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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원류...32 신라마지막,,영남일보 10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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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3-10-07 23:11 조회1,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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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7]

[우리 민족 원류.지류를 찾아 .32] 신라 마지막 화랑 마의태자


03O0710.jpg 견훤에게 살해된 경애왕의 뒤를 이은 경순왕은 ‘공경하고 순한 왕’이라는 시호가 말해주듯 신라를 부흥시킬 의지는 애당초 없는 인물이었다.

견훤에 의해 왕이 되었으면서도 견훤을 극도로 저주한 반면, 왕건에게는 무척 순종했던 인물이었다.

‘삼국사기’ ‘경순왕조’는 가계에 대한 기록 다음에 “(경순왕이) 전 임금(경애왕)의 시신을 운반해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는 이 통곡을 복수로 승화시키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내면화했을 뿐이다.

경순왕은 재위 5년(931) 왕건을 만난다.
이 만남은 그 전해에 왕건이 견훤을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에서 대파했다는 소식을 들은 경순왕이 사신을 보내 치하하면서 만나기를 청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왕건은 겨우 기병 50기만 거느리고 서라벌 근교로 오는데, 신라의 자리에서 볼 때 반란군 수괴인 그가 불과 50기만 거느리고 서라벌로 왔다는 사실은 신라를 이미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이 무렵 경순왕을 포함한 신라 지배층은 견훤은 원수로 여기면서도 왕건은 구원군으로 생각하는 이해하지 못할 기류가 지배하고 있었다.

견훤이 서라벌 침입때 보인 무도한 행위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견훤이나 왕건이나 신라 멸망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았다.

다만 그 실행 방법과 제스처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까지 가서 왕건을 영접하는데 ‘삼국사기’가 비록 고려의 정통성에 입각해 쓴 사서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도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경순왕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와서 마주 앉아 정다운 인사를 극진히 나누고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경순왕이 ‘나는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해 화란(禍亂)을 불러 일으켰고 견훤이 불의한 짓을 자행해 나의 나라를 상하게 하니 이렇게 통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며 우니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왕건)도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다.”(‘삼국사기’ 경순왕 5년조) 나라를 빼앗으러 온 왕건에게 견훤을 욕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 위로를 받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서라벌 사람들이 “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범이나 이리떼를 만난 것 같더니 오늘 왕공(王公·왕건)이 왔을 때는 부모를 보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천년 사직을 빼앗으려는 자를 ‘부모’라고 표현하는 지배층을 둔 신라에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경순왕은 재위 9년(935) 드디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치기로 결심한다.

“사방의 토지가 모두 타인의 소유가 되니 국세가 약하고 외로워져서 스스로 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더니,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혹자는 옳다고 하고 혹자는 옳지 않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경순왕 9년조)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마의태자이다.

그런데 ‘마의’라는 이름은 역사서에 기록된 정식 이름이 아니다.

‘삼국사기’는 다만 ‘왕자’라고만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왕대자(王大子), 즉 왕태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마의’라는 이름은 그가 삼베 옷, 즉 마의를 입고 평생을 보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자가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 있는데,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공고히 하고 있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 둘지언정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주겠습니까’하니 경순왕이 ‘이렇게 고립되고 위급한 형세로는 나라를 보전할 수가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더 약해질 수도 없는데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봉휴를 시켜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왕자는 통곡을 하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바위에 의지해 집을 삼고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삼국사기’ 경순왕 9년조) 민심을 수습해 다시 한 번 도모해 보자는 마의태자의 주장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던 화랑정신의 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순왕을 포함한 신라 지배층에게 남아있는 것은 화랑정신이 아니라 견훤의 서라벌 침입 때 겪었던 두려움뿐이었다.

그래서 마의태자는 서라벌을 떠난다.
그런데 마의태자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기록들이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부도(浮圖·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은 범공(梵空)이라 했으며 그 후에 법수사(法水寺·성주군 가야산 남쪽에 있던 절)와 해인사에 있었다고 한다”라고 적어 마의태자 이외에도 왕자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외에 경순왕의 왕자가 8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의 왕성(王姓)이었던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족보로는 가장 오래 된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가 그런 책인데, 여기에는 경순왕에게 두 부인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인조 20년(1642)에 편찬된 이 책은 경순왕의 부인은 석씨와 박씨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여덟 왕자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 중에는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려 하자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있었으며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라는 기록도 있다.

금강산에 들어간 왕자가 두 명이라는 기록이다.
현재 경주김씨 족보에는 경순왕의 첫째 왕비인 석씨 부인에 대해서는 누락되어 있고, 다만 왕건에게 귀부하기 전의 죽방부인 박씨와 귀부한 후에 얻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만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 죽방부인 박씨의 장남이 마의태자가 된다.
그러나 일제시대 평안도에서 간행된 ‘경김족보(慶金族譜)’는 경순왕의 첫째 부인을 석씨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경순왕의 왕자들에 대해 서로 달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왕건에 귀부한 경순왕을 따라 고려의 귀족으로 편입된 세력과, 마의태자를 따라 나섰던 세력 사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마의태자가 경주를 떠날 때 여러 사람들이 뒤따랐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건에게 귀부하러 갈 때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나 이어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항복 행렬이 이 정도라면 항복을 거부하고 떠나는 마의태자 행렬도 그리 단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의태자의 행보는 개인적 행보가 아니라 신라의 장래에 대한 강경정책의 행보이기 때문에 마의태자의 노선을 지지한 신라인들은 그를 따라 나섰을 것이다.

‘삼국사기’ ‘빈녀양모(貧女養母)조’의 1천명의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효종랑(孝宗郞)은 바로 마의태자의 조부였다.

효종랑이 1천 낭도를 거느린 화랑이었다는 사실은 경순왕의 장남 마의태자 역시 화랑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마의태자가 그냥 마의초식하다 죽으러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신라 부흥운동을 하기 위해 떠난 것이라는 주장은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두 왕자 중 금강산으로 간 왕자는 마의초식하다 죽었지만, 설악산으로 간 왕자는 신라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에는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발음이 똑같은 이 마을명의 김부는 경순왕이 아니라 마의태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인제군지’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 ?)은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한다면서 인제읍지(邑誌)를 인용해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했다.

이규경은 김부를 마의태자가 아니라 경순왕으로 이해했지만 신라의 마지막 화랑 마의태자의 유적은 오늘도 산천 곳곳에 남아 천년 사직 신라의 허무한 종말을 위로해 주고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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