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연극(최명희 작) 대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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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10-01 00:39 조회2,066회 댓글0건본문
지난 9월 13일 <문예회관>에서 관람한 허난설헌의 연극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의 작가 최명희님께서 약속대로 대본을 보내오셨습니다. 이에 알려 드립니다. 다시한번 최명희님께 감사드립니다.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
1. 공연 일시 : 2003. 8. 27--9. 14
2. 공연 장소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문예진흥원> 여인극장
작가 최명희
<등장인물>
난설헌2 .. 여, 20대 중 ~ 27세, 내레이터를 겸함.
난설헌1 .. 여, 15세 ~ 20대 초
시모 .. 여, 3 ~ 40대, 난설헌의 시모
성립 .. 남, 15 ~ 27세, 난설헌의 남편
언년이 .. 여, 9 ~ 21세, 난설헌의 몸종
귀동어미.. 여, 3 ~ 40대, 김씨가의 비
하곡 .. 남, 2 ~ 30대, 난설헌의 오라버니
친모 .. 여, 3 ~ 40대, 난설헌의 친모
손곡 .. 남, 3 ~ 40대, 시인
균 .. 남, 14세, 21세, 난설헌의 오라비
시부 .. 남, 30대, 난설헌의 시부
매헌, 우천 .. 남, 20세쯤, 성립의 친구들
? 출연배우들의 실제 나이는 대략 10세 정도 많은 것이 좋을 듯 싶음.
<무대>
무대 위 건조물은 조선 중기 (16세기 후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일부. 무대 오른쪽으로 광의 문을 포함한 그 반(半)이 보이고, 왼쪽으로 이 또한 방의 일부가 보이며, 그 오른쪽 옆 방이 웃방으로 그 옆의 마루(광과 웃방을 이어주는)와 함께 이 연극의 주요 무대이다.
마루 아래 댓돌이, 마루와 웃방 사이에 문이 있다. 광, 마루, 웃방, 또 그 옆방이 일자로 나란히 있으며, 다만 광이 조금 안 쪽으로 들어가 있다. 일자로 나란히 놓인 건조물들의 앞, 곧 객석 쪽 공간을 뜰로 가정한다.
마루에는 다용도 찬장 그리고 자그마한 찻상 하나와 물시계를 포함하는 최소한의 집기들이 놓이고, 웃방 안엔 장, 궤, 서안, 병풍, 벽장 등이 있다.
주인공 등의 시(詩)를 소개하기 위한 screen이 필요하다. 위에서 내려오고, 쓰이고 난 후에는 다시 말려올라가는 것이 좋을 듯.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난설헌2, 웃방 문 열고 나와 마루를 통해 뜰로 나온다. 뜰은 객석 쪽으로 가정한다. 그녀, 무대 끝 가까이에 쭈그리고 앉는다.)
난설헌2 (그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면서) 봉선화야, 금잔화, 채송화, 다들 잘 있었니?
언년이 (21세)(등장하면서 그녀를 보고 몹씨 반가워한다.) 아씨마님, 일어나셨어요?
난설헌2 (일어나 마루 쪽으로 가면서) 바야흐로 녹음방초 호시절이구나!
언년이 네 아씨마님!
난설헌2 (도중에 조금 휘청한다.)
언년이 (그녀를 부축하여 마루로 간다.)
난설헌2 여기 좀 앉아있자꾸나.
(둘, 나란히 마루 끝에 앉고)
난설헌2 어머님은 좀 어떻하시더냐?
언년이 간신히 일어나 죽 몇 숟깔 뜨셨네요.
난설헌2 그 분 스스로 그리 하시더냐?
언년이 웬걸요? 지가 (시늉하며) 이렇게 싹싹 빌었구만요. 제발 좀 드시라구요.
난설헌2 수고 많았다.
언년이 아씨께서 마님 뵈러 가도 되겠느냐 여쭸더니, 여전히 아무 말씀 없으시데요.
난설헌2 ...
언년이 어서 방으로 드셔서 죽이라도 좀 ..
난설헌2 됐다. 조금만 더 이렇게 앉아 있자꾸나.
(사이)
(무대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저는 조선 14대 선조 임금 때 살던 허난설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식으로 따져 16세기 후반을 살았었다 이렇게 되나요? 전 강릉의 초당공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나 어렸을 때 서울 인현동으로 옮겨 살다가 경기도 광주에 주소지를 둔 김씨 가문에 시집온지 어느덧 12년이 됐군요.
제가 이 댁에 시집온 다음 날 일이었읍니다.
그날 아침 시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저는 친정에서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아까 보신 그 아이 언년이, 그땐 겨우 아홉살 밖에 안된 그 애의 시중을 받으면서 얼굴 단장을 하고 있었죠.
(무대에 다시 조명 들어오면
웃방에서 난설헌1, 언년이(9세)의 시중을 받아가며 얼굴단장을 하고있다. 방 안 곳곳에
서책들이 잔뜩 쌓여있고 서안 위에도 쌓여있으며 어떤 것들은 펼쳐져있다.)
난설헌2 (웃방 쪽을 보고있다가) 보십시오, 저 화사하고 발랄하며 터질 듯 난만한 행복에의 기대! 방년 15세 어린 새악씨의 얼굴 가득한 저 사랑스러움! 저한테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게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spot 꺼진다.)
(웃방. 난설헌1의 얼굴 단장이 끝나자 언년이, 그녀의 머리 위에 어여머리(장식용 가발)를
얹고 그 위에 화관을 씌운다. 화관은 예쁜 중간 색조의 들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언년이 아유, 어쩜 이렇게두 예쁘시대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으시네요 아씨마님?
난설헌1 어머님이 부엌으로 오라 이르셨지? 어서 가 보거라.
언년이 네, 아시마님! (일어나 마루를 거쳐 퇴장한다.)
