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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터넷의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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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27 22:00 조회1,5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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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인터넷의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02)



인조이재팬네이버(http://j2k.naver.com/j2k_frame.php/korean/kumasan1127.cool.ne.jp/kuma/kirameki/land-story/lannd-history.htm)를 검색해 보면 2차례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을 일본측에서 분석하고 기록한 내용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자동번역된 것으로 오탈자도 많지만 당시의 전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연재하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곰의 몽고 내습 시대에의 여행



== 몽고 내습과 그 시대 ==



가마쿠라막부는 , 미나모토노요리토모가 다이라성을 가진 씨족의 총칭 타도에 기적이 승리를 거두어 성립했지만 , 거는 서는 기반은 제호족의 연합체이며 , 반석은 아니었다. 뢰조 , 뢰가 , 실조와 겐지 삼대의 뒤가 끊어져 버리면(자) ,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쿄토 세력은 , 「무가에 강탈된 정권」탈취를 재기 (위해)때문에 , 가마쿠라막부추토를 재었다.

「죠큐의 란」이다.

호조 요시토키는 아들 태시를 대장으로서 쿄토에 쳐들어가게 했다. 시대는 , 무사의 세상을 약속하고 있었는지와 같이 무사단이 완벽한까지가 승리를 거두었다. 사 뢰조의 유력 댁인과 동등의 입장 밖에 없었던 호조씨는 차례차례로 정적이 되는 댁인 집단을 타도해 간다. 정권 내부의 장악은 성공해 , 최대의 정치가라고 하는 의시의 손자 , 호조 도키요리의 시대가 되었지만 , 그는 젊게 해 잠겼다. 그 적자였을 때 종은 , 불과 18세의 젊은이인 채 집권직에 헤아려져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 인생은 , 사상 공전의 국난을 극복하기 때문에(위해)의 고심 참담 하는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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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고 내습 전에



1192해(겐큐 3년) 정이 대장군의 선지를 내림을 받은 미나모토노요리토모는 카마쿠라에 막부를 열어 , 전국 각지의 댁인을 통솔하는 무가의 세상을 도래시켰다. 겐지의 직계는 삼대로 끊어져 형식상의 장군직은 쿄토 조정으로부터 파견되었지만 , 실권은 호조씨가 집권으로서 취임해 정치를 실시했다.



13세기-----그것은 유목 기마민족이 그 제의 소리를 울릴 수 있어 , 온 세상을 뛰어돌아다녔던 시대에서 만났다. 1206년 , 토호쿠 아시아의 초원에서 몽고족을 통일한 징기스칸(징기스칸) 은 , 질풍 도토우의 기세로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 해 , 사상 공전의 거대 제국의 기초를 구축했다.



즉 , 정복왕조 「몽고 제국」이다.

공포의 침략을 받은 서아시아의 제국에서는 영원하게 통한의 생각과 함께 공포를 가지고 구전되었다.



「몽고군이 왔다. 부수었다. 구웠다. 죽였다. 빼앗았다. 떠났다.」



유사 이후 , 이 정도의 대제국은 전에도 이후로도 출현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 그 영향은 , 중국보다 멀게 바다를 멀리해 , 당시 만이라고 생각되고 있던 일본에도 영향을 주지 않고에는 두지 않았다.



중국 대륙에 「원 제국」이 성립한 것은1271해이지만 , 이것에 앞서는1260해 , 쿠빌라이는 죠토에서 즉위 해 몽고 제국 황제가 되었다. (후세선조이다. )



일본에서는 가마쿠라막부가 호조씨에 의한 집권 시대를 맞이하고 있어 집권은 호조 요시토키였다. 이 시점에서는 , 몽고는 정복전에 이겨 내 키타쥬우국을 판도로 하고 있었지만 , 더 남쪽에는 북송 멸망으로부터 남쪽으로 성립한 망명 정권인 「남송」이 존재해 , 그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원래의 정복전은 계속되어 ,1259해에는 한반도의 통일 왕조 고려가 몽고에 복속했다.

