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우리 선조님 (07)---김정좌 (안렴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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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27 22:12 조회1,766회 댓글0건본문
금강산의 우리 선조님 (07)---김정좌 (안렴사공파)
■ 노은정 소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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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佐(정좌)는 호居由窩(거유와)로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고, 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 金剛山---金鼎佐(김정좌)
夕陽影裡僧歸寺 /석양영매승귀사
流水聲中馬渡橋 /유수성중마도교
석양(夕陽)의 그림자 속에
중은 절로 돌아가고,
흐르는 물소리 가운데에
말(馬)은 다리를 건너간다.
■화인열전1 (유홍준, 2001.6-3쇄)
겸재 정선
p.202
사천 이병연과의 만남
그러나 ★겸재가 화법을 익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연 문하생으로 겸재보다 5년 연상이며 평생지기가 된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병연은 훗날 시에서 대가가 되어 당대에 "시에서 이병연, 그림에서 정선"으로 병칭되었다.
이병연은 본관은 한사, 자는 일원(一源)이라 했다. 169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금화현감, 배천군수, 사복시 주부를 거쳐 삼척부사(정3품)까지 올랐으며, 그가 남긴 시는 무려 1만 3,000수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실록> 졸기에 오를 정도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각기병에 걸릴 정도로 술을 좋아했던 풍류인이었다. 그의 시를 두고 홍낙순은 <사천詩艸> 발문에서 남송의 애국시인 육유에 비교하였으니 이병연의 시에 어린 민족적 성격은 겸재 진경산수의 그것에 비견할 만하다 (정옥자, [조선후기 지성사], 일지사, 1991)
★이병연은 또한 그림 수집에도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의 벗인 담헌 이하곤(1677-1724)과 서암 신정하(1680-1715)는 이병연의 그림 보는 눈이 약하다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훗날 겸재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수장가였다.
그리고 이병연 집안에는 송나라 마원의 <산수>, 원나라 조맹부의 <말 그림>, 원나라 전선의<산수> 같은 송 원 명적과 명나라 구영의 <청명상하도> 같은 진적들이 많이 수장되어 있었다. (박효은, [조선후기 문인들의 서화수집 활동연구], 홍익대 대학원, 1999) 이러한 그림들이 겸재에게 준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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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겸재의 30대 행적에서 진경산수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만은 명확히 알려져 있다. 그것은 두 차례에 걸친 금강행이다. 겸재는 36세때인 1711년에 1차 금강산 유람을 했고, 또 이듬해인 1712년에 2차 금강산을 유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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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은 금강산 狂이었다. 그는 바로 전해인 1710년에 다녀왔는데, 환갑을 바라보는 노령에 또다시 여섯 번째로 금강산을 연이어 찾은 것이다. 그때 마침 사천 ★이병연은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있었다.
이병연은 1710년 5월부터 1715년 5월까지 5년간 금화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그의 많은 詩友들이 이처럼 금강산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겸재의 1차 신묘년 금강행에 대해서는 정확한 일정이나 주고받은 시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 13폭이 들어 있는 [신묘년 풍악도첩]이 전해지고 있어 겸재의 진경산수를 연구하는 데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 화첩은 현재까지 알려진 겸재의 기년 작품중 가장 빠른 것이기도 하다.
p.217
★겸재는 금강산에 매우 심취했던 모양이다. 화가로서 자신의 기량과 취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그보다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겸재는 신묘년 제1차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지 1년 뒤인 임진년(1712) 8월에 다시 가을 금강산을 보러 가게 된다.
이번 일행은 사천 ★이병연의 부친인 수암 이속(1647-1720), 동생인 순암 이병생(1675-1735) 그리고 후배 시인인 국계 장응두(1620-1729) 등 4인이었다. 아마도 금화현감 이병연이 부친과 동생, 벗과 후배를 초청한 것이리라.
