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대학교와 김학응(당시 충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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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26 20:59 조회1,545회 댓글0건본문
어제 9월 25일은 충북대학교에서 행사가 있어서 다녀 왔습니다. 가는 길에 짬을 내서 충북대 도서관에도 들려 보았습니다.
일전에 발용 종친께서 소개해 주신 <백범추모록>을 비롯하여 <백범일지 원문 영인본>, <일문사충사적>, <청선고>3권, <고려묘지명집성> 3판(1993-1997-2001), <고려묘지명집성 국역본> 상하권, <양천허씨보감> 3권(유사편,실록편,도록편> 등 찾아볼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김포의 인물>(2002.8,김포문화원) 책자에서 김수동(익) 시 한수,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5, 박영규)에서 휘빈 폐위사건 내용 등을 복사해 왔습니다.
1950년대 충북대학 창건과 관련하여 당시 김학응(제) 충북도지사께서 도유지 30만평을 무상양여하는 등 절대적 공헌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먼저 소개해 봅니다.
■도정반세기 (1996, 이승우)
김학응 지사와 충북대학 창건
1950년대에 충북도 지사를 지냈던 사람 중에 관료 출신이 세 사람이었다. 5대 정낙훈씨, 6대 ★김학응씨, 그리고 7대 정인택씨였다. 그 중에 양 정씨는 충남 출신이었으나 김 지사는 괴산 출신으로 이른바 향도(鄕道)출신으로 2대 이명구 지사에 이어 두 번째인 셈이다. 우선 김 지사의 성장 과정과 관료 경력을 더듬어 보자.
◇두 번째 향토 출신 지사
1899년 괴산군 괴산면 서부리에서 출생. 19세기 마지막 해에 태어나서 56세 때에 충북 도백이 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교) 4년을 중퇴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 3년을 졸업했다.
1925년 충북 도청 내무부 학무과 촉탁으로 첫발을 들여 놓은 후 청주,보은,옥천,제천,진천등 5개 군에서 공직 경력을 쌓은 뒤에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보은군수 발령을 받은 것이 출세가도의 시발이었다.
그후 제천군수와 옥천군수를 역임하고 8.15해방을 맞아 미군정 시절인 1946년 내무국 지방과장에 보임되어 2년간 근무하다가 충주군수로 내정된 것에 불만을 품고 이에 불응하고 사직해 버렸다.
요즈음의 행정관례와는 달리 그 시절에는 도 지방과장 자리가 비중이 컸던 요직으로서 몇 개 군수를 거쳐야만 차지할 수 있던 중책이었으므로 지방과장에서 서기관 국장 승진이 안 되고 군수로 나가라고 하면 의례 좌천인사로 알고 사표를 던졌던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관직에서 물러난 김씨는 그의 백형 ★김규응씨 (金奎應, 전 교통부장관 김태동씨의 부친)와 함께 북문로 2가에서 양조장 사업을 경영하면서 야인생활로 소일하다가 이명구 지사 취임 직후 1951년 9월 도 내무국장으로 특별 임용되는 행운을 얻어 그의 제2의 관계 출세길이 열렸다.
그후 전북 내무국장, 경기 내무국장을 거쳐 중앙청 최고 요직인 내무부 지방국장으로까지 발탁되었다가 당시 김형근 내무부장관과의 각별한 인연이 작용, 지방국장 재직 3개월만에 1955년 9월 충북도 지사로 발령되어 금의환향의 꽃가마를 타고 돌아왔던 것이다.
김학응 지사의 화려한 출세경로를 짚어보면 다분히 행운의 섭리도 많이 따라주었지만 그보다 김 지사의 인물적 비중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예로부터 충북에서 뛰어난 인물이 제일 많이 배출되었다는 괴산에서도 명문가의 출신인 데다가 학벌이 좋고 인품이 준수하여 일찍부터 관계출세가 보장되었던 터에 타고난 자질과 행정능력 또한 탁월하여 그를 잘 아는 많은 공직 후배들이 입을 모아 존경과 칭송을 아끼지 않던 이 고장의 인물 중의 인물이라고 평점하고 싶다.