고려아침이 몽고의 언어에 초월하는 맹공을 받아 도망어떻게 모습은 , 후세의 이노우에 야스시의 명작 「풍도」에 유감없이 말해지고 있다. (이노우에 야스시 「풍도」신쵸 출판사 문고:「원구」를 고려의 측의 역사에 입각해서 쓰여진 얼마 안되는 소설. ) 한반도는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을660여회 이상이나 받은 비참한 체험을 가진다. 대륙과 육지가 연속되어 있음의 지정학상의 결점은 민족의 숙명적 약점이기도 했다. 강대한 침략 제국은 , 고려아침의 존속은 인정한 것의 침략의 손끝으로서 이용한다고 하는 가렴주구의 운명을 고려 인민에게 부과하게 된다.

고려는 20수년에 건너 몽고병에 의한 약탈을 받았다. 특히1254해에는 , 대군의 내습을 받아 남녀 20만명여가 잡혀 살해당한 사람은 수 알려지지 않고 , 몽고병의 통과한 후에는 마을이나 마을도 황폐 다 했다고 말해지는 잔학 무도의 참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 무렵 , 일본에서는 가마쿠라막부에 의한 큐슈의 치안 유지와 이 지방의 댁인의 통어를 위해서(때문에) 「규슈 수호」가 놓여졌다. 이것이 가마쿠라막부의 지방기관의 시작이며 , 그 무력을 배경으로 타자이후를 지배하는 목적이 있던 것 같다. 겐쵸 연간(1249~1256해)이 되면(자) , 이 직무에 무토 스케요리(쇼니씨의 선조)·오오토모 요시나오(오오토모씨의 선조) 가 담당하고 나서는 , 두사람이 상 줄서 가마쿠라막부의 지방기관의 일자리를 세습하게 되었다.

특히 , 무토우씨는 타자이후 관리의 현지에 있어서의 장관이라고도 해야 할 다사이소이임라고 타자이후의 본래의 직무도 취급하게 되어 , 카마쿠라 댁인이면서 , 외국과의 제반사에 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 문영5년(1268해) 정월 , 고려의 국사가 와 몽고의 국서를 나타내 , 일본은 전대미문의 대외적 난국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에 가져와진 쿠빌라이의 국서는 , 공식상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 대응 그대로에서는 쿠빌라이 스스로 바다를 넘어 원정에 나오는 것이 예상되었다.

지금 속국화한 고려에는 쿠빌라이의 국서를 일본에 전하는 중개의 역 을 거절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사자에게는 반부() 를 사자로 했다. 반부는1267연11월에 대마도에 이르러 , 대마도의 수호대(수호인 소이씨의 대관) 소우스케국에 치쿠젠에의 길 안내를 부탁했던 것이다. 반부는 타자이후에서 가마쿠라막부의 지방기관 무토우자능과 회견해 , 몽고 국서와 고려 국서를 제출했다.

카마쿠라에서는 , 지금 더 명정치가와 평가의 높은 호조 도키요리가 잠겨 5년이 경과하고 있어 적자 토키무네는 유소였기 때문에 , 그 안대(대리자) 로서 호조 나가토키가 집권이 되었다. 이윽고 그가 잠겼으므로 , 호조 마사무라가 그 뒤를 이어 , 18세가 되었을 때 종이 련서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막부는 몽고의 위협적인 국서의 취급에 계속 고민해 국서의 내용을 거절했을 경우에는 , 반드시나 몽고가 침공해 오는 것을 각오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 요구 거부의 태도를 결정한 막부는 제국의 댁인에 명해 싸움의 준비에 들어가도록 재촉함과 동시에 , 쿄토의 조정에 결의를 재촉했다. 그리고 , 막부에 대해도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집권·련서의 지위를 역전시켜 집권을 호조씨 본가의 혈통의 토키무네로 취임시켜, 정권의 내부 굳히고를 재었던 것이다.

