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지>의 목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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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10 20:59 조회1,818회 댓글0건본문
■ 오창지
p75
목령산은 오창의 돛대와 같은 존재로서 진산 또는 태산이라고도 하는데 명실상부한 오창의 중심이다.
동쪽으로는 주성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는 성산리를 안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양청리와 손을 잡고, 북쪽으로는 양지리와 나란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령산에 떨어진 빗물은 동으로 가면 미호천에 합류되고, 서쪽은 용머리 백현리와 옥산의 금계리를 적시면서 미호천에 이르고, 남쪽은 궁전뜰을 거쳐 미호천에 닿고, 북쪽은 장대리와 성암천을 통해서 미호천에 합수된다.
P343
3. 關防유적
1) 鶩嶺산성 (오창면 주성리,양지리)
목령산성은 오창면 소재지의 서쪽으로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해발 228m의 목령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토축한 테뫼형 산성으로 옛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산의 정상부와 그 능선을 따라 설축되어 둘레가 약 390m에 불과한 작은 산성이나 험저한 지세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이루어졌으며 성의 기초에 版築과 石心이 보인다.
성벽은 산의 정상부에 둘러쌓은 143.5m의 내성부와 남서로 뻗은 산능선을 연결한 외성부 246.5m로 이루어져 2중성으로 쌓았으며 비록 형태는 작으나 형식을 잘 갖춘 토성이다.
성내에는 우물지가 전혀 없고 건축물이 있었을만한 태지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현재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북동쪽 정상에 높이 1.2m, 한변의 길이 1.8*1.5m의 石築 흔적이 있어 將臺地로 추정된다.
성내의 지표와 외성 북벽 기단의 석심 사이에서 백제계의 토기편이 발견되어 백제측에서 축성한 산성으로 추정되며, 산성의 남쪽 산기슭에 寺谷이 있어 백제성의 조건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p345
4. 古墳유적
1)양지리 고분군 (오창면 양지리 산3)
목령산성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양지리 마을의 주변 야산에 있는 고분군으로 목령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 등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묘제는 알 수 없고, 곳곳에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흩어져 있으며, 1976년 11월 18일에 토기항아리가 출토, 국고귀속되어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2002, 김성호, 월간조선사)
p147
신라가 청주로 진출한 고구려군을 밀어낸 이후 백제와의 전투가 재개되어 -----백제가 반격을 가하여 ----- 626년에 장악한 主在城은 아마 청원 오창 주성리였을 것이다.
p157
첫째로 영양왕18년 (607)은 온달(=고승)의 남하기간(603-612)이다. 이해 5월에 "고구려가 백제 松山城을 쳐도 함락되지 않자 石頭城을 쳐서 남녀 3000을 사로잡아 갔다" 한다. 이때의 백제는 웅진백제여서 고구려가 웅진백제를 친 것은 곧 한강 이남으로 남하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송산성은 청원 옥산면 송산리 (현 동림리)의 동림성지이다. 이곳은 지난날 이사부의 병살타로 고구려가 신라에 뺏긴 금현성으로 이곳 옛 지명에는 송산리, 금성리가 모두 포함되었으며,
석두성은 송산성 서북쪽은 청원 오창면 석우리의 목령산성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 청주평원은 온달이 출정하면서 되찾겠다고 맹세한 계립령(문경 조령)의 서쪽이어서 온달(=고승)의 군사가 이곳까지 왔었음이 확인된다.
■ 양지리 (陽地里)
그만큼 자연부락도 많다. 닭작골, 산수골, 안골, 연못거리, 윗골이 그것이다. 지명도 여러
가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거담바위, 용선암, 작은서낭댕이고개 장수바위, 큰서낭댕이 고개
가 있고 운암사라는 태고종 사찰도 있다.
