저 물위에 작은 배를 띄워놓고, 주애보는



밤새 기다렸다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일본스파이를 피해 낮이면 金九는 주애보가 노를 젓는 배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피신했으므로, 밤이면 숙소로 돌아왔는데, 만일의 경우 밤에 무슨 변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주애보는 숙소앞에 배를 대놓고 기다렸다』고 설명해준다. 이때 이 집을 관리하는



직원이 허리를 구부리더니 살짝 마루 한 쪽을 들어올리면서 날더러 밑을 보라고 했다. 과연 들어올린



 마루청 밑은 깜깜한데 하얀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아주 튼튼하게 만든 사다리였다. 즉, 밤중이라도 밖에 이상한 기색이 있으면, 金九는 마루청을



 열고 이 비상구를 통해서 주애보가 기다리고 있는 배를 타고 어디로든 도피할 수 있게끔 중국인들은



이웃나라의 혁명지도자를 이토록 세삼하게 보호했던 것이다. 다음날(12월11일) 아침 하찬생 문화부장



과 풍정곡 부주임의 안내로 나는 멀리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하이엔으로 갔다. 이곳에서 산을 하나



넘어가면 金九의 제2차 은신처가 있다기에 온 것이다. 가흥을 출발 이곳까지 오는 80분 간,



나는 50년 前에 보았던 정겨운 중국 농촌풍경을 볼 수 없어 섭섭했다. 야트막한 초가 앞 연못에는



물오리가 헤엄치고 노는 풍경은 중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하나의 향수였는데, 옛날과 같은



정겨운 초가는 없고 모두가 말쑥한 2층 기와집들 뿐이었다. 이 고장은 魚米의 고장(漁米之鄕)으로



부업의 수입도 좋아서 부자마을이라는 것이다. 집단농장제도가 폐지되고 이제는 모두 自營으로



성공한 것이다. 너무도 말쑥하고 위생적이어서 나는 미국 여류 작가 펄벅이 쓴 「大地」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파리가 없는 중국농촌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는 그 구절 말이다. 이곳은



市가 아니라 市보다는 좀더 시골인 현이다. 우리의 군과 같다. 일본 사람 이상으로 절도 있고 싹싹한



심여가 부현장과 보문달 주임 등 여러 간부들과 오찬을 하고 우리들은 金九 제2의 은신처로 떠났다.



 



 
 
臨政시절백범金九의 은신처탐방기 (4/4)




 
5)金九의 생명을 구해준 저부인 / 성남市 모란 상인들의 성금으로…



은신처로 가는 산길은 주위가 모두 다 밭(茶園)이고, 유난히 자갈이 많았다. 68년 前 金九가



넘어갔던 바로 그 산길이다.




당시 金九는 제1의 은신처를 냄새맡은 일본첩자들 때문에 위험해지자, 저보성의 장남인 저한추씨와



의논하여 이곳 해염으로 온 것이다. 해염에는 저항추씨의 처가가 있었는데, 이 지방에서는 제일가는



부자요, 제일가는 덕망가였다. 저한추씨는 자기 부인 주기여를 金九 부인으로 가장시켜 金九와



단둘이만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가흥을 떠난 두 사람이 이곳까지 오는데는 배를 타고 만 하루 걸렸다.



도착하던 날은 저한추씨 처가 즉 주가예의 친정집에 갔고, 다음날 金九는 지금 필자가 넘고 있는



이 자갈길을 저한추씨 부인과 하녀 세 사람이 넘어갔던 것이다. 그때의 심정을 金九는 「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씨 집에서 하루 밤을 묵고 기차를 타고 노리언에서 하차하여 산령까지 오륙 리를 걸었다.



저부인은 하이힐 구두를 신고 칠팔월의 염천에 친정 하녀에게 나의 식료와 각종 물품을 들려 가지고,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고개를 넘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활동사진 기구라도 있다면



내 일행의 이 행보를 찍어서 영구적인 기념으로 만세자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일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부인의 용감과 친절을 우리 자손이나



동포들이 그 누군들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랴.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글로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성남市 모란 상인들의 성금으로…



 



산꼭대기에 저부인 친정에서 지어놓은(이 일대는 모두 저부인 부친의 땅이다) 영안정이란 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金九와 저씨 부인이 도망자의 신분을 잠시 잊고 역사의 노곤함으로부터 해방의



공간으로 삼았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그러나 그들이 휴식의 달콤함을 느끼기에는 폐허의 스산함이



너무 컸다. 우리의 망각만큼이나 기왓장은 무너져 내렸고 주변의 풍광도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역사의 고리를 연결할 수있는 작은 단서 하나라도 부풀리고 확대해석하여



가꾸고 다듬기를 과시하는데 비하여 비록 문화상품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멀리



있다하여 100년도 안 된 귀중한 역사의 유적이 이렇게 방치되어서야 되겠는가. 이것만이라도 우리



손으로 복원해 韓中 간의 친선을 돈독히 하고, 金九 선생의 뜻을 알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답답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걷기 시작하여 얼마 동안을 갔더니 산중턱에 양옥 한 채가 보였다.



저부인의 친정아버지의 여름별장이었다. 즉 金九가 기식하던 피난처인데 지금도 그 때 金九가 쓰던



침대가 보관되어 있다. 이 사적은 그 동안 우리정부의 무관심 속에 그대로 방치되었지만 중국 정부는



 1996년 10월10일 가흥시와 하이엔에 있는 金九 선생의 피신처를 「지방역사유적지」로 지정,



기념행사와 더불어 金九 선생의 항일투쟁을 기리고 있다. 金九 선생의 피난처에는 「대한민국



金九 선생 항일시기 피난처(大韓民國 金九先生 抗日時期 避難處)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당시 기념식에 한국에서는 金信씨 이외에는 한 사람도 참석치 못했다. 이를 두고 중국인들 사이에 『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데 金九 선생이 한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아닌가보다』라는 말이 나왔으며, 이 소식은 나의 가슴에 못이 되었다.



고국에 다시 돌아와 나는 영안정 보수비용을 마련하는 데 여러 분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성남市 모란상인회의 헌신적이고 감동적인 노력이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재래상인 5일장을



돌며 생계를 꾸려 가는 바쁘고 빠듯한 일상 속에서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직접 상인회의



기금을 내기도 하고 바자회를 조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성남市도 기꺼이 동참하여 작년



11월에는 14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기금을 가흥시에 보수기금으로 전달하게 되었다. 드디어 지난



4월5일에는 영안정 중건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하이엔 현장등 현지의 관리 시민 성남의



시장 등이 함께한 이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현장에서 역사로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 白凡의



뜻을 마주하는 벅찬 감동에 목이 메었다. 역사와 단절된 개인이나 국가의 천박함은 미적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가 됨을 다시 깊이 느낀다.●



 



 
 




▣ 김주회 -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은신처 탐방!!!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이규태의 <신 열하일기>를 읽고 있는데, 요동에서 북경을 잇는 사신이 가던 길, 척약재 선조님 유허지, 백범 김구 선생 유적지 등을 답사하는 기회가 오기를 빌어 봅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눈물겨운 이야깁니다. 주회 대부님 그렇지요, 언젠가 꼭 손 잡고 가 보자고요.
▣ 김윤만 - 척약재 할아버지 유배길과 김구 선생님 임정 피난지는 일치하는 곳이 많을 것 같습니다.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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