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30] 왕위 다툼에 무너진 신라 (영남일보 9.23)
페이지 정보
김정중 작성일03-09-23 22:45 조회1,762회 댓글0건본문
2003/9/23]
[우리 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30] 왕위 다툼에 무너진 신라 |
|
그런데 원성왕의 즉위는 반무열왕계의 치밀한 음모의 결과였다. “선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여러 신하들은 의논한 후 왕의 조카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 때 주원이 서라벌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로 알천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했다. 누가 말하기를 ‘임금의 대위(大位)는 사람이 도모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상대등 김경신은 선왕의 동생으로 원래 덕망이 높아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라고 하자 여러 사람의 의견이 단번에 일치되어 그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국인(國人)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삼국사기’ 원성왕조)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이었는데, 그의 즉위로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 원칙이 무너졌다. 진골이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음을 뜻했다. 신라 왕실이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왕위 계승 전쟁에 돌입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중대에는 무열왕계가 아니면 감히 왕위를 꿈꾸지 못했으나 하대에는 진골이면 누구나 왕위를 꿈꿀 수 있게 되면서 왕권이 극도로 약화됐다. 원성왕은 왕권 약화의 위기를 자신의 직계 혈족들을 대거 정사에 가담시키는 것으로 타개하려 했다.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장남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그는 재위 7년만에 사망하고 차남 의영이 태자가 되었다. 그런데 의영마저 재위 10년에 죽자 장남 인겸의 맏아들 준옹을 태자로 책봉했다. 비무열계 왕으로서 왕권은 약해졌으나 정치권력은 오히려 일가가 독점하는 오기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원성왕 사후 준옹이 즉위해 소성왕(39대)이 되었으나 2년만에 죽고 13세의 애장왕(40대)이 즉위했다. 그러자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하던 숙부 언승이 애장왕 10년 아우인 이찬 제옹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애장왕과 그 아우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헌덕왕(41대)이다. 왕위 계승 원칙이 무너진 하대 왕실은 일가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횡행했다. 지배층이 정권 다툼에 영일이 없는데 민생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애장왕 4년과 6년 잇따라 지진이 있었으며, 재위 8년에는 음력 8월에 큰 눈이 내렸고 재위 10년에는 크게 가물었다. 헌덕왕은 이런 잇단 재이(災異)를 왕위 교체의 명분으로 삼아 조카를 죽였지만 그의 재위기간에는 더 큰 재변이 잇따랐다. 헌덕왕 재위 2년에 유성(流星)이 자미성(紫微星)에 들어가고, 재위 6년에 큰 홍수가 났으며 재위 7년에는 음력 5월에 눈이 오고 큰 기근까지 들어 도적이 봉기했다. 재위 8년에도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당나라 절동(浙東) 지방까지 가서 빌어먹어야 했다. 재위 9년에도 크게 가물어 음력 10월에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재위 11년에는 사방에서 초적(草賊)이 일어났다. 헌덕왕 재위 12년 봄·여름은 가물고 겨울에는 기근이 들었으며, 13년 봄에는 굶주린 백성들은 자손까지 팔아 생활해야 했다. 드디어 헌덕왕 재위 14년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들이 마른 다음달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의 반란은 여타의 반란과는 달랐다. ‘삼국사기’ 헌덕왕 14년조에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 원년이라 했다”는 기록은 김헌창이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 원칙이 무너진 것에 불만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음을 보여준다. 김헌창은 비무열왕계인 원성왕의 즉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한때 큰 기세를 올렸던 김헌창의 반란은 결국 그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불과 3년 후인 헌덕왕 17년(825)에는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과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는 등 하대 왕실에 대한 반발은 끊이지 않았다. 헌덕왕 사후 아우 흥덕왕(42대)이 뒤를 이었다가 원성왕의 손자 희강왕(43대)이 즉위했는데, 이때부터 다시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난다. 희강왕은 재위 3년만에 난리통에 자살하고 민애왕(44대)이 즉위했으나 그 역시 난리통에 군사들에게 맞아 죽고, 신무왕(45대)이 즉위했다가 몇 달만에 병사했으며, 그 아들 문성왕(46대) 때에는 장보고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처럼 무열왕계의 왕통을 빼앗은 원성왕계는 같은 혈족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신라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문성왕의 동생 헌안왕(47대)은 권력에 욕심이 없는 인물을 후사로 골랐다. 헌안왕은 재위 4년(860)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았는데 여기에 희강왕의 아들 아찬 김계명의 아들 응렴도 참석했다. 김응렴은 무슨 까닭에선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헌안왕은 그에게 “네가 한 동안 각지를 돌아 다녔는데 선인(善人)을 본 일이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응렴은 세 사람의 착한 행실을 보았다고 답했다. 헌안왕이 묻자, “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인데 다른 사람과 사귈 때 앞서지 않고, 남의 아랫자리에 있었으며, 또 한 사람은 부자인데도 항상 베옷만으로 만족했으며, 또 한 사람은 세력이 있으면서도 한번도 남에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잠잠히 있다가 왕후에게 “짐이 사람을 많이 겪어봤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라고 말하고, 응렴에게 “그대는 자애(自愛)하라. 내가 딸 자식이 있으니 너를 짝으로 삼겠다”고 말한 후 응렴과 술을 마시며 “내게 스무살, 열 아홉 살짜리 딸이 있으니 마음대로 취하라”고 권했다. 응렴이 절하고 물러나와 부모에게 상의하자 부모는 “왕의 두 딸은 언니가 아우만 못하다고 하니 아우에게 장가 드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결정을 못한 응렴이 흥륜사의 승려에게 상의하자 그는 “언니에게 장가를 든다면 세 가지 이익이 있겠지만 동생에게 장가 들면 반대로 세 가지 해가 있을 것”이라고 권했다. 응렴은 헌안왕에게 “저는 감히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오직 왕명을 좇겠습니다”라고 결정권을 넘겼다. 그러자 헌안왕은 맏딸과 결혼시키고 자신이 죽을 때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경문왕(48대)인데 재위 3년 왕비인 헌안왕의 맏딸 영화부인은 자신의 동생을 차비(次妃:둘째왕비)로 들였다. 경문왕이 흥륜사 승려에게 “대사가 전에 말하던 세가지 이익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는 “당시 왕과 왕비께서 뜻대로 되는 것이 기뻐서 총애가 점점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첫째 이익이요, 이로 인해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니 이것이 둘째 이익이요, 결국 처음부터 바라던 둘째딸도 얻게 될 것이니 이것이 셋째 이익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응렴이 말한 세가지 선인의 이야기에 헌안왕이 왕위까지 물려줄 정도로 감동했던 것은 그만큼 물불 가리지 않는 권력 투쟁이 일상화되었음을 말해준다. 권력욕이 작았던 경문왕 때라고 반란이 끊인 것은 아니었다. 재위 6년에는 이찬 윤흥 등이, 8년에는 이찬 김예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재위 14년에는 이찬 근종이 또 반란을 일으켜 대궐까지 공격하는 등 신라 왕실은 왕위 계승 전쟁으로 날을 지샜다. 이 사이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신라는 내부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위계승전쟁 사병 |
▣ 솔내영환 - 정중씨!! 감사합니다.
▣ 김주회 -
▣ 김항용 -
▣ 김영윤 -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형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가을 하늘이 맑네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