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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빈 김씨 폐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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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09-30 05:18 조회1,6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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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왕실과 외척 (2003.5월 3쇄, 박영규, 김영사)



七. 세종시대 왕실내부의 주요사건



●휘빈 김씨 폐빈사건



세종은 재위9년(1427년)에 ★세자 향(후의 문종)을 장가 들였는데, 세자빈으로 간책된 사람은 돈녕부판사 ★김구덕의 손녀이자, ★김오문의 딸이었다. 김씨는 그해 4월에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휘빈(徽嬪)의 작호를 받았다. 그녀의 할아버지 ★김구덕이 이듬해 4월 3일에 죽자 김씨는 세자빈의 신분으로 장례에 참여했고, 세자 향 또한 조상했다.



그러나 김씨의 동궁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동궁에 들어온지 2년 3개월 만인 1429년 7월 18일에 사가로 내쫓긴 것이다. 세종은 곧 휘빈을 폐하고 다음날인 7월 19일에 폐빈한 사실을 종묘에 고하도록 조처했다. 폐빈의 사유는 세자빈이 덕을 잃어 세자의 배필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폐빈에 조정 대신들이 의아해하자, 7월 20일에 세종은 직접 그 사유를 해명했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씨를 누대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세자빈으로 간택하였더니, 뜻밖에도 김씨가 저 혼자 세자에게 곱게 보이려고 사람을 미혹하는 술법을 쓴 사실이 발각되었다."



비록 가례는 올렸지만 세자 향은 휘빈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를 질투하여 휘빈은 술법을 통해 사랑을 얻는 방법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휘빈이 사용한 술책은 시녀 호초를 통해 알게 된 것이라 하자 세종은 호초를 심문했다. "네가 휘빈에게 술책을 알려줬다고 하는데, 사실이냐?"



세종이 다그치자, 호초가 대답했다. "작년 겨울에 주빈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받은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후에 다시 주빈께서 강요했기에 일러줬습니다."



그녀가 가르쳐준 술법의 내용인즉, 세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을 잘라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낸 뒤 술에 타서 세자에게 먹이면 세자는 휘빈만 좋아하게 되고, 신발 주인은 다시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휘빈은 곧 세자가 좋아하는 효동과 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져다가 손수 잘라서 숨겨 두고 있었는데, 기회가 생기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휘빈은 결국 다른 술책을 묻기에 이르렀는데, 호초는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액을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호초가 일러준 이 두 술책 중 첫 번째 것은 박신의 첩 종가이에게, 두 번째 것은 정효문의 기생 첩 하봉래에게 들은 것이라 했다.



휘빈의 여종 순덕이 나중에 이 일을 알고 잘라낸 신발을 감춰두었는데, 세종이 그녀를 불러 심문하자 가져와 바쳤다. 이렇듯 명백한 증거물까지 획득한 세종은 김씨가 요사스럽고 덕행이 없다 하여 폐빈하고 사가로 내쫓았다.





●순빈 봉씨 폐빈사건



휘빈을 쫓아낸 세종은 다시 며느리를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순빈 봉씨이다. 순빈은 봉여의 딸인데, 별로 직책이 높지 않았던 봉여는 딸이 세자빈에 오르면서 2품 직책으로 벼슬이 뛰었다.



순빈이 세자빈에 책봉된 것은 휘빈이 쫓겨난지 3개월이 채 못 된 1429년 10월 15일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폐빈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녀는 세자빈으로 책봉된지 7년후인 1436년 11월 4일에 폐출되었다.



그녀의 폐출에 대해 세종은 한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그 내용을 알고자 하자, 세종은 11월 17일에 교지로써 알렸다. "처음에 김씨를 폐하고 봉씨를 세울 적엔 옛 훈계를 알아서 경계하고 조심하여 이후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뛰어안 여인으로 스승을 삼아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하지만 순빈은 며칠 만에 열녀전을 마당에 집어 던지고, "내가 어찌 이런 것을 배워 제대로 살겠는가?"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열녀전>을 가르치게 한 것은 세종의 뜻이었는데, 순빈이 책을 집어 던졌다는 소리를 듣고 세종은 노발대발했다.



사실 순빈이 열녀전을 집어 던진 것은 그 내용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세자 향은 원래부터 여자를 잘 가까이 하지 않는 데다 순빈의 처소는 아예 찾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순빈은 열녀전 따위를 아무리 읽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뜻으로 책을 집어 던진 것이다.



그뒤로 순빈은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래를 지어 시녀에게 부르게 하기도 하고, 시중 드는 노파를 시켜 세자를 자기 처소로 이끌고 오도록 강압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세자는 여전히 순빈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절망한 순빈은 그 뒤로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 바람에 그녀는 몇 년 사이에 술 중독 증세를 보였고, 심지어 세자가 좋아하는 궁인들을 죽도록 두들겨 패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세종은 곧장 그녀를 폐출시켰다.





휘빈과 순빈의 폐출은 세자 향(문종)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게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아내를 맞이하고도 거들떠 보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두 세자빈은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다 폐출된 것이다.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9세에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광주·♠청주목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1401년 태종 11)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1414년)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다.











▣ 김윤만 -

▣ 김상석 - 안타까운 사연이 선초에 있었군요?.

▣ 김항용 - 이런 일이 있었다니---

▣ 김윤식 -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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