조정은 막부가 무력을 장악 하고 있는 현상으로부터 찬동 하지 않을 수 없어 , 막부 방침을 지지했으므로 , 가마쿠라막부의 지방기관에 명해 무슨 대답도 주지 않고 고려사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러므로 , 반부와 그 일행은 5개월이나 기다리게 된 결과 , 대답을 받을 것도 없고 초연으로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몽고는 이 후 도 , 해로의 정황이나 키타큐슈의 지형을 정찰하는 목적을 겸해 , 전후 5회 정도 , 국사를 파견했다. 막부는 , 이러한 몽고가 거듭되는 견사를 계속 죄다 거부함과 동시에 , 시코쿠·큐슈의 댁인에 차례차례 큐슈 방비에 참가하도록 지시했다.

몽고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아는 곳은 아니고 , 희망적 추측의 역을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일본해의 아라쿠를 침해한 대군 수송은 용이한 것은 아니다고 생각되어 병참선의 확보는 해상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 때문에 수비를 엄중하게 하면 , 자금은 다해 버려 자멸할 것이다.

상륙을 저지하는 것 조차 할 수 있으면 , 승리이다.

이 때문에 막부는 , 타자이후 전선기지로서 하카타를 수비하기로 해 , 가마쿠라막부의 지방기관의 소이경자를 총지휘관으로서 순조롭게 치쿠젠·히젠 해안의 방비를 굳히게 했다.



문영8년(1271해) , 쿠니노부사조 보좌를 잘하는 신하는 , 백명여의 어른수로 치쿠젠노쿠니 이마즈(후쿠오카시) 에 상륙 , 그는 「국서를 직접 , 일본왕에게 전한다」라고 하는 임무를 갖고 있으면(자) 강하게 요청했다.

가마쿠라막부의 지방기관의 소이경자는 , 선례없는 일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 이것을 거부.

그런데 조 보좌를 잘하는 신하는 부득이 , 국서의 안(사본) 을 만들어 가마쿠라막부의 지방기관에 마주 앉음이고, 11월말까지 대답 꾸짖을것과 엄중하게 요구했다.

이 때 , 만약 전회와 같이 이것을 거부하면 「병선을 의 맨손 있자」라고 협박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 군사정권인 막부가 위협에서는 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거부의 태도를 관철했다.

결국 , 조 보좌를 잘하는 신하는 회답이 주어지지 않고 , 쫓아버려졌다. 그들은 , 화가 나 요행에 대마도민을 12명 포로로서 괴라고 했던 것이다. 몽고와의 결전은 피할 수 있지 않는 사태가 되고 있었다.



문영10년(1273년) 조 보좌를 잘하는 신하는 다시 왔다. 마지막 사자이다.

그는 타자이후에서 전회 같은 요청을 했지만 , 받고 수용할 수 없는 일을 용서의 행동인 것일 것이다 , 몇 안 되는 체재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막부는 벌써 각오 하고 있었다.



세조 쿠빌라이가 , 거듭되는 일본의 대응에 화내 실제 행동을 취할 것이니까이다.

그러나 , 원측의 자료에 의하면 , 외교 사절로서 일본을 방문한 코마· 전 의 사절의 보고는 , 모두 일본 공략의 무익한 일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고려로서는 , 나라의 존망을 건 몽고군의 전화를 빠져 나가 부흥의 도상에 있어 , 나라의 피폐 한 상황을 한층 더 넓히는 것 같은 전쟁 협력은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과의 사이에 이해대립도 없고 양호한 상태에 있었다. 비록 , 정복전에 가담해도 , 피폐 한 조국에 무슨 몫도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우도것이었지.



하지만 , 쿠빌라이의 의지는 바뀌는 것이 없었다.



제1회완











▣ 솔내영환 -

▣ 김상석 - 譯의 지원이 자료를 속히 이해 하는 데 있어 난해 하궁요.

▣ 김발용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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