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1---오근음지파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8-30 01:40 조회1,665회 댓글0건본문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19---비안송곡파
♣♣♣13 비안송곡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4자 휘繼雄(계웅) 후손을 庇安松谷派(비안송곡파)라 한다. 후손이 비안 송곡 (현 경북 의성)에 세거하였고, 현재 단양 어상천 방북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繼雄(계웅)은 묘가 예천 동오 두산에 있고, 그의 아들 麗生(여생)은 묘가 비안 송곡에 있으며, 萬鍾(만종)은 수 호군을 지내고, 鼎三(정삼)은 부호군을 지내고 묘는 오두산에 있다.
-----세거지 답사후 보완계획임-----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0---반탄파
♣♣♣14 반탄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2자 현령공 휘土+遲
께서 문의현령으로 그 4자 군자감정공 휘公衍(공연)의 5자 증참판공 휘繼英(계영) 후손을 )盤灘派(반탄파)라 호칭하고 있다. 후손이 반탄 (현재의 진천군 초평면 연곡리 소두머니마을)에 세거하였고, 연기 동면 갈산리에도 세거하고 있다.
繼英(계영)은 묘가 청원 오창 수소동에 있고, 龜瑞(귀서)는 묘가 진천 초평 반탄에 있으며, 志和(지화)는 진사이고, 榮基(영기)1938-는 지도소장을, 榮做(영주)1938-는 육군대위, 국방부 통신과장을, 鎭國(진국)1928-은 호蓮塘(연당)으로 대종회이사, 육군소령, 평통자문위원, 군자감정공(=공연)파종회장 등 종사에 헌신해 왔다.
-----세거지 답사후 보완계획임-----
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1---오근음지파
♣♣♣15 오근음지파♣♣♣
○안렴사공(사렴)--- (약)---遇周(우주)---丸(환)---宗孫(종손)---3자 신창현감공 휘 (게) 후손으로 梧根陰地派(오근음지파) 신창공파라 한다. 감찰공(종손) 2자 현령공 휘土+遲는 문의현령으로 그 2자 승지공 휘公藝(공예)께서는 숙부 신창현감공 휘 (게)에게로 입양하였다. 후손들이 목령 하사동, 오창 괴정리 입동, 오창 동성리 동성저수지 등지와 진천 상일송리, 이월 노은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문과급제 2명(공예, 복원), 무과급제 5명(영, 충립, 태영, 호명, 호원)이 있으며, 언희는 임진난에 오창 목령산에서 순절하였고, 사우(=시묵)는 간재 전우 문하이고,
○<김공예 묘갈>은 성세창 찬, 김로 서, 정운학 서 개립하였고, <김홍립 만사>는 일사 이공 찬이고, <?김복원 간찰>은 전남도립 옥과미술관 소장하고 있고, <김복원 묘갈>은 전우 찬이며, <김복원 신도비>는 민병승 찬, 서봉 김사달 서이고, <김형집 묘갈>은 김준영 명이고, <김준영 묘갈>은 박노중 찬이며, <김호영 행장>은 김시묵 찬이고, <김필영 행장>은 박노중 찬이며, <김사우=김시묵 묘갈>은 오창 주성리에 있는데 오정환 찬, 김영회 서이다.
○<김재신처 청주한씨 효열비>는 노장우 찬, 서봉 김사달 서로 오창면 창리 엄나무랭이 마을에 있으며, <김덕회 효자비> 비는 오창에 있으며, <김성회 송덕비>는 진천 이월면 송림리에 이정운 서로 세웠다.
○복원은 ?간찰(전남도립 옥과미술관 소장)이 전하고, 형집은 조삼재체용도, 호영은 찬유행1권 급질의문답, 명회는 각성 비문 찬술 수십편, 사우=시묵는 유고7권(사장2, 성리설문답3, 경증1, 비문1) =용암유고(김세기 서)가 있고, 복원, 형집은 암행어사 김명진 흠찬한 바 있다.
