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렴사공파(사렴) 소개자료 27---영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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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03 07:20 조회1,634회 댓글0건본문
♣♣♣21 영동파♣♣♣
○안렴사공(사렴)---안렴사공 6자 좌랑공 휘湜(식) 장자 직장공 휘自麗(자려)---장자 대구교수공 휘 (극) 후손으로 永同派(영동파)라 한다안렴사공(*사렴) 6자 휘湜(식)께서는 이조좌랑으로 퇴임후 鎭木(진천-목천)지간에 계시고 장자 휘自麗(자려)께서는 직장이시고
그의 장자 휘 (극)께서는 대구교수로 후손은 추풍령에서 충북 영동쪽으로 황간면 소재지를 지나 멀지않은 황간휴게소 바로 아래에 있는 황간면 회포리와 우천리에 세거하고 있고, 대구에도 일부가 이거하여 살고 있다.
대구에서 지방의회의원을 역임하신 元會(대구시 북구)의 아들 태화 태근 태우 태정이 있고 태우는 현재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핵물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泰玉(태옥)은 대구시 서구에 세거하고 있다.
대종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신 國寶(在國), 안양에서 국회의원 입후보하셨던 在禮 와 현재 안양시 민주평통위원장 喆會, 현재 황간향교 전교를 지내시고 종사에 헌신하고 있는 貞會(현재 우천리 연화동 거주) 등은 그의 후손이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 연화동은 안렴사공 14세손 휘致玉(1742-1827) 선조께서 창설한 마을로 마을 입구에 우천리 유래비(1992)와 마을 안에 안동김씨 재실인 영모재와 그 옆에 안동김공휘치옥추모비(1975)가 건립되어 있다.
75) 김치옥 (金致玉, 1742-1827) 추모비 (1975)
소재 : 충북 영동군 황간면 牛川里 산30-2번지
공의 휘는 致玉이요 자는 汝聖이요 본관은 안동이요 고려말 충신 안렴사 휘士廉 공의 14세손이시니 서기 1742년 3월 4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龜尾(=회포리)에서 출생하시어 서기 1827년 6월 24일에 졸하시니 향년 86세이시다.
공께서는 천성이 인자하시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시어 선고 휘履 (이후)께서 별세하시니 애통하신 나머지 선고 묘소옆에 묘막을 건립하시고 3년간을 하루도 궐하심이 없이 시묘를 하시었다.
슬하에 錫勵 錫明 錫歸 錫範 등 네아들과 漢昇외 12명의 손들과 같이 이 蓮花洞 마을을 창설하셨다. 우리 후손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하여 이 할아버지의 미덕과 효성을 추모하는 나머지 삼가 이 비를 건립하노니 후손들은 이 할아버지의 유덕을 본받아 서로 화목단결하고 타의 시범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기 1975년 12월 12일 6대손 哲會 고손 仲默 5대손 在仁 5대손 在燻 외 후손 일동 건립 <안동김씨 화수록 제8집, 1999>
♠영동 황간 우천리 유래비 (1992)
이곳 소내마을 형성은 1592년 충주박씨 之(火+允)이 매곡에서 옮겨 이곳에 우거진 다래나무를 제거하고 움막을 짓고 거주한 것이 시초라고 전하여 오고 있으며 소내라 부르게 된 동기는 부락을 수호하는 큰 괴목 두 그루와 선돌 세 개가 있는데 그 나무는 수령 500년가량 되었고 선돌은 남 서 북 방향에 서있어 돌 사이는 약 1KM로 삼각을 이루었고 세 개의 선돌안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소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연화동 마을형성은 1790년 구안동김씨 致玉이 구미에서 蓮花谷 입구에 先考를 안장하고 3년간 시묘를 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가 와서 같이 지켜주어 그 고마운 뜻으로 정주케 된 것이 시초이며 연화동이라 부르게 된 동기는 마을 뒷산 생김새가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연화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1895년에 황간현이 황간군으로 개편되어 황간군 서면 우천리라 불리오 오다가 1897년에 황간군이 영동군에 합병되면서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라는 행정부락명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牛川里는 동으로 月留峯 남으로 老斤 서로는 回浦(포) 북으로는 慢( 머리)草坪洑(보)가 있고 1972년 경지정리와 1974년 전기를 가설하고 朴鐵基는 76-81년동안 주민들과 힘을 모아 차도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1985년 통신시설 개통과 굴곡이 심했던 농로를 1992년에 소득원 도로로 지정 확포장되었다.
6.25 사변때 소내 뒷산은 아군과 유엔군 앞산은 적군 주야 13일간 혈전 격전지였다. 소내 2집 연화동 21집 불에 타고 참전용사 金景會와 盧炳祥은 00지역에서 전사하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항상 잊지 말고 서로 돕고 평화로운 조국의 내일을 위하여 앞장서야 할 것이다.
우천리 성씨를 살펴보면 진주강씨, 안동김씨, 광산노씨, 여흥민씨, 밀양박씨, 충주박씨, 순천박씨, 밀양손씨, 동복오씨, 성주이씨, 전주이씨, 연안전씨등 모여살며 老斤-回浦간 좁은 길 차도로 만들자고 동민 호당 5만원씩 부담하고 <중략>
서기 1992년 12월 일 우천리 주민일동 고향을 도우신 분들 안양 김재희, 김재례, 김철회, 김웅회 대구 김봉준 김창회 김봉회 김장회 서울 김국보 대전 김일회 유래비 찬조자 명단 마을주민 명단
▣ 김상석 - 남다른 의지와 집념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작금에 이르는 안렴사공 자료를 보니 거의 다 되어 가는 듯 싶어요.귀하신 옥체 살펴가며 하시길......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홈에 올립니다.