난설헌1 (뒷정리하는데)
시모 (등장한다. 마루로 올라 방문 앞에 서서) 악아,
난설헌1 (못 듣는다.)
시모 악아,
난설헌1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예 어머님! (방문 연다.)
(시모 들어선다. 난설헌1 뒤로 물러서고, 시모 아랫목에 좌정한다. 난설헌1 시모의 앞에 공
손한 자세로 마주앉아 해맑은 미소로 시모의 눈 마주 본다. 시모, 흠칫한다. 곧 수습하고)
시모 어여머리가 예쁘구나. 혼례때 내 정신이 없어 잘 못 보았는데 이제 보니 참으로 어여쁘기 짝이 없구나! 훗날 우리 성립이가 당상관이 되면 그땐 그것을 상시(常時)에 하고 있어도 되니 앞으로 꼭 그리 되도록 네 남편을 잘 내조해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난설헌1 예 어머님.
시모 그래 어떠냐? 불편한 것은 없느냐?
난설헌1 없읍니다 어머님.
시모 그래? .. 네가 훌륭한 가문의 규수이니 내 길게 말하진 않겠다. 다만, 네가 일찍부터 수많은 서책을 접하고 시사(詩詞)에 유별난 재주가 있다고 들었다. 남다른 재주에 부지런한 독서, 다 좋다. 허나, 아녀자의 본분이 무엇이냐, 첫째, 삼종지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난설헌1 허지만 어머님,
시모 왜 그러느냐?
난설헌1 아녀자란 여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시모 (말 가로채듯) 뭐라고? 여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
난설헌1 제 말씀은, 저나 어머님이나 다 같은 여인이온데 기왕이면, (시모의 기분 알아채고 고개 숙인다.)
시모 .... 아내된 자, 며느리된 자, 어미된 자의 소임이 무엇이냐, 자신을 낮추고 밑거름으로 하여 가문을 융성케함이요, 늘 가솔들의 의식주를 위해 힘써 일하며, 접빈객 봉제사에 한 점 흐트러짐이 있어서도 안될 것이다. 알겠느냐?
난설헌1 (눈 들어 맑게 마주치며) 예 어머님!
시모 시집 와 새로이 인연 맺은 식구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떠받들며, 그를 행함에 있어 자신의 그 무엇도 아낌이 없어야 하느니라. 당연히 하루를 열흘처럼 쪼개 써도 시간은 부족할 터. 시사에 뜻을 두고 독서에 빠져들 여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은 창기(娼妓)들에게나 합당한 것,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해도 이 집안 며느리로선 절대로 허락될 수 없다. 알겠느냐?
난설헌1 ...
시모 왜 대답이 없느냐? 그리 못하겠다,
난설헌1 아닙니다 어머님.
시모 그럼 내게 약속할 수 있느냐?
난설헌1 어머님,
시모 그래.
난설헌1 집안일을 게을리 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니 아울러 책을 읽고 시사 짓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시모 (단호하게) 안 된다. 어쩌다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열 번 되는 것. 아얘 싹 잊고 삶이 네 신상에 좋을 게다.
난설헌1 (뭐라 말하려는데)
시모 (말 가로채어) 됐다. 그만 접도록 하자.
난설헌1 (고개 숙인다.)
(무대 암전되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늦은 밤. 마루에서 제사준비가 한창이다.
난설헌1, 머릿수건과 앞치마 두르고 앉아 익힌 녹두 반죽을 가늘게 채썰고 있다. 솜씨가 고르
지 못하며, 가끔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그 옆에서, 역시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귀동어미가 찹쌀 반죽으로 유과를 빚어 상 위에 늘
어 놓는다. 그 옆에 언년이(9세)가 앉아 귀동어미 하는 것을 따라 하고 있다.
시모 등장한다. 이들이 하는 양을 보다가)
시모 언년아,
언년이 (놀라) 예 마님!
시모 일어나거라!
언년이 (벌떡 일어난다.)
시모 넌 부엌에나 가 보거라.
언년이 예. (서둘러 퇴장한다.)
시모 제삿 상에 놓을 음식은 종들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나 손 대는 게 아니다. 어린 것이 몰라 덤비더라도 귀동어미 네가 말렸어야지.
귀동어미 네 마님.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님.
시모 (난설헌1에게) 넌 어째 채써는 솜씨가, 쯧쯧 ..
난설헌1 (더욱 조심하여 채썬다.)
시모 (돌아서며) 일이 늦구나. 빨리들 서둘러라.
(둘이서 동시에)
난설헌1 네 어머님.
귀동어미 네 마님.
(시모 퇴장하고)
(사이)
난설헌1 (꾸뻑 존다.)
귀동어미 이그, 졸립기두 허겠지. 새색씨가 시집오구부터 원 잠이라구 몇 식경이나 자봤어야지? 허기사 시집살이가 달래 시집살인감? ... 제사에 웬 화면(花麵)이냐 어리둥절하겠네? 그게 이 댁 자랑꺼리라서 그래.아 제사 지내러 오시는 어른 양반들이 이 댁 화면 맛에 반해 가지구 오죽허면 제사보다 잿밥이라구들 헐까. 헌데 새애기씨,
난설헌1 네?
귀동어미 새애기씨 시집 올 때 가져온 서책이 만 권이나 된다는 그 말, 사실이유?
난설헌1 어떻게 만 권이 되겠어요? 수레 몇 대분이랬자 수레 한 대에 몇 권이나 담긴다고 ..
귀동어미 그렇지? 만 권은 좀 너무 했다 싶더라니 .. 허지만, 이름이 세 개 씩이나 된다던데, 그건 맞지?
난설헌1 ... 네.
귀동어미 초희, 난설헌, 그리구 .. 또 뭐더라?
난설헌1 경번이요.