○忠立(충립)은 무과급제하여 만호를 지내고 묘 진천동정이며, 彦禧(언희)는 임진난에 목령산에서 왜적을 살해하고 순절하였으며, 호영은 時默찬 행장이 있고, 유행1권 급 질의문답을 찬하였으며, 弼榮(필영)은 호梧村으로 묘는 인곡에 있으며 誌가 전하고 문학으로 이름이 있으며, 외예손 창암 朴魯重찬 행장이 있다. 好俊(호준)은 묘는 인곡에 있으며, 誌자 전하고 효우로 세상이 이름이 있다. 亨道(형도)는 영, 서림(=광기파)와 더불어 남공철에게 안렴사공 신도비명을 부탁하였고,
○승지공 사손가계(昇默-在新-斗會-泰一1934-允植1954-容寬1984)는 오창 복현2구에 세거하고 있고, 斗會(두회)는 지방의회의원, 송천서원 간사, 오은공종친회 간사로 종사에 헌신하였고, 泰瑾(태근)1933-은 연세대졸, 국민은행 지점장을 역임하였으며, 相會(상회)1924-는 제일은행지점장을 지내고 , 文詞가 있었으며, 英會(영회)는 호牧菴으로 한말한학자로 문사가 있으며, 용암유고 발이 있다.
○泰元(태원)1937-은 기미대동보편찬위원, 오은공세보편찬수단위원 등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潤會(相德)는 호忍齋로 송천서원 이지복설 향유추천 성균전학2대 향교장의6대 역임하는 등 종사와 유림에 헌신하였다. 明會(명회)는 호雙淸으로 문사가 있어 각성비문 찬술 수십편에 이른다.
○泰成(태성)1937-은 충북대교수, 이학박사이며, 泰億(태억)1947-은 한국은행, 君會(군회)1936-는 전북체신청장을 역임하였고, 秉默(병묵)은 호悟晩(오만)으로 우애목독하고 선어시율하였다.
○在一(재일)1926-은 호梧山으로 농협부장 대종회이사 문영공종회부회장 안렴종회사무국장 송천서원총무 무진보편찬등 종사에 헌신하였고, 청렴결백하였다. 泰助(태조)1941-는 대한항공에 근무
○崙會(윤회)1915-는 호陽村으로 진천경찰서장 대종회상임부회장 1968대종회창립 충렬공재실건립 신도비 유허비각 세계연감(*국중도 소장)발간 안동김씨회관 건립등 종사에 헌신하였으며, 아들 泰東(태동)1941-은 미국 에루엘이오사끼 지배인, 泰慶(태경)1953-은 목사이며
○永會의 아들 泰周(태주)1944-는 청주대학교에, 泰喆(태철)1947-은 충남대교수, 泰洪(태홍)1950-은 한서식품, 泰晩(태만)1953-은 포항제철에 근무하고 있다.
○在識(재식)1922-은 신창공(=게)파종회장, 무진보편찬 등 종사에 헌신하였고, 斗會1925-는 군수를 역임하였다.
■ 양지리(陽地里)
안동김씨재실 : 산수골에 안동김씨 재실이 있다. 이 가운데 산소동에 있는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1485-1537)의 묘갈은 조선중종34년(1539)에 처음 세웠던 것을 1915년에 다시 세운 것이고
■ 양청리
현재 양칭이와 回岩마을로 이루어진 양청1리와 時才마을로 이루어진 양청2리로 분구되어 있으며 시재마을은 時才, 耆在, 詩才라 일컬어졌다. 양칭이 마을에는 문화류씨가 많이 살고, 시재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어 각각 집성촌을 이룬다.
김재봉 법무사, 김윤회 진천경찰서장, 김재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김인회 청원군 산림과장, 김운회 대한항공 파리지부장, 주성여행사, 김영회 청주전매청 주임, 김성묵 오창의용소방대 대장, 김재학 오창농협 부장, 김재창 서울은행 대전지점 차장 등은 이곳 출신이다. <오창지>
○ 김게(金 )
공은 현감 지의 아우인데, 음직으로 신창현감에 이르렀다. 묘 오근목령산이며 상하봉으로 묘갈(후손 참봉 秉默찬 묘갈 在哲서)이 있다. <오창지>
63) 金公藝(김공예, 1485-1537)
◇ 김공예 <1956 안동김씨보감>
승지공의 휘는 公藝요 자는 中雅니 판교공 丸의 증손이니 숙부 현감공 (계)에게 出系하니라. 공이 孝友하고 篤學하여 癸酉에 문과를 하니 甲戌에 현감공의 상을 당하고 복계(服門+癸)하고 壬午에 親老로써 괴주목사로 보직함을 乞求하고 甲午에 직제학으로 수찬관에 止하니 內憂를 당하여 侍墓중 丙申에 內外喪을 連遭하여 居廬(거려)하여 哀毁(애훼)하니 丁酉년에 졸하니라. 성돈재는 묘갈을 지으시고 同宗 동고는 서하니라
◇ 김공예 <오창지>
공은 안렴사의 7세손인 현감 (계)의 아들이다.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과 양사(사헌부와 사간원), 춘방(세자시강원), 전한, 직제학, 지제교를 역임하고 승정원의 동부승지와 예조참의에 이르렀는데, 청백함으로 스스로 지켰다.
