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송 윤씨(茂松尹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 무송(茂松)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茂長面)에 두었던 통일신라 때의 행정구역명으로, 본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무송현으로 개명하였으며, 1417년(태종 17) 장사현(長沙縣)과, 합하여 무장현(茂長縣)이라고 일컫다가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고창군(高敞郡)에 편입되었다.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선대는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다가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윤양비(尹良庇)가 보승낭장(保勝郎將)에 올라 무장현 호장(茂長縣戶長)을 역임하게 되자 양비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송(茂松)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양비(良庇)의 증손(曾孫)인 문정공(文貞公) 택(澤)이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택(澤)의 손자 소종(紹宗)은 이 색(李 穡)의 문인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장원(壯元)한 뒤 조선(朝鮮)에서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지낼 때 「고려사(高麗史)」의 편찬 에 참여하였으며 회군삼등공신(回軍三等功臣)에 올랐고 수문전 학사(修文殿學士)·동지춘추관사 (同知春秋館事) 등을 겸직했다. 또한 성리학(性理學)과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소종(紹宗)의 아들인 회(淮)는 태종(太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종(世宗) 때 맹사성(孟思 誠)·신 장(申 檣)과 함께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편찬하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주호(酒豪)로 이름이 났었다. 회(淮)의 손자(孫子) 자운(子雲)은 병조와 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을 걸쳐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자운(子雲)의 5세손 형(泂)은 선조(宣祖)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이등공신(光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綠大夫)에 올랐다. 이외에도 근대(近代)에 와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선 세복(世復)·세주(世胄)·호(皓) 등이 무송 윤씨(茂松尹氏)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0 가구, 10,3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