귀동어미 그 그래 경번. 내 듣구두 또 깜빡 했네. 정말 새애기씬 욕심두 많구먼. 양갓집 태생이래두 여자 몸이면 평생 하나 지니기두 힘든 이름을 세개씩이나 지닌걸 보면.
난설헌1 (꾸뻑꾸뻑 조느라 귀동어미 말을 잘 듣지 못한다.)
귀동어미 내 처지에 언감생심 헐 소리는 아니나, 그저 난 부럽기만 허구먼.
난설헌1 (졸다가 칼에 손가락을 베어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싸쥔다.)
귀동어미 저런! (재빨리 치마 허리에서 무명천 조각을 꺼내 쭉 찢어 지혈해준다.)
(둘, 하던 일 계속하며)
난설헌1 고마워요, 귀동어미.
귀동어미 뭘 .. 졸립긴 허지, 일은 급허지 ..
난설헌1 제가 일이 더뎌서요.
귀동어미 아직 일이 몸에 배질 않아 그렇지 뭐. (물시계 쪽을 보고) 아유 벌써 인시(寅時)가 다 돼가네? (남은 일깜을 보고) 해두 해두 끝이 없네? 이러다 밤 새겠네? 새애기씨, 남은 건 내가 어째 볼 테니 그만 일어서.
난설헌1 안 돼요. 이 많은 걸 어떻게 ..
귀동어미 (서둘러 챙기면서) 아냐, 저기 가면 일손 빠른 것들이 두엇 있어. 내 요령껏 해볼 테니, 아무 걱정 마. 어서 들어가 눈 좀 붙이라구. 어서.
난설헌1 (엉거주춤하는데)
귀동어미 (챙겨들고 나가며) 어서 들어가 자. 낼 보자구.
(난설헌1, 서서 귀동어미의 뒷 모습 보다가 웃방으로 들어가면
웃방에 흐린 조명.
난설헌1 무심코 들어가는데, 몰래 들어와 누워있는 성립(15세)에 걸려 넘어진다.)
난설헌1 아이구머니나!
성립 (그녀를 꽉 껴안는다.)
난설헌1 (목소리 죽여) 매일 밤 이러시면 어머님한테 정말 큰 꾸중 듣고 말겠어요.
성립 (목소리 죽여) 꾸중 하시라지. 이쁜 내 색씨가 재워줘야지 공부두 잘 되는 걸 난들 어쩌라구. (성급하게 그녀의 저고리 고름을 푸는데) (그녀는 졸고있다.)
성립 아니, 이 보오 부인!
난설헌1 (눈 뜨고, 졸음을 참으며) 네 서방님.
성립 그렇게도 졸리오? (계속 조는 그녀를 흔들어대며) 이 보오, 이 보오 부인!
난설헌1 (눈 뜨고) 네 서방님.
성립 나요, 나란 말요, 성립이.
난설헌1 네 알아요, 서방님.
성립 (좀더 꽉 껴안으며) 우리 어머니가 부인 잠도 못 자게 하고 밤낮 일만 시켰구려. 정말 미안하오.
난설헌1 아 아녜요. (애써 눈 떠 그를 본다.)
성립 오, 부인의 눈은 어쩌면 그리도 맑은 거요? 대여섯살 어린아이와도 같은 눈이오. 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샛별만 같구려, 오오! (그녀를 안고 딩굴다가) (다시 뚫어져라 그녀의 눈을 보면서) 부인!
난설헌1 네.
성립 아니, 난설헌!
난설헌1 네.
성립 아 아니오. 초희, 초희가 제일 이쁜 이름이오. 초희라고 부르고 싶소.
난설헌1 그렇게 하세요. (터져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누른다.)
성립 (그녀의 손을 잡고 보며) 초희는 손도 참 예쁘구려. 과연 아름다운 시가 쓰여질만한 손이요.
난설헌1 고마워요 서방님.
성립 (그녀의 손을 놓고 이번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뜨거운 포옹 한
참 후 그녀의 손을 잡은채 그녀의 옆에 천정을 보는 자세로 누워) 초희를 처음 보았을 때, (고개 돌려 그녀를 새삼 보고나서) 아 난 또 잠이 들었나 하고. 졸립더라도 우리 조금만 이러고 있읍시다. 달밫도 교교한데 얘기라도 좀 나누다 자도록 합시다.
(시모 등장하여 웃방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흠칫 선다. 웃방 쪽을 보다가 한심하다는듯 혀를 차며 퇴장한다.)
성립 초희를 처음 보았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소.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한 것이 아닌
가 싶었소.
난설헌1 정말인가요?
성립 물론이오. 난 너무도 복이 많은 사내요. 초희! (다시 그녀를 안는데)
(무대 서서히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그후 15세 어린 남편 성립은 시모님의 주선으로 서실로 보내집니
다. 서실이란 형편이 비슷비슷한 양반댁 자제들이 모여 함께 과거공부를 하는 곳이죠.
시모님 말씀이, 남의 아내된 여인의 첫번째 도리는 지아비의 출세를 돕는 일이며, 그 첫째가 지아비의 기운을 애먼데 쓰게해선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모님의 말씀을 옆에서 듣고있던 어린 언년이가 시모님 가신 후, 지아비의 기운을 애먼데 쓰게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자꾸 물어서 무척이나 난처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마침내 전 첫 딸 상희를 얻고 다음 해에 둘째를 갖기에 이릅니다. (spot 꺼지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마루에서 시모, 난설헌1, 언년이가 함께 일하고 있다.
난설헌1과 언년이는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고, 난설헌1은 배가 만삭이 되어있다.
그들은 율란, 조란, 강란을 만들기 위해 익힌 밤, 대추, 생강을 껍질을 까서 으깬 다음 꿀, 계피
가루와 섞어 밤톨 모양, 생강 모양, 대추 모양으로 만들어 잣가루를 묻힌다.)