◇김 지사 치적 중의 으뜸
김학응 지사의 재임 기간은 1955년 9월 2일부터 1958년 7월 29일 그가 충남 지사로 영전할 때까지 2년 11개월이라는 비교적 장기간이었다. 그의 도정의 치적으로 손꼽을 만한 일이 적지 않으나 뭐니뭐니해도 충북대학 창립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캠퍼스 부지로서 도유지 30만평을 쾌히 무상 양여한 결단은 그가 남긴 치적중의 백미로 손꼽을 만하다.
-----생 략-----
이젠 학교부지 확보가 시급한 현안과제로 대두되었다. 김 지사는 종합대학 건설을 도정의 제일목표로 삼고 중앙 관계부처와의 예산투쟁은 물론 그의 차원높은 판단력과 통찰력으로 일대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 당시 행정구역으로 청원군 사주면 개신리 (현 청주시 개신동)에 위치했던 도산하 사업소인 임업시험장과 농도원(農道院), 그리고 복대동 소재 종축장 부지를 합산한 30만평을 몽땅 충북대학 캠퍼스 부지로 양여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도청 축정과와 산림과 공무원들의 만만치 않은 반발을 무릅쓰고, 또한 도 예산의 파탄을 각오하면서 내려졌던 일대 영단이었다.
같은 괴산 출신인 金元泰 내무부차관의 도움으로 지방분여세의 재정 지원을 받아 대학구내 도로 개설비로 충당했는가 하면 농림부 소관 국고보조금인 야계사방 사업비 예산을 대학내 소하천 및 배수구 공사비로 투입하는 등 파격적인 행정지원을 감행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또다른 특수시책으로 산학협동의 한 방법으로 부지를 빼앗긴 임업시험장과 종축장의 책임자에 충북대학의 정인표 임학과 부교수와 오선균 축산학과 조교수로 하여금 겸임토록 발령하여 그 업무를 처리하도록 조치했었다고 하니 김 지사의 의욕적인 구상과 결단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비범함을 절감하게 된다.
1990년현재 충북대학교 부지 총면적은 98만 690㎡ , 즉 29만 7000여 평으로 알려져 있다. 1956년 9월 청주농고로부터 현위치로 신축 이전했던 당시의 충북대학 부지 총면적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대략 30만평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도유 재산을 과단성 있게, 그리고 아낌없이 물려주었던 김학응 지사의 대담한 도량과 미래에의 비전이 얼마나 훌륭했던가 오직 경탄할 뿐이다.
그때로부터 40년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충북대학교는 이제 국내 굴지의 국립 종합대학으로 발돋움했다. 10여년 전 연규횡(延圭鐄) 총장 재임 시절에 필자(=이승우)와 가끔 만날때면 김학응 지사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연 총장도 김 지사도 이제 고인이 되었으니 그 누구가 마음을 쓸는지 모를 일이다.
조건상(趙建相) 학장 재임시 개교 20주년 기념행사로 <충북대학 이전기념비>를 건립했었는데 어느 해인가 국회 국정감사 자리에서 어떤 국회의원이 김학응 지사의 공적사항이 비문에 적혀 있는 것을 문제삼았던 일 때문에 조 학장 임기 만료후 누군가가 슬그머니 그 기념비를 제거해 버렸다는 秘話가 알게 모르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충북대학 창설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김학응 지사가 3.15 부정선거 당시 충남도 지사로 재직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말썽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그 비석의 실체가 대학 경내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이라는 흐미한 이야기가 지금도 남아 있기는 하다.
▣ 김항용 -
▣ 김상석 - <충大 이전기념비>를 찾으려 캠퍼스를 파 볼 수도 없고,정치가 뭔지?,원!.
▣ 김윤만 - 만년지대계를 위한 혜안.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줄로 압니다. 물고기보단 낚시법을. . . . .
▣ 김발용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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