연달아 부모상을 만나 여묘를 살며 지나치게 훼손하여 상중에 별세하였는데, 임종할 때에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함이 없고 오직 말씀하기를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내 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국가의 은혜를 받았는데
털끝만큼도 보답하지 못하니,
이것이 마음 아프다" 하였다.
묘갈문을 동재 성세창이 짓고 동고 김로가 썼는데 그 명문에 이르기를
"후왕의 후손이요, 덕과 경사를 쌓았네.
정기 모여 우리 공을 낳아 문벌이 다시 혁혁하네" 하였다.
■ 金公藝 墓碣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 (1485-1637)의 묘갈은 조선 중종34년(1539)에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산소동에 우참찬 成世昌이 지은 비문을 홍문관 부수찬 金魯(=서운관정공파 김희수의 아들)가 써서 세웠는데 1915에 다시 세웠다.<청원의인풍(1991.2., 청주문화원)>
♠ 이문건
양아록의 저자 이문건 3대는 (이윤탁-이문건-이온) 안동김씨와 매우 밀접하다.
(이문건의 부) 이윤탁의 처모(장모)가 안동김씨이고 *정확히 누구의 따님인지 미확인
이문건의 배위는 안동김씨 敦伊로 (제학공파) 김언묵의 따님임. 즉 이문건은 김석의 매부이고, 김충갑 김효갑 김우갑 김제갑 김인갑의 고모부임
이온의 배위 경주김씨 鐘金은 (안렴사공파) 김공예의 누이인 안동김씨의 따님임. 즉 이온의 처모(장모)가 안동김씨이고, 처 외삼촌이 김공예이고, 처 외조부는 현령공 김지임
■ 조선왕조실록 기록 : 김공예 (1485-1537)
1 건... 중종 9년 (1514)
5 건... 중종 13년 (1518)
1 건... 중종 14년 (1519)
8 건... 중종 15년 (1520)
5 건... 중종 16년 (1521)
2 건... 중종 20년 (1525)
2 건... 중종 22년 (1527)
5 건... 중종 23년 (1528)
4 건... 중종 24년 (1529)
17 건... 중종 25년 (1530)
3 건... 중종 26년 (1531)
2 건... 중종 28년 (1533)
4 건... 중종 29년 (1534)
---[중종실록 권62, 중종23년 8월 20일(기미)]
o 집의(執義) ★김공예(金公藝)가 추석때 청령위(淸寧尉) 옹주(翁主)가 문밖에 나갔다 돌아올적에 <여주>보재원(普濟院)에 머물렀는데, 한천위(漢川尉)와 안양군(安陽君) 부인이 호종(扈從)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이 외람된 짓을 하였으므로 추고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름.
---[중종실록 권68, 중종25년 5월 16일(을사)]
o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김공예(金公藝)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경기감사로 제수하여 백성을 구제하려 하였으나 사간원(司諫院)의 의논이 있어 개정 하였으므로 해로울 것이 없다고 전교함. <京畿道安金史資料集>
○ 김점(金點) (1514-1547)
공은 참의 공예의 아들인데, 음직으로 벼슬하여 참봉 충무위 부사과, 병절교위에 이르렀다. <오창지>
○ 김영(金瑛)
안렴사공 9대손 김영(王+英)은 참봉 奉點의 손자이고, 언정(彦禎)의 아들로 선조30년정유에 무과에 급제하고 판관을 지냈다 <오창지>, <안동김씨족보 등과방목>
64) 김홍립(金弘立, 1599-?1634)
공은 직제학 공예의 현손인데, 의표가 웅장하고 준수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인조 갑자년(1624)에 공산으로 호종하여 호위한 공으로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637) 동궁을 모시고 심양으로부터 돌아와 병으로 죽으니, 일사 이공(=?)은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제학공파 김번, 도평의공파 김회)
"서쪽 변방의 풍진이 아직 가라앉지 못했으니,
장한 혼 응당 오고 갈 때가 있으리라" <오창지>
묘 진천 남파랑동이며, 유갈(후손 참봉 在悳 찬)이 있다.