시모 (대추, 생강, 밤톨 모양을 빚어 상 위에 늘어 놓으며) 중국 후한의 악양자를 본받도록 해야 한다. 아내는 베를 짜서 생계를 이어가며 공부하기 싫어하는 남편이라도 자식과 같이 꾸짖고 북돋우며 공부를 뒷받침해야 하느니, (도마 위의 잣을 칼로 다지던 난설헌1이 익힌 대추 알의 껍질을 칼로 벗기던 언년이가 꾸뻑 졸자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 준다. 언년이, 눈 뜨고 일 계속한다.) 기록에 보면 이런 서찰이 흔하게 눈에 띄니라. (이야기 중단하고 언년이가 껍질 벗겨놓은 대추 한 알을 들어 보며) 이렇게 속 살을 죄다 깎아버리면 어쩌느냐? 얇게, 박사(薄紗)보다도 얇게 벗겨내거라.
언년이 네 마님. (더욱 조심해서 칼질을 한다.)
시모 우리 낭군이 또 이번에 낙방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낭군께서 괴롭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앞으로도 힘을 다할 것이니, 이미 작년에는 머리를 잘라 객지에서의 양식을 마련해 드렸으나, (이 때 칼질하던 난설헌이 존다. 언년이, 시모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그녀를 흔들어 깨운다. 난설헌1, 일 계속한다.) 올 봄에는 비녀를 팔아서라도 이 한 몸의 물건을 다 없앨망정 낭군의 여비를 어찌 모자라게야 하겠습니까, 어떠냐들, 마음에 느껴지는 바가 있느냐?
(둘이서 동시에)
난설헌1 네 어머님.
언년이 예 마님.
(귀동어미 등장한다.)
시모 (귀동어미가 다가오자) 어떻더냐, 부엌 큰 솥의 추어(미꾸라지)는 푹 고아졌느냐?
귀동어미 네 마님. 아궁이 불도 꺼내 놓았습니다.
시모 그래 잘 했다.
귀동어미 (난설헌1에게 서찰 주며) 친정 오라버니 서찰이유.
난설헌1 (받아 곁에 놓아 둔다.)
귀동어미 상희는 점심 잘 먹구 잘 놀고 있으니 염려 말우.
난설헌1 고마워요 귀동어미.
(귀동어미 퇴장한다.)
시모 참으로 가련키도한 일은, 가세 가난하여 식솔들이 굶을 지경이면 그 또한 아녀자의 짐이라, 어떻게 해서라도 양식을 마련하여 굶지 않도록 하여야 하니 오죽 괴롭고 답답하겠느냐.
(잠시 후 무대 암전하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난설헌1, 그동안 깨끗이 치워진 마루 끝에 앉아 서찰 읽는다.)
하곡 (spot 비치면) 내 사랑하는 누이 난설헌 잘 있는가? 누이의 두번째 아이 복중 태아는 지금쯤 만삭이 되었을 터인데 그 또한 잘 있는가? 그러리라 믿네.
기쁜 일이 두어 가지 되네.
첫째는, 조선 최고의 당시인(唐詩人)이며 조선의 이태백, 우리의 영원한 사부 손곡, 즉 이 달(李 達)이 중국 사신 일행의 접객 일을 맡아 하면서 누이의 시들을 보인즉, 중국시의 전성기인 당 시대 시인들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듯 하다는 찬사를 얻었네. 누이의 유선시(遊仙詩)들에선 신선계(神仙界)에 대한 동경과 꿈이 탁월하게 묘사돼 있으며 음률 또한 절묘하다는 평이었네.
그리고 또 하나는, 시문집(詩文集) 편찬 건이네. 백인 시선(百人詩選)이라 이름 붙일 모양인데, 이번 일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가 될거라고들 벌써부터 다들 기대가 크다네. 무슨 얘긴고 하니, 이번에는 천민을 제외하고 사대부 외에도 농공상 양인들과 서얼에,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망라하기로 했네. 기생들은 여늬 부녀자랄 수 없으니 빼기로 했고. 이 일에 우리 손곡이 나와 함께 끼어들기로 되어있고, 중요한 편집위원 격인 주봉이란 인물은, 저명한 성리학자로서 보수와 진보의 양면을 적절하게 선용할 줄 아는 매우 융통성 있는 인사일쎄.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있는 분이네.
손곡과 나는 합의하여 누이가 혼인 전에 쓴 <연밥을 따면서>를 싣기로 하고 추천에 올렸네. .. 좋은 꿈이나 꾸게. 우리 천재 신동 누이의 아름다운 시사를 그 누가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겠는가!
(무대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오라버니께서 추천에 올리셨다는 그 시는, (동시에 screen에도 소개되며) 가을 호수는 맑고도 넓어/ 푸른 물은 구슬처럼 빛나는데/ 연꽃 둘린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 두었네.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 한 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혼인 전, 미래의 나의 남편이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면서, 또한 그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쓴 시입니다. 그 시가 시문집에 실리게 되다니, 전 너무도 기뻐서 그날 밤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spot 꺼지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웃방의 난설헌1, 아기가 잠들어있는 옆에서 아기 옷을 짓고 있고, 언년이는 밤 껍질을 까고있
다.) (사이) ((E) 갖난 아이 깨어 우는 소리) (언년이, 아기에게 간다.)
언년이 어유, 우리 복동이 깨셨나? (우는 아기를 포대기채 들어 안고) 아씨, 우리 도련님이 배가 고픈가 봐요. 젖좀 주셔요.
((E) 아기 울음 그친다.)
난설헌1 (일감 밀어놓고 젖 문질러 젖 먹일 준비 한다.)
언년이 (아기를 넘겨주며) 영리하기도 하지. 밥 먹을 때를 어찌 그리두 잘 알아맞추나, 우리 복동이.
난설헌1 (아기에게 젖 물린다.)
