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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20주기 추모 기념집] (삼성경제연구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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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06 20:44 조회1,6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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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 중앙일보 2003년 10월5일 오후 6:01

故 ★김재익 경제수석 20주기 추모집 발간



[중앙일보 정재홍 기자] ★김재익(金在益.사진) 전 대통령 경제수석의 서거 20주기를 추모하는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20주기 추모 기념집"이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됐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순직한 金전수석은 80년 초 한국 경제의 고질병인 인플레이션을 잡고 국제수지 흑자를 실현하는 등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킨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덕우(南悳祐) 전 국무총리, 강경식(姜慶植) 전 경제부총리, 사공일(司空壹)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전 재무부 장관), 김기환(金基桓) 골드먼삭스 국제고문 등 고인과 함께 일했던 관료 및 학자들과 부인 이순자(李淳子) 전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등 9명이 공동 저자다.



이들은 80년대 초 저성장과 노사 갈등, 유가 불안 등의 어려움에 처한 우리 경제를 견실한 성장 기반에 올려놓은 고인의 리더십을 회고하며, 난국에 빠진 우리 경제의 활로를 모색했다.



南전총리는 머리말에서 "정치는 싸움판이고, 노조는 타협보다 투쟁을 내세우며, 기업은 실의에 빠져 있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에서 뚜렷한 리더십까지 없으니 공무원들은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 ★김재익 같은 공직자가 지금 청와대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안정.자율.개방"의 경제철학을 실현했다. 경제는 시장의 힘으로 결정되고, 임금이 아무리 올라도 물가가 더 뛰면 의미없으며, 외국에 등 떠밀리기 전에 자발적으로 시장 개방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책을 펴나갔다.



全전대통령은 그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며 그를 핍박한 당시 정권 실세 허화평 정무수석과 허삼수 사정수석을 청와대에서 쫓아낼 정도였다고 한다. 추모식을 겸한 출판 기념식은 6일 오후6시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다.

정재홍 기자 hongj@joongang.co.kr











■경제 > 동아일보 2003년 10월5일 오후 5:18

[e노블리안스]송진흡/더 크게 보이는 ★김재익 前수석



기자들은 보통 칭찬에 인색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정부나 정치권, 기업 등 취재 대상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감시해야 하는 언론의 숙명 때문이죠.



하지만 며칠 전 동아일보 지면에 소개한 ★김재익(金在益) 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취재하면서 ‘참 대단하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제가 아는 ★김재익은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아까운 인재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20주기를 맞아 지인(知人)들이 추모집을 낸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김재익의 업적은 지면에 소개된 것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물가를 잡고, 국가주도형 한국경제를 자율 체제로 전환시킨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전자나 정보통신 산업의 토대를 닦은 것도 그의 작품이었죠.



현재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한국산 제품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거의 어김없이 ★김재익이 있었다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닙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김재익이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 시절 사무관으로 함께 근무했던 변양균(卞良均) 기획예산처 차관에 따르면 ★김재익은 1970년대 말 대한항공 외에 국적 항공사를 하나 더 만들어 경쟁체제를 이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 안에 환경 관련 기관을 둬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는군요.



★김재익은 인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취재를 하면서 접촉했던 인사 대부분이 ‘인간 ★김재익’을 ‘성직자 같은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지시를 내릴 때나 정책 토론을 벌일 때 항상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의견을 청취했다는 것이죠.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기획원 사무관들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아이디어를 구했다고 합니다.



남덕우(南悳祐) 전 국무총리는 추모집 머리말에 “★김재익과 같은 공직자가 지금 청와대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정치 > 동아일보 2003년 9월29일 오후 5:15

"비전-혜안 갖춘 ★김재익 前 대통령경제수석 그립다"



1983년 10월 9월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김재익(金在益·이하 존칭 생략)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80년대 한국 경제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고 경제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그의 비전과 리더십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고인의 20주기를 맞아 다음달 초 발간하는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20주기 추모 기념집’도 이런 움직임의 하나다.



특히 이런 움직임은 현재 우리 경제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성장률 하락과 고용불안, 유가상승 등 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비슷한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한 교훈을 얻으려는 갈망이 적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남덕우(南悳祐) 전 국무총리, 로렌스 크라우스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분교(UCSD) 교수, 강경식(姜慶植) 전 경제부총리, 고인의 부인인 이순자(李淳子) 전 숙명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등 9명이 이 책의 공동 저자다.



이들은 특히 80년대 초 어려움을 겪고 있던 우리 경제를 다시 내실 있는 성장으로 유도한 고인의 리더십이 지금 경제관료들에게도 생생한 교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 전 총리는 머리말을 통해 “정치는 싸움판이고, 노조는 타협보다 투쟁을 내세우며, 기업은 실의에 빠져 있으며, 경제는 곤두박질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뚜렷한 리더십까지 없으니 공무원들은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다.



★김재익 같은 공직자가 지금 청와대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김재익의 경제 철학은 ‘안정, 자율, 개방’으로 요약된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개발독재의 유산이 짙게 깔려 있던 당시에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그는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에게 ‘경제는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정부가 힘으로 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경제 원리를 가르쳤다.



