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돈 묘지명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09-30 19:39 조회1,665회 댓글0건본문
■김용선의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김영돈 묘지명
지정8년 8월 일
安震 찬
김영돈 묘지명은 조선순조8년 (1808, 술진)에 발견되었는데 탈락된 부분이 여러 군데 있으며, 현재 족보에 수록된 명문 가운데에도 오식 혹은 탈자가 되었다고 믿어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金永暾은 고려사에는 金永旽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고려사 104의 김방경전에 부전되어 있다. 그는 26세인 충렬왕31년 (1395, 원 대덕4년, 을사)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충목왕4년 (1348)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그는 申汝岡의 녀와 결혼하여 2녀1남을 두었다.
김영돈의 묘지명은 그의 조부 김방경의 행장을 찬하였던 安震이 찬하였다.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2001.12월, 김용선,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929
265. 김영돈(金永暾) 묘지명
-전거 : 안동김씨대동보(1980)
-연대 : 충목왕4년(1348)
원 고려국(有元 高麗國1>) 추충병의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 김공(金公) 묘지명 및 서문
공의 이름은 영돈(永暾2>)이고, 자는 휘곡(暉谷)이며, 그 선대는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敬順王)로부터 나왔다. □□□□□□□□왕(王)이 중세에 혼인하였기 때문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 부(府)는 지금의 복주목(福州牧)이다. 13대손인 판도첨의사사 □□□□ 방경(方慶3>)이 상국(上國, 元)이 일본을 정벌할 때에 □□□ 관군을 도와 수전(水戰)에 공이 있었으므로, 천자가 중봉대부 관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을 제수하였다. □□□□□ 막내인 순(恂4>)은 벼슬이 판삼사 보문각대제학 상락군에 이르렀는데, 바로 공의 아버지가 된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절도가 있었고, 그 학문은 □□□□□□□ 하였다. 대덕(大德5>) 을사면(충렬31, 1305)에 과거에 급제하여6> 복원궁(福源宮)□□□□을 거쳐 가순부승이 되었다. 연우(延祐7>) 병진년(충숙3, 1316)에는 충숙왕을 수행하여 원의 서울에 들어가서 가례(嘉禮)를 청하여 공주(삼수변+僕國長公主)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은 일등공신으로 책봉되고 토지와 노비와 녹권(錄券)을 하사받았다. 다시 액정내알자감으로 옮기고, 지합주사8>로 나갔는데 □□위엄이 있고 은혜로우니 고을이 편안해 하였으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 덕을 노래하고 있다. 임기가 차자 언부산랑에 제수되었다가 민부로 옮기고, 얼마 뒤 다시 언부직랑이 되었다. 감찰□□로 옮기고, □□전라□가 되어 군현을 다니며 살피다가 문득 노하여 꾸짖으며,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은혜로이 보살펴 주어 염치가 있고 삼가게 하여 왕화(王化)를 얻게 하여야 하니, 수령은 □직책으로 □다시 소생시켜야 한다." 고 말하였다. □□전교부령이 되었다가 전법총랑으로 옮겼다.
후지원(後至元)9> 무인년(충숙복위6, 1338)에 소부판사가 되고, 기묘년(충숙복위8, 1339)에는 종부부령으로 바뀌었으며, 사신으로 원의 서울에 들어가 도(都)□□에 머무르다가 뒤에(충혜왕이) 원의 조정에 들어올 때 수행하였다. 경진년(충혜1, 1340)에 임금이 즉위하자 □도첨의평리가 되고, 이해 가을 □□에 마침내 □□□사로 옮겼다.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되어 이공수(李公遂)등 12명을 뽑았는데10>, 그 금□가 엄숙하니 사림(士林)들이 칭찬하여 □□라고 하였다.
지정(至正)11> 신사년(충혜복위2, 1341)에 추성벽의익찬공신 상락부원군으로 □직□연□□□□, 공은 (지방으로)나가 □합□ 남쪽의 백성에게 쌍여 있는 폐단을 모두다 없애은데 뜻을 두니, 마치 엉킨 실을 푸는 것과 같았다. □□□□□□□□ 음식과 잔치와 사냥을 모두 물리치고 □□하지 않았다. 근래에 □부터 이듬해에 이르기까지 □해□□진하여 임금이 내주(內酒)를 □□(하사하고?) 부지런하게 설득하였으므로 1년을 다시 머물렀다.
