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원류.지류를찾아(박씨왕계750년만에재등장)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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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3-10-01 02:36 조회1,462회 댓글0건본문
[2003/9/30]
[우리 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31] 朴氏王계 750년만에 재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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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나귀의 것처럼 되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홀로 알고 있던 복두장(관모를 만드는 사람)은 죽기 직전 대밭 속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경문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 나무를 심었다. 즉위한 후 갑자기 ‘귀가 길어졌다’는 사실이나 경문왕이 ‘이 소리를 듣기 싫어했다’는 기록들은 경문왕의 정통성에 대한 비방일 가능성을 말해준다. 경문왕이 재위 15년 만에 사망하고 뒤를 이은 인물이 태자 헌강왕인데 이때의 신라는 촛불의 마지막 불꽃처럼 화려했다. 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신라는 재해와 반란으로 점철되던 나라였다. 그런데 헌강왕 때의 일을 기록한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는 이 책 전편에 걸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등장한다. ‘제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서라벌에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 기록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태평성대를 묘사해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헌강왕 6년(880)조에는 ‘왕이 측근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라벌 주민들의 가옥이 즐비하고 노래와 풍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통일 이후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자 시작이기도 했던 신라는 활발한 상업활동의 결과 커다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번영은 진골 귀족과 서라벌 일부 백성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서라벌 이외의 백성들, 특히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의 백성들은 연이은 재해와 흉년 때문에 극심한 민생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신라는 통일 후 이 지역의 백성들을 화학적으로 통합하지 못하고 단지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데 그치고 있었는데, 이는 신라의 안정에 큰 위협 요소였다. 게다가 신라 내부에서도 신라는 진골 위주의 폐쇄적인 지배체제를 고집했다. 당나라에 유학해 선진 학문과 행정을 경험한 6두품 출신 지식인들까지 신라의 상층부에 진입할 수 없었다. 이처럼 외부에 폐쇄적인 진골들은 왕위를 둘러싼 자기 항쟁에 영일이 없었다. 그 사이 지방에서는 백성들의 봉기가 잇따르고 호족들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지방을 장악해 나갔다. 헌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동생 정강왕은 재위 2년 만에 여동생 진성을 후사로 지명하고 세상을 떠난다. “(진성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장부와 같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선덕·진덕여왕의 고사를 본받아 그를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란 것이 정강왕의 유언이었다. 이렇게 즉위한 신라의 세번째 여제 진성여왕은 민심을 잡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서둘렀다. 즉위 직후 대사면을 실시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 동안 면제했다. 그러나 재위 3년째(889) 신라는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등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는 ‘풍악과 노래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는 헌강왕 6년에서 불과 9년 후였다. 국가에서 국세 납부를 독촉하자 각지에서 봉기로 답했다는 사실은 이미 정상적인 국가체제가 붕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진성여왕 5년 겨울에 북원(北原:충주)에서 양길이 궁예를 시켜 명주(溟州:강릉) 동쪽 부락과 명주 관내의 주현들을 습격하고, 이듬해에는 완산(完山:전주)에서 견훤이 후백제를 자칭하니 무주(武州:강주) 동남쪽 군현들이 이에 항복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220여년 만에 후삼국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처럼 전국이 혼란에 빠져들자 진성여왕은 승부수를 던졌다. 