또 개인이든 국가든 흑자를 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참고 나가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또 대외적 압력에 밀려 시장을 열기 전에 능동적으로 시장 개방에 준비하자는 것이나 전자 및 정보통신산업을 ‘미래 산업’으로 본 것도 혜안으로 꼽힌다.



관(官) 주도 경제 체제가 대세였던 그 당시 정부 안팎에서는 ‘★김재익 철학’에 대한 반발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을 만큼 전 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정책기조를 굽히지 않았고 사후(死後)에 결실을 보았다.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정권에서 일했다는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면서 선구자적 길을 걸어간 고인의 공로는 과오를 훨씬 능가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기념집 출간을 기념하고 ★김재익을 추모하는 모임은 다음달 6일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문화 > 동아일보 2003년 4월15일 오후 6:56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남덕우 전총리<上>



1976년 3월, 남덕우(南悳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심흥선(沈興善·작고) 총무처 장관과 마주 앉았다.

“심 장관님, 정부 부처 국장에 별정직도 임명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꿔주셨으면 합니다.”“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김재익(金在益)이라고 경제기획국장에 적임인 유능한 인재가 있는데 별정직이라서 규정상 안된다고 합니다.”“경제기획국장이라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총괄하는 요직인데 정말 그렇게 하실 생각이십니까.”“네.



국가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인사입니다.”“그렇다면 규정을 바꾸겠습니다.”이렇게 발탁된 ★김재익 국장이 남 부총리의 기대에 부응했음은 물론이다.



기계식 전화교환기를 전전자교환기로 바꾸는 일을 주도, 정보기술(IT)산업의 초석을 닦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 김 국장 밑에서 사무관 생활을 한 변양균(卞良均) 기획예산처 차관은 “김 국장에 대한 남 부총리의 신임은 남달랐다”면서 “심지어 승진이나 해외유학 기회가 생기면 경제기획국 직원들에게 맨 먼저 차례가 왔다”고 회고했다.



★김재익은 5공화국이 들어서자 국가보위 입법회의 경과위원장을 거쳐 80년 8월 파격적으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된다.



당시 나이 42세였다.



그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5공 경제정책의 기조를 만들었다.



이른바 ‘★김재익 신화’는 당시 남 부총리(현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의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남 이사장과 ★김재익의 인연은 남 이사장이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 교수는 66년 같은 대학 이승윤(李承潤·전 재정경제부장관) 김병국(金炳國) 교수 등과 함께 ‘통화량 결정요인과 금융정책’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받는다.



당시 한국은행 직원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김재익은 논문에 인용된 자료도 구하고 미 유학 경험담도 듣기 위해 남 교수를 수시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68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초청교수와 대학원생으로 다시 만난다.



남 이사장의 회고.



“★김재익은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이 무척 뛰어난 인재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김재익이 공직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경제부총리가 되고 나니 다시 그가 생각났습니다.



당시는 외자 도입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는데 한국 경제의 실상을 미국에 제대로 알리고 미국을 설득할 만한 적임자가 고시 출신 중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정직인 비서실장으로 그를 불러들였고 나중에 경제기획국장을 시킨거지요.”★김재익과 함께 83년 버마(미얀마)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아깝게 순직했지만 서석준(徐錫俊) 전 경제부총리도 남 이사장이 발탁한 대표적 경제관료 가운데 한명이다.



77년 11월 청와대 업무보고를 마친 남 부총리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잠시 한담을 나눈다.



“남 부총리,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사실은 기획원 차관에 누구를 앉힐지 걱정입니다.



서석준 차관보가 적임자이기는 한데 나이가 이제 서른아홉입니다.



기획원 차관은 차관회의를 주재하는 중요한 자리인데 다른 부처 차관들이 반발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차관보가 차관으로 바로 승진한 예도 없어 기획원 안에서도 반발이 있을 것 같습니다.”“괜찮아.



처음엔 반발해도 며칠 지나면 아무 일 없는 것이 공무원들의 속성이야.”이렇게 기획원 차관이 된 서석준은 대통령경제1수석비서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상공부장관을 거쳐 83년 7월 최연소 경제부총리에 오른다.



남 이사장은 “내가 개인적으로 ★김재익과 서석준을 총애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어서 썼을 뿐”이라고 했지만 백낙일고(伯樂一顧·명마가 백낙을 만나 세상에 알려진다는 중국의 고사성어)의 백낙이 따로 없었다.



▼남덕우 前국무총리는 ▼한국의 미시경제학과 화폐금융론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경제학자이자 70년대 고도성장을 이끈 행정 관료다.



그에게는 ‘서강학파의 리더’ ‘고도성장의 조형사(造形師)’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1969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재무부장관과 경제부총리를 내리 지냈고 80년대 이후에는 국무총리와 한국무역협회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중용한 인물들이 나중에 경제부총리와 주요 경제장관직에 줄줄이 올라 한국 경제관료 인맥의 ‘대부(代父)’로도 통한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 김정중 - 벌써 20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김항용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김윤만 - 너무나도 아깝고 안타까운 순국이셨습니다.

▣ t솔내 - 아까운 분이셨습니다. 이런 난경제에 그분 같은 분이 계셨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 김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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