언년이 (일 계속하며) 지례 계신 큰 마님께서 이름 지어 올려보내시고 아직 큰 손주 얼굴 한 번 못 보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난설헌1 그러게 말이다. 언제나 한 번 말미를 내어 올라 오시려는지 .. (아기를 보며) 어이구,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젖 넘어가는 소리가 꿀떡꿀떡 크기두 하지 우리 윤이!
(무대 서서히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옛부터 아이들 아니면 웃을 일이 없다고 했나요,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상희, 갖난쟁이 윤이, 두 어린 것은 정말 큰 복덩이들이었죠. 저의 기쁨, 축복, 행복, 위안, 그리고 효자 효녀들이었습니다.
아이 젖 준다 핑계 대고 눈 한 번 붙이고, 아이 돌본다 구실 삼아 한숨 돌리고, 고것들 보러 애들 아비가 집에 자주 들리면서 식구들 간에 오붓한 시간도 누려 봤습니다.
호랑이 같은 시모님까지 아들 낳느라 수고했다며 그 보기 힘든 웃는 얼굴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허나 우리 시모님은 또다시 저로 인해 마음 불편해 하셨습니다. .. 제가 남편 성립에게 보낸 사랑의 서찰 때문이었죠.
제비는 처마 비스듬이 짝지어 날고/ 지는 꽃은 어지러이 비단옷 위를 스치네. 규방에서 홀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봄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그대/ 돌아올 줄 모르네. 이것 때문이었죠. (spot 꺼지면서)
(무대에 조명 다시 들어오면
난설헌1과 언년이가 갖난 윤이를 어르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시모 등장한다.)
시모 (마루로 올라 방문 앞에서) 악아,
난설헌1 (벌떡 일어나 방문 열며) 어머님 어서 오세요.
시모 (들어선다.)
언년이 (아기 안은채 아랫목에서 물러난다.)
시모 (아랫목에 좌정하고 언년이에게 팔 내밀어 아기 달라는) (언년이가 아기 안겨주자) 어디 보자, 그래애, 네가 이댁 맏상주냐? 응? .. 허, 녀석이 보면 볼수록 즤 애비 눈매를 빼닮았구나. (아이 어르는 소리.) 그래애, 이댁이 뉘 댁인가 하면, 안동 김씨에 김성립이가 늬 애비란다, 알겠느냐? (다시 아이 어르는 소리) 이마는 (난설헌1을 보며) 널 닮아서 훤하고 당돌하구나. (아기를 도로 언년이에게 주면서) 아이 안을 땐 조심해야 하느니라. 아직 뼈가 굳질 않아 고개며 허리를 잘 받쳐주어야 하느니.
언년이 네 마님. (아이를 조심스레 자리에 눕히고) (시모에게) 마님 이제 그만 상희는 데려올까요? 만일 자다 깨서 울기라도 하면 ..
시모 괜찮다. 그냥 안방에서 자게 둬라. 그리고 언년이 넌 좀 나가 있어라.
언년이 네 마님. (서둘러 나간다.)
시모 .. 윤이도 곁에 있으니 짧막하게 이르마. 너, 서실의 네 서방한테 서찰을 보냈느냐?
난설헌1 .. 네 어머님.
시모 그것도 보통의 것이 아니고 규중 아녀자로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내용이더구나.
제비가 짝지어 날고? 이건 도저히 정숙한 여인의 시사라 할 수 없다. (계속 차분한 어투로) 네가 그런 음탕한 시를 지었다 해도 내가 일일이 네 서안 옆에 붙어있기 전에야 그걸 어찌 알겠느냐? 네가 서실로 전한 그 서찰이 그 애 친구들한테 발각이 된 모양이더라. 그런 얘기 들었느냐?
난설헌1 못 들었습니다.
시모 그래서 짖꿎은 서실 친구들이 네 서방을 놀려대고 한 바탕 소동이 난 모양이더라. 이래서야 되겠느냐? .. 성립이 그것이 입 하난 무겁지. 나두 이 얘길 그애한테서 들은 게 아니다. 밖에서 들려오더구나. 이미 사람들 간에 소문이 되어 떠돌고있다는 얘기가 아니냐, 이 무슨 가당찮은 집안 망신이란 말이냐?
난설헌1 ..
시모 너 내 말이 고까우냐?
난설헌1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님.
시모 그럼 그래야지. 넌 종내 이 집 귀신이 될 몸. 소중한 식구이니 내 타이르는 것이다. 여자란,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름 또한 담 밖을 넘어가선 안 되느니, 다신 그런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알겠느냐?
난설헌1 네, 어머님.
시모 (아기 내려다보며) 녀석 혼자서 잘도 노는구나. 네 젖이 탈없이 좋은 모양이로구나. (일어서며) 혹시라도 젖이 잘 안 돌면 말하거라.
난설헌1 (일어서며) 네 어머님.
(시모 방을 나서는데 무대 암전되고)
(spot 비치면 시모, 마루 끝에 앉아 허리춤에서 서찰 꺼내 펴 읽는다. 옆엔 쌀이 담긴 함지박이
놓여있다.)
시부 (spot 비치면) 가내 두루 평안한지 궁금하오. 난 이 곳 지례에서 잘 지내고 있소. 무엇보다 기쁘기 짝이 없는 것은, 우리 첫 손주가 무사히 백일을 맞이하게된 것이오. 수고 많았다고 나 대신 며늘애에게 치하의 말 전해 주오.
그리고 우리 며늘애 말이오, 이 곳 객지에서 큰 인물을 만나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며늘애 칭찬을 듣게 되었소. 서애 유성룡 말이오, 예조판서에 동지경연춘추관사 제학을 겸하고 있고 이태 전 왕명으로 황하집서를 편찬하여 올린 적이 있으며, 덕행과 문명(文名)이 드높은 인물이 아니오. 그 분 말씀이, 난설헌의 글을 보았는데 여자의 글이 아니었소. 어찌 허씨 집안에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난 시학을 잘 모르나, 내 보기에 말(語)을 세우고 뜻을 창조하는 솜씨가 마치 한 떨기 꽃이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았소. 이러질 않겠소?