병술년(충목2, 1346)에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전춘추관사가 되고, □월에 원의 서울로 갔다. 천자가 불러 □불□□무하니, 황제가 그 충직함을 가상하게 여겨 □백□를 맡아 □□지(旨)를 정리하였다. 공이 고려로 돌아와 □□□□ 임금에게 아뢰니, □□□ 정리도감에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을 호소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 공은 좌정승이 되었다. 이에 관원을 가려서 그들과 더부러 끝까지 파고들어 사람들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시비를 가렸으며, 속이거나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니, 권세를 가진 자들의 원망과 비방이 모두 공의 몸으로 쏠리게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어주(御酒)와 어의(御衣)를 내리니 원로(耆老)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탄식하였다. 이미 여러 사람의 노여움으로 □ 어렵게 되자 공은 □ 배척당하게 되어, 7월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이 되고 공신의 호칭은 전과 같았으나, 마침내 종적을 감추고 두문불출하면서 다시는 정리(整理, 정리도감)에 참여하지 않았다.12> 그 □ 억울함을 풀지 못한 자들도 □ 임금이 공을 기용함으로써 우리의 가슴을 씻어 주었다.
공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13>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매번 문득 가면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무르니 마치 장차 세상을 버린 것 같았다. 청탁을 □(가려내고?)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다. 무자년(충목4, 1348) 7월 무신일에 병이 들어 돌아가시니, 춘추가 64세이다. 빈소를 성 안의 공의 집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슬퍼하고 서로 조문하였다.
어머니는 양천14>허씨로 도첨의중찬 공(珙)15>의 딸이다
공은 생김새가 단정하고 청렴하였으며 과단성이 있었다. 친족과 외족은 지위가 높고 현달하였지만 스스로 거만하지 않고, 옷을 입어도 화려하지 않았다. 음식은 진미를 찾지 않았고, 재물에 이르러서는 구하지도 아니하고 늘리지도 아니하였다. 친족을 대할 때에도 매우 화목하게 하여서, 비록 식사하고 잠자는 사이에라도 구태여 손님이 왔다고 알리면 반드시 앞에 나가 (이름을) 부르면서 반가워하였다. □□부지□. 만일 사대부의 행실이 나쁘거나 그 잘못을 덮고자 하면 반드시 마주 대하여 침을 뱉고 욕을 하였으므로, 당시의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깊이 미워하였다.
부인 신씨(申氏)는 판도사랑 여강(汝岡)의 딸로 이천군에 봉해졌으며,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통례문판관 오원경(吳元敬)에게 시집갔으나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삼사판관 윤식(尹湜)에게 시집갔다. 아들 진(縝)은 장복직강인데 우대헌 유보발(柳甫發)16>의 딸과 결혼하였다. 공이 일찍이 나(=안진)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년에 아들 하나늘 얻었는데 장차 □업(家業?)을 일으킬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8월 병술일에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내(=안진)가 이미 공을 만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그 행적을 자세하게 적었다.
명(銘)하여 이른다.
풍채는 크고 당당하며, 성품은 곧고 □하였으며
조정에 □들어가니 만민이 우러러 보았다.
나라의 원로로 부름을 받고 천자에게 아뢰어 정치를 펴니
마침내 □지가 내려 바로 잡아 다스리게 하였도다.
권세있는 자가 질시하였으나 어그러진 것을 끝까지 파고들었는데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태산(泰山)이 뒤집어지도다.
생전의 덕행을 아로새겼으니 함께 끝없이 빛날 것이며
선을 쌓은 보답으로 자손도 창성하리로다.
지정(至正) 8년 (충목4, 1348) 8월 일
칙수 장사랑 광정대부 검교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이 짓다.
<참고>
[고려사]104 김방경전 附 김영旽전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117, 1988)
▣ 김항용 -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윤만 -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솔내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