65) 김복원(金復元, 1729-1808)
자 정지(貞之) 호忍窩(인와)로 증조부(曾祖父) 김광수(金光粹), 조부(祖父) 김재문(金載文), 부(父) 김덕현(金德鉉)의 아들로 영조(英祖)41년(1765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7(丙科27)에 급제하였으며, 묘는 오근 입동에 있고, 석상, 誌, 신도비, 묘갈이 있다. 공은 효우독학하여 숙의 金明鎭 흠탄한 바 있고, 간재 田愚 찬 갈, 참판 단운 閔丙承찬 신도비문이 있다. <파보>
공은 직제학 공예의 7세손이다. 을유년 문과에 올라 이조의 정랑과 좌랑, 사헌부와 사간원, 병조참의를 지내고 벼슬이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러 삼대를 추증하였다. <오창지>
■金復元신도비
돈녕부동지사 忍窩(인와) 金復元(1729-1808)의 신도비는 1978년 청원군 오창면 괴정리 입동에 있는 그의 묘소 아래 세웠으며 비문은 고종20년 (1883)에 이조참판 閔丙承이 짓고 글씨는 1978년에 서봉 金思達이 썼다. <청원의인풍(1991.2., 청주문화원)>
■ 필적
?467 金復元 - 仁同현감으로 재임 중 饌需를 선물한 친지에게 보낸 감사의 답서 - 18C후기 - 560 <전남도립 옥과미술관>
66) 김형집 (金亨集, 1772- )
본관은 안동, 돈녕 김복원의 아들로 1772년(영조49)에 출생하였다. 효행이 탁이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삼재체용도(三才體用圖)를 만들었다 한다. 암행어사 김명진(金明鎭)이 흠찬한 바 있다. 아들인 명와 金駿榮 명 묘갈이 있다. <충청북도인물지 (1987)>
67) 김준영 (金準榮, 1793- )
본관은 안동이며, 형집의 아들로 1793년(정조17)에 출생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천성이 순효하여 엄동 친환에 죽순을 구하여 공친 주효하였으므로 향당이 그 지효를 칭찬하였다. 계인당(繼忍堂)이라 자호하였다. 창암 朴魯重찬 비갈이 있다 <충청북도인물지 (1987)>
68) 김사우(金思禹, 1857-1907) 일명 김시묵(金時默)
◇金思禹 <오창지>
한학자이며, 본관은 안동, 자는 仁父, 호는 勇菴,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 출생으로 金好壁의 맏아들이다. 艮齋(간재)의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향리에서 후학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용암집 3권이 있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에 있으며 1987년 吳鼎煥이 짓고 재종손 金英會가 세운 묘갈이 있다.
◇ 김시묵 (金時默) <충청북도인물지 (1987)>
조선말기의 학자로 호는 용암(勇菴), 돈녕 복원(復元)의 현손인데 전간제(田艮齊)의 고제로 성리학에 밝고 문장에 뛰어나며 효우독행이 출중하였다. 유고에 사장(祠章) 2권, 성리설문답(性理說問答) 3권, 경증(經證) 1권, 비문(碑文) 1권 등 7권이 전한다. 성리학에서는 선사 간재를 뛰어 넘는다고 한다. 문헌 청주시지
◇金思禹 <청주를 노래한 한시 淸州吟 (임동철, 청주문화원 1998)>
(1856-1907) 한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仁父, 호는 勇菴. 청원군 오창면 주성리 인곡마을 출생으로 金好壁의 맏아들이다. 艮齋(간재) 田遇(전우)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향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勇菴遺稿] 3권이 있다.
♠전우(田愚) 1841-1922(헌종7-?)