이 마을의 특징은 오창면의 깃발이라 할 수 있는 목령산을 끼고 있다는 것과 송천서원을
소유하고 있는 것 그리고 수령 640년이 되는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과 중요한 문화유적과 안
동 김씨의 집성촌을 이루면서 누대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목령산을 끼고 있어서 산촌 마을이고 최서단 골짜기의 산수동 마을, 도로변은 연못거리
(河潭)마을, 남서도로 건너가 닭작골 마을이며, 동남쪽은 안골 마을, 은행나무가 있는 은행정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청풍 김씨와 전의 이씨, 안동
김씨의 묘소가 많은데 생전에 국가에 큰 업적을 남겼음을 나타내는 표적들이 있기 때문이
다.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金公藝, 1485-1537)의 묘갈(墓碣),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 이
효석(李孝碩)의 신도비, 영암군수 이사혜(李士蕙)의 묘비, 효정공(孝貞公) 이정간(李貞幹,
1360-1439) 추원단(追遠壇)의 유허비, 청풍 김씨 김윤(金潤) 집안의 충실한 노비였다던 삼월
의 비가 있는데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조 성종(成宗) 1489년, 출생한지 삼일만에 일점혈육을 남기고 산모가 죽자 노비들이
아기를 해치고 재산을 탈취한다는 것을 알고 노비 삼월이 아기를 물동이에 넣고 한양을 빠
져나와 청주 오근촌으로 피신, 성장시켜 청풍 김씨의 증시조를 위기에서 구출해 주어서 훗
날 김윤의 묘소 아래 「三月者 淸風金氏忠婢也」라고 시작되는「忠婢三月之碑」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는 유명한 송천서원(松泉書院)이 있다. 본래는 옥산 송천마을에 세워졌었는데 1871
년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잊혀졌던 것을 1970년 현재의 위치에
옮겨 재건한 것으로 김사렴, 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이제신, 최석정,
이인혁, 이효석, 남구만, 박문수, 이종성, 김여량 등 15인을 배향하고 3월20일(음)에 향사(享
祀)되고 있다.
■ 양청리
현재 양칭이와 回岩마을로 이루어진 양청1리와 時才마을로 이루어진 양청2리로 분구되어 있으며 시재마을은 時才, 耆在, 詩才라 일컬어졌다. 양칭이 마을에는 문화류씨가 많이 살고, 시재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어 각각 집성촌을 이룬다.
김재봉 법무사, 김윤회 진천경찰서장, 김재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김인회 청원군 산림과장, 김운회 대한항공 파리지부장, 주성여행사, 김영회 청주전매청 주임, 김성묵 오창의용소방대 대장, 김재학 오창농협 부장, 김재창 서울은행 대전지점 차장 등은 이곳 출신이다. <오창지>
▣ 김윤식 -
▣ 김태서 -
▣ 솔내 -
p75
목령산은 오창의 돛대와 같은 존재로서 진산 또는 태산이라고도 하는데 명실상부한 오창의 중심이다.
동쪽으로는 주성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는 성산리를 안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양청리와 손을 잡고, 북쪽으로는 양지리와 나란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령산에 떨어진 빗물은 동으로 가면 미호천에 합류되고, 서쪽은 용머리 백현리와 옥산의 금계리를 적시면서 미호천에 이르고, 남쪽은 궁전뜰을 거쳐 미호천에 닿고, 북쪽은 장대리와 성암천을 통해서 미호천에 합수된다.
P343
3. 關防유적
1) 鶩嶺산성 (오창면 주성리,양지리)
목령산성은 오창면 소재지의 서쪽으로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해발 228m의 목령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토축한 테뫼형 산성으로 옛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산의 정상부와 그 능선을 따라 설축되어 둘레가 약 390m에 불과한 작은 산성이나 험저한 지세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이루어졌으며 성의 기초에 版築과 石心이 보인다.
성벽은 산의 정상부에 둘러쌓은 143.5m의 내성부와 남서로 뻗은 산능선을 연결한 외성부 246.5m로 이루어져 2중성으로 쌓았으며 비록 형태는 작으나 형식을 잘 갖춘 토성이다.
성내에는 우물지가 전혀 없고 건축물이 있었을만한 태지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현재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북동쪽 정상에 높이 1.2m, 한변의 길이 1.8*1.5m의 石築 흔적이 있어 將臺地로 추정된다.
성내의 지표와 외성 북벽 기단의 석심 사이에서 백제계의 토기편이 발견되어 백제측에서 축성한 산성으로 추정되며, 산성의 남쪽 산기슭에 寺谷이 있어 백제성의 조건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p345
4. 古墳유적
1)양지리 고분군 (오창면 양지리 산3)
목령산성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양지리 마을의 주변 야산에 있는 고분군으로 목령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 등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묘제는 알 수 없고, 곳곳에 삼국시대의 토기편이 흩어져 있으며, 1976년 11월 18일에 토기항아리가 출토, 국고귀속되어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2002, 김성호, 월간조선사)
p147
신라가 청주로 진출한 고구려군을 밀어낸 이후 백제와의 전투가 재개되어 -----백제가 반격을 가하여 ----- 626년에 장악한 主在城은 아마 청원 오창 주성리였을 것이다.