최치원의 머리를 빌리는 것이었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문명을 날린 최치원은 헌강왕 11년(885) 17년간의 체당(滯唐)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쌓은 학문과 행정 경험을 신라를 위해 사용하고 싶었으나 6두품이란 이유로 좌절되고 대산군(大山郡:전북 태인) 태수 등 지방관을 전전했다. 후삼국시대가 도래하자 진성여왕은 재위 8년 최치원에게 시무책 작성을 명했다. 최치원이 11개조의 시무책을 작성해 올리자 진성여왕이 이를 즉시 가납하고 그를 아찬으로 삼은 것은 이 시무책을 로드맵으로 삼아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최치원의 시무책에는 신분보다는 능력을 위주로 인재를 등용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결국 진골의 특권 축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심한 반대를 받았다. 이후 최치원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대로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으며, 산림과 강가, 해변을 소요 방랑하며 정자를 짓고 소나무를 심으면서 …’ 여생을 보내게 된다. 가슴 뜨거운 지식인이 버린 사회는 하늘의 버림을 받게 마련이었다. 최치원의 시무책으로 신라를 개혁하려던 마지막 승부수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진성여왕은 재위 11년(897) “근년 이래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것은 모두 나의 부덕(不德) 때문”이라며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에게 양위했다. 옛날 헌강왕이 사냥을 나섰다가 길가에서 한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뒷수레에 태운 다음 유숙하는 장막에 이르러 야합(野合)해 낳은 아이가 요(嶢)였다. 진성여왕은 기록상 두 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으나 아들 대신 조카를 세웠는데, ‘삼국사기’는 그 이유를 여왕 집안의 골격에서 찾고 있다. 여왕은 민간에서 자라던 요의 체격이 장성하다는 말을 듣고 궁내로 불러들여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났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다”라면서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여왕이 아들 대신 건장한 골격의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줬다고 회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골이 장대한 효공왕 때 궁예와 견훤은 오히려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궁예는 효공왕 재위 2년 7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빼앗고 송악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후 궁예는 무서운 속도로 신라의 지방군현들을 점령했다. 재위 9년 궁예는 세력을 확장해 죽령 동북지역까지 이르렀는데, ‘삼국사기’는 이때의 상황을 ‘효공왕은 국토 강역이 날로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매우 근심했으나 그를 막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성주들에게 명령해서 아예 나가 싸우지 말고 보루를 단속해서 굳게 지키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재위 11년에는 견훤도 일선군 이남 10여성을 빼앗았다. 효공왕은 이런 상황에 좌절했는지 재위 15년 천첩(賤妾)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대신 은영(殷影)이 그 중지를 간했으나 듣지 않자 은영은 그 천첩을 죽여버린다. 이처럼 사방에 반란군이 들끓는데 국왕은 천첩에게 혹하고, 대신이 그 천첩을 죽여버려도 문제가 안될 만큼 신라 왕실은 아무런 원칙이 없었다. 효공왕은 재위 14년(912) 만에 사망하는데 그 뒤를 이은 인물은 뜻밖에도 박씨인 신덕왕이었다. 이로써 154년 제8대 아달라왕이 박씨로서 즉위한 지 무려 750여년 만에 박씨 왕계가 다시 등장했다. ‘삼국사기’는 ‘효공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추대했다’고 간단하게 적고 있으나 왕위 다툼에 영일이 없던 진골 귀족들이 박씨를 추대했다는 것은 남다른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만에 왕위에 오른 박씨 왕계는 난국 극복을 위한 등장이라기보다는 무너지는 제국의 뒤치다꺼리를 위한 등장이었다. 신덕왕의 뒤를 맏아들 경명왕이 이었고, 그 뒤를 경명왕의 동복아우가 이었으니 그가 바로 비운의 임금 경애왕이었다. 경애왕 4년(927) 후백제의 견훤은 서라벌까지 침입해 경애왕을 자결케 하고 왕비를 욕보였던 것이다. 이때 후백제에 사로잡힌 신라인들은 귀천을 무릅쓰고 노비가 되기를 자청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하니 과거 삼국을 통일했던 화랑의 감투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신라의 3가지 보물 왕건이 신라 사신 김율에게 말한 ‘장륙(丈六)불상과 황룡사 9층탑과 성대(聖帶:성스러운 띠)’가 그것이다. 경명왕과 대신들은 황룡사의 90세 승려의 말을 듣고 성대가 진평대왕의 허리띠임을 알고 제사를 지낸 후 겨우 찾아냈는데, 보통사람은 띨 수 없을 정도로 긴 것이었다. 경명왕은 이 띠가 신라를 구원해주기를 바랐으나 “신라의 3가지 보물이란 역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사치품일 뿐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찌 꼭 필요한 것이겠는가”라는 김부식의 평대로 오직 좋은 정사만이 나라의 보배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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