본관 담양(潭陽) 자 자명(子明) 호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다른 이름 전경륜(田慶倫)/전경길(田慶吉)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정동·삼청동·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는데, 이때부터 ★임헌회(任憲晦)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임헌회를 직접 ▲아산의 신양(新陽)으로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전의·▲연기·▲진천·▲상주·▲문천 등지에 따라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안자편 顔子篇》·《오현수언 五賢粹言》·《연원정종 淵源正宗》 등을 편찬하여 많은 학문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용암유고(勇庵遺稿)
조선말기의 학자 김사우(金思禹, 1857-1907)의 시문집. 7권 3책 활자본. 저자의 본관은 안동. 자는 인부(仁父), 호는 용암(勇庵). 아버지는 선공감역 호벽(好璧)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호준(浩準)의 딸이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체결 이후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효학(孝學)을 겸비한 학자로서 당시 학계에 명망이 높았다.
이책은 1984년 손자 덕회(德會), 명회(明會)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 모두 김세기(金世基)가 썼다.
권1-3은 서(書) 202편, 권4는 잡저 64편, 권5-6은 잡지(雜識)로 경설(經說) 7편, 권7은 서(序) 7편, 기(記) 3편, 명(銘) 1편, 발(跋) 1편, 제문 10편, 시 81수, 부록으로 행장, 행장발(行狀跋), 묘갈, 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書중 상간재선생 (上艮齋先生), 답전선생 (答田先生) 등은 대부분 학문에 관한 토론내용이다. 심성(心性)과 학문, 주기(主氣)와 허령심(虛靈心), 만물일체(萬物一體)와 이기(理氣), 체발(剃髮)과 의리(義理), 달덕(達德)과 이심(理心), 성사심제(性師心弟), 인심과 도심등 성리학 전반에 걸쳐 논의하고 있다.
사문문답(師門問答)은 지각과 마음, 각식(覺識)과 심지(心智), 지각과 성(性), 기정진(奇井鎭)의 견해 등을 다루고 있어 당시 전우학파(田愚學派)의 주기적 처지(主氣的 處地)를 살필 수 있다.
한편, 잡저의 명도식인편설(明道識仁篇說), 생지위성주설(生之謂性註說), 용력어인설(用力於仁說), 대학정심설(大學正心說), 달덕설(達德說), 취정록(就正錄) 등에서는 선현의 학설을 훈고(訓 )하여 이기의 문제를 다루었다.
추담별집부록(秋潭別集附錄)은 전우가 시의(時義)에 대하여 저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보낸 글들을 모은 것인데, 창의(倡義)와 도학(道學)의 문제를 논변한 내용으로 전우학파의 처세와 갈등을 고찰할 수 있다.
이밖에 잡지에서는 중용과 사서(四書)의 의의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시 유화양구곡운(遊華陽九曲韻), 덕산구곡(德山九曲), 십이난화(十二蘭畵), 십송화(十松畵) 등은 도학자의 심성수양을 의탁한 내용으로 주목된다. 전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용암유고 (국립중앙도서관, 전북대학교 도서관 소장)
1 勇菴遺稿. 1 - 3 金思禹 著 李邰雨 1984 古3648-10-458-1 - 3 고전운영실 고서
2 勇菴先生文集. 1 金思禹 著 景仁文化社 1999 kor 810.819-김532ㅇ-1 문학실 일반도서
5 勇菴先生文集. 2. 雪舟先生文集.. 1 金思禹 著 / 宋運會 著 景仁文化社 1999 kor 810.819-김532ㅇ-2 문학실 일반도서
天 目次 表紙 = 0 總目 = 1 序 = 5 卷之一書 = 7 卷之二書 = 109
地 257 目次 表紙 = 0 目錄 = 1 卷之三書 = 5 卷之四雜書 = 125
人 275 目次 表紙 = 0 目錄 = 1 卷之五雜識 = 5 卷之五經說 = 35 卷之六經說 = 103 卷之六四書問對 = 150 卷之七 = 209
■ 동림사에서 (金思禹)
청원군 옥산면 동림리의 상동림 마을에 있었던 古寺址
이 절은 곧 우리 선조이신 忍窩公(인와공 =金復元(1729-1808)) 께서 소시적에 일찍이 독서하던 곳인데 지금 두 세 사람의 동지와 더불어 이 곳에 머무르면서 학문을 강하니 대단히 감동하고 사모하여 인하여 본 바로써 시를 짓는다
桐林寺賦感
-寺卽我皇祖忍窩公少 ? 讀書處也 今與二三同志(木+妻)此講學極爲感慕因所視以賦之
瞻彼菴上松 첨피암상송
歲久枝盡(禾+ ) 세구지진 ?