p157
첫째로 영양왕18년 (607)은 온달(=고승)의 남하기간(603-612)이다. 이해 5월에 "고구려가 백제 松山城을 쳐도 함락되지 않자 石頭城을 쳐서 남녀 3000을 사로잡아 갔다" 한다. 이때의 백제는 웅진백제여서 고구려가 웅진백제를 친 것은 곧 한강 이남으로 남하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송산성은 청원 옥산면 송산리 (현 동림리)의 동림성지이다. 이곳은 지난날 이사부의 병살타로 고구려가 신라에 뺏긴 금현성으로 이곳 옛 지명에는 송산리, 금성리가 모두 포함되었으며,
석두성은 송산성 서북쪽은 청원 오창면 석우리의 목령산성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 청주평원은 온달이 출정하면서 되찾겠다고 맹세한 계립령(문경 조령)의 서쪽이어서 온달(=고승)의 군사가 이곳까지 왔었음이 확인된다.
■ 양지리 (陽地里)
그만큼 자연부락도 많다. 닭작골, 산수골, 안골, 연못거리, 윗골이 그것이다. 지명도 여러
가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거담바위, 용선암, 작은서낭댕이고개 장수바위, 큰서낭댕이 고개
가 있고 운암사라는 태고종 사찰도 있다.
이 마을의 특징은 오창면의 깃발이라 할 수 있는 목령산을 끼고 있다는 것과 송천서원을
소유하고 있는 것 그리고 수령 640년이 되는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과 중요한 문화유적과 안
동 김씨의 집성촌을 이루면서 누대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목령산을 끼고 있어서 산촌 마을이고 최서단 골짜기의 산수동 마을, 도로변은 연못거리
(河潭)마을, 남서도로 건너가 닭작골 마을이며, 동남쪽은 안골 마을, 은행나무가 있는 은행정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청풍 김씨와 전의 이씨, 안동
김씨의 묘소가 많은데 생전에 국가에 큰 업적을 남겼음을 나타내는 표적들이 있기 때문이
다.
승정원 동부승지 김공예(金公藝, 1485-1537)의 묘갈(墓碣),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 이
효석(李孝碩)의 신도비, 영암군수 이사혜(李士蕙)의 묘비, 효정공(孝貞公) 이정간(李貞幹,
1360-1439) 추원단(追遠壇)의 유허비, 청풍 김씨 김윤(金潤) 집안의 충실한 노비였다던 삼월
의 비가 있는데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조 성종(成宗) 1489년, 출생한지 삼일만에 일점혈육을 남기고 산모가 죽자 노비들이
아기를 해치고 재산을 탈취한다는 것을 알고 노비 삼월이 아기를 물동이에 넣고 한양을 빠
져나와 청주 오근촌으로 피신, 성장시켜 청풍 김씨의 증시조를 위기에서 구출해 주어서 훗
날 김윤의 묘소 아래 「三月者 淸風金氏忠婢也」라고 시작되는「忠婢三月之碑」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는 유명한 송천서원(松泉書院)이 있다. 본래는 옥산 송천마을에 세워졌었는데 1871
년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잊혀졌던 것을 1970년 현재의 위치에
옮겨 재건한 것으로 김사렴, 최유경, 이정간, 박광우, 이지충, 조강, 이대건, 이제신, 최석정,
이인혁, 이효석, 남구만, 박문수, 이종성, 김여량 등 15인을 배향하고 3월20일(음)에 향사(享
祀)되고 있다.
■ 양청리
현재 양칭이와 回岩마을로 이루어진 양청1리와 時才마을로 이루어진 양청2리로 분구되어 있으며 시재마을은 時才, 耆在, 詩才라 일컬어졌다. 양칭이 마을에는 문화류씨가 많이 살고, 시재 마을에는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어 각각 집성촌을 이룬다.
김재봉 법무사, 김윤회 진천경찰서장, 김재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김인회 청원군 산림과장, 김운회 대한항공 파리지부장, 주성여행사, 김영회 청주전매청 주임, 김성묵 오창의용소방대 대장, 김재학 오창농협 부장, 김재창 서울은행 대전지점 차장 등은 이곳 출신이다. <오창지>
▣ 김윤식 -
▣ 김태서 -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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