그 분이 난 시학을 잘 모른다고 한 것은 순전히 겸손에서 나온 말일 뿐임은 조선인이면 누구나 알고있을 터이고, 결국 우리 며늘애는 시인으로서 조선 제일의 반열에 든 거나 다름이 없소.
또한, 허씨 집안의 뛰어난 재주란 누구겠소, 바로 내 친구 하곡과 그 동생 균까지를 일러 말함이 아니겠소.
그리고 그 분 말씀이, 세 남매 중 난설헌, 곧 우리 며늘애가 첫째라는 거요. 첫째. 알겠소?
우리 며늘애 건강은 어떠하오? 내 보기에 그 애 몸집이 그리 튼실치는 못해 보이니 유의하여 신경써주기 바라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요. 내가 지례로 좌천이 돼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알 것이오. 동인들이 밀리고있기 때문 아니오. 그러니 처남 응개도 조심하라 이르고, 이럴 때 같은 동인끼리니 며늘애의 친정댁과도 별 탈이 없어야 함을 잘 알 것이오. 이 또한 각별히 유의해주기 바라겠소.
(시모가 서찰 내려놓음과 동시에 시부의 spot 꺼지고)
시모 (남편에게 말하듯) 내가 무슨 며늘애를 구박이라도 하였소? 당신은 속도 좋으시우.우리 성립이 아직껏 출사도 못했는데, 그깟 며늘애 시사 나부랑이 칭찬을 달가와 하시우? 당신은 내 맘 몰라요. 집안 일은 대충 해치우고 서책에 파묻혀 인사불성이지 않으면 방탕한 시나 지어 집안 망신 시키는 그 애 소행을 내 일일이 고해바치지 않으니, 당신이 알 턱이 있나요? (spot 꺼지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마루에서 난설헌1과 언년이, (둘 다)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나박김치에 들어갈 재료들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고추는 보급되기 전임.)
귀동어미 등장한다.)
귀동어미 (난설헌1에게 서찰 주며) 친정 오라버니 서찰이구먼.
(난설헌1, 서찰 받아 옆에 놓고
귀동어미 나간다.
난설헌1, 앞치마에 손의 물기 닦고 서찰 펴 읽기 시작한다.
언년이 일 계속하는데
무대 조명 약해지면서 서찰 읽는 난설헌1과 하곡에게 각각 spot 비친다.)
하곡 (spot 아래) 우선, 하는 수 없이, 우리 누이의 시가 지난번 이야기했던 시문집에 오르지 못했음을 알려야겠네. 이유는, 그 시가 여인의 시로서 지나치게 부덕(不德)하여 이 나라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라네.
지난번에 이야기한 주봉 그 사람이 그 시를 읽더니 고개를 홰홰 내저으며 이러더군. 과연 소문대로이군. 우리가,무슨 소문입니까 하니 사대부가의 부녀자로서 덕이 부족하다는 소문이네. 그렇잖아도 난설헌이라는 부녀자의 이야기가 있었네. 그러면서, 이 나라 여인들의 교화는 조선조 이래 조정의 강력한 의지인데 거기 찬 물을 끼얹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자의 주장이었네.
마음이 열려있는 줄 알았던 주봉 또한 알고 보니 경직되고 편협한 이 즈음 위정자들의 무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실감하였네.
허나 여기 손곡의 글을 보내네. 이 글은 손곡이 어느 시인들의 모임에서 누이를 소개하기 위해 준비한 내용일쎄.
그리고 다행하게도 손곡은 그 날 모임에서 누이를 소개하면서 참석자들의 박수까지 받았다네. 그 모임엔 주봉 같은 훼방꾼이 없어서였겠지. (spot 꺼지면서)
손곡(이 달) (spot 비치면) (초라하고 어딘가 삐딱한 차림새이다.) 여기,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유독 밝은 빛을 발하는 하나의 정신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허난설헌이라 합니다. 조선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 중 제일 앞서가는 한 여인, 천재시인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러하냐?
그 까닭은, 이제까지 조선 최고의 시사로 칭송되고있는 속미인곡의 상투성을 그녀의 시는 간단히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왜냐?
자, 속미인곡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여자의 그것에 기탁하여 지은 시가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껏 모든 다른 시편들에서 처럼 이 시에서도 시인은, 임금에게 버림받거나 헤어짐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만 할뿐 절대 자신의 솔직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속마음으로 아무리 임금을 원망하고 임금의 처분을 섭섭해 하더라도 말입니다.
허나, 난설헌의 시는 다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screen에도 소개된다.)
아름다운 비단 한 필 곱게 지녀왔어요. 먼지를 털어내니 맑은 윤이 났어요. 한 쌍의 봉황새 마주보게 수놓으니/ 반짝이는 무늬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오늘 아침 그대 가시는 길에 드려요. 님의 옷 만드신다면 아까울 것 없지만/ 혹여 다른 여인 치맛감으론 주지 마셔요.
자, 여기서 저는 제일 마지막 줄에 그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혹여 다른 여인 치맛감으론 주지 마셔요.
어떻습니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만 하는 대신 솔직한 감정표현이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물론 여러분들 중 대다수는 이런 솔직함에 익숙치 않겠지요. 어색하고 불편하겠지요. 허나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얼마전부터 그렇게 잘못 길들여져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린 지난날, 요즘과 달리 참으로 멋지게 살았던 과거가 있습니다. 헌데 우린 점차 그 기억마저 잊어가고 또 잃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함, 자연스러움으로부터 자꾸 멀어져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이 어둠 속에서도 난설헌 그녀만은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알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보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 한 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자, 이 몇줄 시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 어느 근엄한 시인이며 학자이신 분께서 이 시를 여인으로서 부덕함의 소치라 평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여인의 몸으로 대담하게도 님을 만나고 연밥을 따서 던지고 하는 그런 헤픈 몸가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자 할 때 우린 정직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직한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우린 인간을 인생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 박수소리)
손곡 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 박수소리 잦아들고)
손곡 에, 지금 저는 뜻밖에 좋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벅찹니다. 솔직한 반응 보여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관계상 난설헌의 시의 나머지 훌륭한 점들을 간략하게 간추려 말씀드리겠습니다.