▣ 김윤만 - 그동안 자료 수집과 정리에 노고가 컸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안렴사공(사렴)---안렴사공 6자 좌랑공 휘湜(식) 장자 직장공 휘自麗(자려)---장자 대구교수공 휘 (극) 후손으로 永同派(영동파)라 한다안렴사공(*사렴) 6자 휘湜(식)께서는 이조좌랑으로 퇴임후 鎭木(진천-목천)지간에 계시고 장자 휘自麗(자려)께서는 직장이시고
그의 장자 휘 (극)께서는 대구교수로 후손은 추풍령에서 충북 영동쪽으로 황간면 소재지를 지나 멀지않은 황간휴게소 바로 아래에 있는 황간면 회포리와 우천리에 세거하고 있고, 대구에도 일부가 이거하여 살고 있다.
대구에서 지방의회의원을 역임하신 元會(대구시 북구)의 아들 태화 태근 태우 태정이 있고 태우는 현재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핵물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泰玉(태옥)은 대구시 서구에 세거하고 있다.
대종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신 國寶(在國), 안양에서 국회의원 입후보하셨던 在禮 와 현재 안양시 민주평통위원장 喆會, 현재 황간향교 전교를 지내시고 종사에 헌신하고 있는 貞會(현재 우천리 연화동 거주) 등은 그의 후손이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 연화동은 안렴사공 14세손 휘致玉(1742-1827) 선조께서 창설한 마을로 마을 입구에 우천리 유래비(1992)와 마을 안에 안동김씨 재실인 영모재와 그 옆에 안동김공휘치옥추모비(1975)가 건립되어 있다.
75) 김치옥 (金致玉, 1742-1827) 추모비 (1975)
소재 : 충북 영동군 황간면 牛川里 산30-2번지
공의 휘는 致玉이요 자는 汝聖이요 본관은 안동이요 고려말 충신 안렴사 휘士廉 공의 14세손이시니 서기 1742년 3월 4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龜尾(=회포리)에서 출생하시어 서기 1827년 6월 24일에 졸하시니 향년 86세이시다.
공께서는 천성이 인자하시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시어 선고 휘履 (이후)께서 별세하시니 애통하신 나머지 선고 묘소옆에 묘막을 건립하시고 3년간을 하루도 궐하심이 없이 시묘를 하시었다.
슬하에 錫勵 錫明 錫歸 錫範 등 네아들과 漢昇외 12명의 손들과 같이 이 蓮花洞 마을을 창설하셨다. 우리 후손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하여 이 할아버지의 미덕과 효성을 추모하는 나머지 삼가 이 비를 건립하노니 후손들은 이 할아버지의 유덕을 본받아 서로 화목단결하고 타의 시범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기 1975년 12월 12일 6대손 哲會 고손 仲默 5대손 在仁 5대손 在燻 외 후손 일동 건립 <안동김씨 화수록 제8집, 1999>
♠영동 황간 우천리 유래비 (1992)
이곳 소내마을 형성은 1592년 충주박씨 之(火+允)이 매곡에서 옮겨 이곳에 우거진 다래나무를 제거하고 움막을 짓고 거주한 것이 시초라고 전하여 오고 있으며 소내라 부르게 된 동기는 부락을 수호하는 큰 괴목 두 그루와 선돌 세 개가 있는데 그 나무는 수령 500년가량 되었고 선돌은 남 서 북 방향에 서있어 돌 사이는 약 1KM로 삼각을 이루었고 세 개의 선돌안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소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연화동 마을형성은 1790년 구안동김씨 致玉이 구미에서 蓮花谷 입구에 先考를 안장하고 3년간 시묘를 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가 와서 같이 지켜주어 그 고마운 뜻으로 정주케 된 것이 시초이며 연화동이라 부르게 된 동기는 마을 뒷산 생김새가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연화동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1895년에 황간현이 황간군으로 개편되어 황간군 서면 우천리라 불리오 오다가 1897년에 황간군이 영동군에 합병되면서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라는 행정부락명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牛川里는 동으로 月留峯 남으로 老斤 서로는 回浦(포) 북으로는 慢( 머리)草坪洑(보)가 있고 1972년 경지정리와 1974년 전기를 가설하고 朴鐵基는 76-81년동안 주민들과 힘을 모아 차도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1985년 통신시설 개통과 굴곡이 심했던 농로를 1992년에 소득원 도로로 지정 확포장되었다.
6.25 사변때 소내 뒷산은 아군과 유엔군 앞산은 적군 주야 13일간 혈전 격전지였다. 소내 2집 연화동 21집 불에 타고 참전용사 金景會와 盧炳祥은 00지역에서 전사하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항상 잊지 말고 서로 돕고 평화로운 조국의 내일을 위하여 앞장서야 할 것이다.
우천리 성씨를 살펴보면 진주강씨, 안동김씨, 광산노씨, 여흥민씨, 밀양박씨, 충주박씨, 순천박씨, 밀양손씨, 동복오씨, 성주이씨, 전주이씨, 연안전씨등 모여살며 老斤-回浦간 좁은 길 차도로 만들자고 동민 호당 5만원씩 부담하고 <중략>
서기 1992년 12월 일 우천리 주민일동 고향을 도우신 분들 안양 김재희, 김재례, 김철회, 김웅회 대구 김봉준 김창회 김봉회 김장회 서울 김국보 대전 김일회 유래비 찬조자 명단 마을주민 명단
▣ 김상석 - 남다른 의지와 집념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작금에 이르는 안렴사공 자료를 보니 거의 다 되어 가는 듯 싶어요.귀하신 옥체 살펴가며 하시길......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홈에 올립니다.
▣ 김윤만 - 그동안 자료 수집과 정리에 노고가 컸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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