겸재는 2차 금강행에서 그 유명한 [해악전신첩]을 그린다. 불행하게도 이 화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당대의 감식안들에게 절찬을 받았던 모양이다. 겸재가 진경산수로 세상에 알려지고 칭송받는 것은 사실상 이 작품부터였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 김정중 -
▣ 김정중 -
▣ 김윤만 -
▣ 김윤식 -
■ 노은정 소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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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佐(정좌)는 호居由窩(거유와)로 종형 정화와 함께 한수재 권상하에게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고, 판서 권상유가 벼슬할 것을 권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시인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에 올랐는데 정좌가 "金剛山夕陽影裡僧歸寺流水聲中馬渡橋"라고 시를 읊으니 ★이병연이 "나는 자네의 시를 도저히 따를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 金剛山---金鼎佐(김정좌)
夕陽影裡僧歸寺 /석양영매승귀사
流水聲中馬渡橋 /유수성중마도교
석양(夕陽)의 그림자 속에
중은 절로 돌아가고,
흐르는 물소리 가운데에
말(馬)은 다리를 건너간다.
■화인열전1 (유홍준, 2001.6-3쇄)
겸재 정선
p.202
사천 이병연과의 만남
그러나 ★겸재가 화법을 익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연 문하생으로 겸재보다 5년 연상이며 평생지기가 된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병연은 훗날 시에서 대가가 되어 당대에 "시에서 이병연, 그림에서 정선"으로 병칭되었다.
이병연은 본관은 한사, 자는 일원(一源)이라 했다. 169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금화현감, 배천군수, 사복시 주부를 거쳐 삼척부사(정3품)까지 올랐으며, 그가 남긴 시는 무려 1만 3,000수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실록> 졸기에 오를 정도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각기병에 걸릴 정도로 술을 좋아했던 풍류인이었다. 그의 시를 두고 홍낙순은 <사천詩艸> 발문에서 남송의 애국시인 육유에 비교하였으니 이병연의 시에 어린 민족적 성격은 겸재 진경산수의 그것에 비견할 만하다 (정옥자, [조선후기 지성사], 일지사, 1991)
★이병연은 또한 그림 수집에도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의 벗인 담헌 이하곤(1677-1724)과 서암 신정하(1680-1715)는 이병연의 그림 보는 눈이 약하다고 빈정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훗날 겸재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수장가였다.
그리고 이병연 집안에는 송나라 마원의 <산수>, 원나라 조맹부의 <말 그림>, 원나라 전선의<산수> 같은 송 원 명적과 명나라 구영의 <청명상하도> 같은 진적들이 많이 수장되어 있었다. (박효은, [조선후기 문인들의 서화수집 활동연구], 홍익대 대학원, 1999) 이러한 그림들이 겸재에게 준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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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겸재의 30대 행적에서 진경산수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만은 명확히 알려져 있다. 그것은 두 차례에 걸친 금강행이다. 겸재는 36세때인 1711년에 1차 금강산 유람을 했고, 또 이듬해인 1712년에 2차 금강산을 유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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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은 금강산 狂이었다. 그는 바로 전해인 1710년에 다녀왔는데, 환갑을 바라보는 노령에 또다시 여섯 번째로 금강산을 연이어 찾은 것이다. 그때 마침 사천 ★이병연은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있었다.
이병연은 1710년 5월부터 1715년 5월까지 5년간 금화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그의 많은 詩友들이 이처럼 금강산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겸재의 1차 신묘년 금강행에 대해서는 정확한 일정이나 주고받은 시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 13폭이 들어 있는 [신묘년 풍악도첩]이 전해지고 있어 겸재의 진경산수를 연구하는 데 길잡이가 되고 있다. 이 화첩은 현재까지 알려진 겸재의 기년 작품중 가장 빠른 것이기도 하다.
p.217
★겸재는 금강산에 매우 심취했던 모양이다. 화가로서 자신의 기량과 취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그보다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겸재는 신묘년 제1차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지 1년 뒤인 임진년(1712) 8월에 다시 가을 금강산을 보러 가게 된다.
이번 일행은 사천 ★이병연의 부친인 수암 이속(1647-1720), 동생인 순암 이병생(1675-1735) 그리고 후배 시인인 국계 장응두(1620-1729) 등 4인이었다. 아마도 금화현감 이병연이 부친과 동생, 벗과 후배를 초청한 것이리라.
겸재는 2차 금강행에서 그 유명한 [해악전신첩]을 그린다. 불행하게도 이 화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당대의 감식안들에게 절찬을 받았던 모양이다. 겸재가 진경산수로 세상에 알려지고 칭송받는 것은 사실상 이 작품부터였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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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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