두번째로, 난설헌은 시를 지음에 있어 마치 화공과도 같은 솜씨를 지녔다 할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봉선화>라는 시에서 새벽에 일어나 주렴 걷다가 보니/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를 놓고 볼 때, 전날 밤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여 빨개진 손톱이 아침에 일어나 발을 걷다가 보니 그 빨간 손톱들이 거울에 비치면서 붉은 별들처럼 보인다 이거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E) 다시 박수소리 시작되었다가 잦아들고 난 후에)
손곡 에, 이 밖에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적지 않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끝으로, 난설헌은 자신의 처지와 다른 가난한 집 처녀들의 고달픔을 노래한 아주 많은 편수의 <빈녀음>을 썼습니다. 빈녀음, 가난한 처녀를 위한 노래죠, 그 중 한 수, 그리고 나 이 달이 무척 아끼는 또 한 수의 시를 읊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한 처녀를 위한 노래, (screen에도) 그 얼굴 남만 못지 않고/ 바느질 길쌈도 솜씨가 좋건만/ 가난한 집 태어나 자란 탓에/ 중매인도 발 끊고 몰라라 하네.
에, 이번 것은 밤에 홀로 앉아입니다.
(screen에도) 비단폭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등잔불을 돋울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spot 꺼진다.)
난설헌1 (spot 비치면) (손곡에게 말하듯) 고맙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스승님!
허지만,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토해낸 저의 시들을 읽어줄 사람들을 찾지 못해 저는 그 때문에도 너무 외롭습니다. 물론 스승님께서 절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시지만, 저의 외로움이 쉽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screen에도) <내 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구나>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산에서 자라/ 차가운 비바람 속에 여러 해 뽐내었네. 다행히 보기 드문 악공을 만나/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어/ 한 가락 타보았건만/ 세상이 내 소리를 들어주지 않는구나!/ 천년만에 타본 광릉산 곡조/ 앞으로는 이 옛소리 끝내 없어지리라.
(무대 암전된다.)
난설헌2 (spot 비치면) 그리고 뜻밖의 비보가 전해집니다. 인자하시던 시부님께서 객지에서 그만 돌아가시고 만 것입니다. 며느리 시집 와 얼마 안 있어 시부님이 돌아가신 것은 이는 곧 며느리의 흉인줄 알고 있느냐? 시모님의 말씀이었죠. 전 그 물음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웃방에서 어린 윤이 누워 자고있고 그 옆에서 언년이, 아기 옷감에 누빔질을 하고있다. 난설헌1,
서안 앞에 앉아 있다.)
(이윽고 만취한 성립, 흥얼흥얼하면서 들어와 곧장 마루로 올라 방문 앞에 서서)
성립 이보오 부인 부인!
난설헌1 ..
언년이 (일어나 방문 열고) 어서 오십시오 서방님.
성립 뭐야? 감히 네까짓게 날더러 서방님이라? 허! 이몸이 엄청 바쁘신 몸인데, 끅, 네 차례까지 가겠느냐?
언년이 (아기가 깰까봐 전전긍긍한다.)
난설헌1 서방님, 윤이 자고 있는 게 안 보이십니까?
성립 (윤이에게 가는데)
난설헌1 (언년이에게) 데리고 나가거라.
언년이 (아기를 포대기에 싼 채 안고 나간다.)
성립 어? 우리 윤이가 어딜, 어딜 가는거야? (쫓아간다.)
난설헌1 서방님!
성립 (멈춘다.)
난설헌1 (일어나며) 자리를 펴겠으니 누워 쉬셔요.
성립 (그녀를 무작정 껴안고 딩굴다가 그녀를 깔아 누른채) 난설헌, 자네 참 잘났더군! 서울 장안의 시인 학자들이 모두 자네 얘길 하며 군침을 흘린다네, 허허 .. (다시 껴안고 딩굴며) 허나 자넨 내꺼, 오로지 이 김성립이꺼라 이거야! (걸리적거리는 책이며 지필묵을 마구 던지며) 이 따위 것들 다 갖다 버리라구!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며) 오 이쁜 것, 내 사랑! 세상에 지어미한테 지아비만한 게 어디 있다구, 안 그렇소 부인? 내 자주 못 들려 미안허네만, 어쩌겠소, 남정네가 세상 나가 큰 일 하자면 준비 또한 소홀찮거늘. .. 왜 그런 눈으로 보오? 얼음짱 같은 그 눈길에 내가 그만 얼어죽겠소! (그녀가 뿌리치고 일어나려 버둥대지만 더 꼭 눌러 꼼짝 못하게 하며) 어허, 이러지 말아요, 난 부인의 남편이요. 정식으로 대례 올린 하늘 같은 지아비란 말이오. (가까이 있는 책을 던지며) 이런거 다 치워버리고 이 서방님만 기다려주면, 누가 알겠소? 그 땐 내 열흘에 한 번이라도 찾아와 줄른지. 어떻게 생각하오 부인? 말해 보오 어서!
난설헌1 ..
성립 (부른다.) 부인,
난설헌1 ..
성립 대답하구려 어서. 예 서방님하고.
난설헌1 ..