獨帶舊日春 독대구일춘
恰如待我 흡여대아국
放策拾松子 방책습송자
子子深培植 자자심배식
我願雨露潤 아원우로윤
後猶今視昔 후유금시석
而我念皇祖 이아염황조
山空無往 산공무왕촉
推(周변)僕(玉변)當世志 ? ? 당세지
留與後人(亞+斤) 류여후인 ?
암자 위의 저 소나무를 보니
세월이 오래되어 나뭇가지가 다 뭉글어졌구나
홀로 옛날의 봄빛을 띠는 것이
꼭 나를 기다린 듯 하네
지팡이 내려 놓고 솔방울 줍는데
하나하나 깊이도 묻혀 있네
나의 바램은, 雨露가 윤택하여
오래도록 이 모습 남아 있기를
나의 선조를 생각하니
산은 공허하고 자취는 간 데 없네
세상의 뜻을 옥돌에 다듬어 놓고
후인에 주어 새기게 하리라 [勇菴遺稿] <청주를 노래한 한시 淸州吟 (임동철, 청주문화원 1998)>
○ 金在新의 처 청주한씨(1882-?) 효열비
청주한씨 효열비는 1976년 청원군 오창면 창리 엄나무랭이에 金在新의 처 청주한씨(1882-?)의 절효를 기리어 세운 비이다. 비문은 노장우가 짓고 글씨는 族叔(족숙)인 西峰 金思達이 써서 세웠다. <청원의 인풍>(1991, 청원문화원, 향토사료 제1집)
○ 김덕회(金德會) 효자비
德會1921-는 호紹齋로 표창이 있으며 아들 泰亨1940-과 손자 憲植1966-은 오창 양지리에 세거하고 있다.
---추후 보완---
69) 김성회(金星會, 1914-) 송덕비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
공의 이름은 星會 호는 和谷이며 안동김씨 안렴사공 20대손으로 서기 1914년 갑인 6월 26일 출생하시어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巨孺에 이르셨고 1945년 8월 15일 일본통치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대한독립촉성회 진천군 이월면 부회장으로 활약하셨고 1948년 대한청년단 이월면 단장에 선출되시어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셨으며 1950년 6월 25일 동란 당시 향토방위대장으로 임명되시어 온갖 고난과 고초와 受侮(수포)를 당하면서 지역수호와 면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셨으며
1979년 이월면 제2대 노인회장으로 선출되어 노인의 복지증진은 물론 노인회의 숙원사업인 노인회관 건립을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시다가 공사비가 부족하자 사재를 근저당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비용을 마련 전국 최초의 목조개와 건물로 대지 510평의 회관을 건립, 1981년 8월 18일 준공과 함께 노인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니 어찌 우리 노인들이 고맙다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평생동안 오로지 나라와 지역발전은 물론 면민과 특히 노인을 위하여 헌신하셨기에 그 숭고한 정신과 높은 덕을 기리고저 이 비에 새겨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한다.
서기 2000년 경진 5월 14일, 화곡김공성회송덕비 건립위원회 건립 錦岩 李廷云 書
<진천의 금석문(비문)집 제2집> (2001.11, 진천문화원)
▣ 김성회 - 신창공파 일명 승지공파 음지파는 현령공 2자이나 공예 할아버지께서 신창공에게 입양되세기에 신창공(계)의 후손으로 기록 정정해 주세요
▣ 김성회 - 태문(泰文)조카가 기미대동보 안렴사공파 무진세보 편찬시 총무로 보학에 관계된 지식이 많이 있습니다 오창에서 건강원을 개업하고 있습니다.
▣ 김성회 - 76년 보감에 김재신의 처 청주한씨 효열비문이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 김윤만 -
▣ 김태서 -
▣ 김항용 - 주회대부님 상기 교정내용을 수정하신 뒤 아래 의견란에 <교정완료>로 적어 주십시요
▣ 김주회 - <교정완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