성립 내게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 담아 시사 지어 보내던 허초희, 난설헌은 어딜 간거요? 이제 신혼은 다 끝났다 이거요? .. 그렇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겠지. 허나, 세상 여인들이란 지아비가 어떤 모습으로 들이닥쳐도, 설혹 10년 만에 산적이 되어 돌아온다 해도 세월을 잊은듯 한결같이 나긋나긋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 아니오? 어떻게 생각하오 부인? .. 어허, 점점 더 차가워 지는거요? . (한숨)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난설헌1 (일어나 엉거주춤 고개숙이고 앉아있다.)
(잠시 사이)
성립 (술이 확 깬다.) 미안하오. 내가 실수를 했소.
(난설헌1, 일어나 마루로 간다.)
성립 (가까이에서 시고 하나를 집어들어 펼쳐 읽는다.) (screen에도) 물시계 소리는 낮아지고 등불은 반짝이니/ 비단 휘장은 차고 가을밤은 길기도 해라. 변방 옷을 다 지어 가위는 차디찬데/ 창에 가득 파초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네. 허, 애절하구만. (시고를 서안 위에 놓고) (난설헌1이 가져온 꿀물을 마시고) 규원가라, 나이 스물도 되기 전에 생과부를 만들었으니 미안하오만, 나 또한 괴로움이 많다는걸 알고 있소?
난설헌1 압니다.
성립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인생을 살아야하는 남정네들의 운명을 생각해 봤소?
난설헌1 그래서 한눈 안 팔고 열심히 공부를 하셨는지요?
성립 허 꼭 내 어머니 같은 말투구려.
난설헌1 말꼬리 돌리지 마십시오. 기생들 치마폭에나 싸여 세월을 죽이시면서 과거(科擧) 이야기를 할 수 있으십니까?
성립 (재미있다는듯) 허 제법 강짜가 심하시오 부인?
난설헌1 오래 얼굴을 못 본다고 하여 무작정 규방이 외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 계시든 제 마음을 알아주신다면 외로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서방님께서 저로 인해 힘든 일이 많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성립 허 그래요, 알고 있다 ..?
난설헌1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들어보세요.
성립 들어봅시다.
난설헌1 첫째, 친한 친구들조차 아내보다 시를 못 짓느니 어쩌니 해가면서 일부러 농담 속에 가시를 담아 툭툭 내던지는 말들로 하여 사기가 죽고, 그보다 더욱 저에 관한 이런 저런 소문들로 괴로우신 줄 잘 압니다. 제가 부덕(不德)하며 때로 음탕한데다 집안 일 또한 소홀히한다는 소문이 돌고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로서 뭘 어찌해야 그런 소문들을 막을 수가 있나요? 시를 버리면 된다? 서방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런가요, 서방님?
성립 (한숨만)
난설헌1 그러시겠지요. 서방님도 저처럼 뭘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기 어려우시겠지요. 허나 그렇다고 꼭 그런 식으로 자포자기하셔야만 할까요? 서방님이 마음을 다잡으시고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신다면 저나 우리 상희 윤이도 설혹 일년을 못 본다 하여도 서운치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즈음처럼 서방님께서 앞으로도 다름없이 늘 그렇게 하신다면, 그 땐, 급제도 급제지만, 우리 가정이 결코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성립 (유구무언이다.)
(무대 암전되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웃방에서 난설헌1, 화로 옆에서 화로에 인두 달구어 놓고 성림의 의복을 짓고있다.
균(14세)이 온다.)
균 (마루에 오르기 전에 성급하게) 누님, 누님!
난설헌1 (단숨에 마루로 달려나오며) 균이냐? (마루에 서서) 어서, 어서 올라오너라.
(균 마루로 오르고, 난설헌1 방으로 들어가 일감을 대충 밀어놓고 아랫목에 균을 앉힌다.)
난설헌1 끼니 때가 가까우니 밥상을 차리라 일러야겠다.
균 아닙니다 누님. 저 시장하지 않습니다. 차나 한 잔 들고 가겠습니다.
난설헌1 굳이 사양할 것 없다.
균 아닙니다. 정말 저 시장하지 않습니다.
난설헌1 ... 그럼 차를 마시자꾸나.
균 네.
(난설헌1, 방문 열어놓은채 마루 찬장에서 한과와 오미자 화채를 마련하는 동안)
균 상희 윤이, 못 본 사이에 많이도 컸더군요.
난설헌1 그렇지? 많이 컸지?
균 네.
난설헌1 (다과상 들고 들어와 내려놓고) 자 들자.
균 (화채 조금 마시고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꺼내 주며) 어머님이 누님 위해 지으신 보약입니다.
난설헌1 (받으며) 이런, 다음엔 이런 것 안 먹어도 된다고 말씀드리거라. 내가 딸 노릇한 게 뭐 있다고. (한 쪽에 소중히 놓아둔다.)
균 (나머지를 주며) 이건 하곡 형님이 주신 것입니다.
난설헌1 (서책 한 권을 집어 들어 기뻐하며 펼쳐본다. 이어 서책 내려놓고 지필묵을 들어 보며) 지필묵이구나! (하나 하나 들어보며) 이 귀한 것을, 오라버니께서도 아껴가며 쓰시는 이 귀한 것을! (그리고 서찰을 집어들고 반갑게 펴서 읽는다.) 두율 시집 한 권을 보낸다. 시가 외면당하는 이 시대에 차츰 희미해져가는 두보의 노래를 너를 통해 다시 듣고 싶구나. 오래비가.
균 형님께선 요새 부쩍 시가 그립다, 시가 그립다 노랠 하십니다. 대체 어딜 가야 좋은 시를 만나랴, 하시면서요.
난설헌1 세상 일들이 뜻 같지 않으니 그러시겠지.
균 게다가 손곡 스승님은 또 어떻구요?
난설헌1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냐?
균 얼마 전에 한리학관에 제수되신 것은 알고 계실 터이고,
난설헌1 왜 또 답답하다시며 자리를 물리고 나오셨느냐?
균 그렇지요. 그리고 나선 또 정처없는 유랑의 길, 그리고 한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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