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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문 족보의 先世詩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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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14 15:57 조회1,8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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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문 족보의 先世詩文



○는 안동김씨 성보 (1580 경진보) 선세시문에 수록된 시문임을

▲는 안동김씨 오은공파보 (1957 정유보) 선세시문에 추가된 시문임을

■는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首券 (1991년 辛未版) 선세시문에 추가된 시문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우리가문 최초의 족보 1580년 경진보에 실려 있는 先世詩文 발문은 (익원공파) 김찬 선조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1991년 익원공파보에 번역문이 실려 있으며,



1957년 안련사공파보에 선세시문중 상서공(휘孝印)의 三日浦丹書石 발문은 (제학공파) 김득신 선조님이 지으신 것이 따로 부기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안동김씨 성보 (1580 경진보)



○상서공 휘孝印 ---三日浦丹書石

○상락공 휘方慶 ---福州 (辛巳歲 東征日本班師 至福州今安東)

○상락군 휘 (흔) ---福州暎湖樓

○좌정승 휘永暾 ---扈從白馬山應禦製

○참판공 휘益精 ---送秋

○내서사인 휘齊顔 ---休暇

○감사공 휘德龍 ---題珍島龍藏洞

○----- 원손 봉정대부 행사간원헌납 瓚 근발



**번역 :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首券 (1991년 辛未版)**

우리 집은 선세 이래로 名公巨卿과 事業에 밝고 빛나는 분들이 뒤를 이어 나셨을뿐 아니라 문장으로 세상을 울린 분들 또한 하나 둘이 아니었다. 중서령(상서공)의 문장은 한때의 傑出이었고 상락공이 시에 능하심은 어려 行狀에 실려 있으나 아깝게도 그 世代가 아주 멀어서 남음이 없이 잃어버리고 자손들이 收拾해서 전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귀중하고 짧은 문장이 다행히 남아서 빠진 곳이 없는 것은 그 오늘에 있어 보배와 같이 아끼는 것이 어떠할까? 이제 그 얻은 바를 譜冊의 끝에 부쳐 싣는 것은 자랑을 하고져 함이 아니라 오래도록 쉬게 되면 없어질 것을 또한 두려워함이로다.



척약재의 詩文같은 것은 문집 가운데 갖추어 실려 있고 복창군의 篇冊은 여러 選集에서 볼 수 있으므로 私藏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가히 후세에 전해질 것이므로 당장에 뽑아 기록하지 않으나 위와 같은 監司의 진도에 대한 한 首의 시로 말할진대 선조의 偉烈을 發揚하였으므로 가히 빠뜨리고 없애지 못하는고로 아울러 끝에 기재하는 바이다.



아! 한 수의 시를 싣고 안싣는 것은 비록 선조에 대해서는 무관한 것 같으나 자손으로서는 한번 읊고 불러보면 완연히 그 容儀를 대하는 듯하고 그 기침소리를 듣는 것 같아서 갱장추모(담을 대해서도 요임금이 보이고 국그릇을 대해서도 요임금의 얼굴이 비친다는 말) 의 뜻이 무궁할 것이고 우리 족보를 보는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어찌 여기에서 감동하지 않으리오.

원손 봉정대부 행사간원헌납 瓚 근발



▣ 김찬(金瓚)

김사형-김승-김종숙-김질-김성동-김려-김언심-김찬

<디지털한국학>

1543(중종 38)∼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아버지는 형조참의 언침(彦沈)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兪炳勇〉







2. 안동김씨 오은공파보 (1957 정유보)



○三日浦丹書石 ---상서공 孝印

▲-----此詩 16대조 여조 병부상서 김효인---族弟 金夏圭---裔孫 得臣 근발

**번역 : ??

○東征日本過福州 ---충렬공 方慶

○登福州暎湖樓 ---도첨의공  (흔)

○扈從白馬山應御製 ---좌정승공 永暾

○休暇 ---내서사인공 齊顔

▲次再從姪檢校近侍休韻 ---대사성공 九容

▲安東客舍次上洛公韻 ---대사성공 九容

▲送鄭同年 (졸)安東 ---대사성공 九容

▲再過楊季平村舍 --- 익원공 士衡

▲川方寺 ---익원공 士衡

▲呈從叔 (척)若齋島配時韻 ---검교공 休

○送秋 ---참판공 益精

○題珍島龍藏洞 ---감사공 德龍

○詩文拔 ---遠孫 봉정대부 사간원 헌납 瓚 근발







3.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首券 (1991년 辛未版)



○三日浦丹書石 (삼일포 지문이 쓰인 글) ---상서공 孝印

○東征日本過福州 (일본정벌 때 안동을 지나면서) ---충렬공 方慶

○登福州暎湖樓 (안동 영호루에 올라서) ---도첨의공  (흔)

○扈從白馬山應御製 (백마산에 수행하여 어제에 답함) ---좌정승공 永暾

○休暇 (휴가) ---내서사인 齊顔

▲次再從姪檢校休韻 (재종질 검교 휴의 운을 따서) ---대사성 九容

▲安東客舍次上洛公韻 (안동객사에서 상락공의 운을 따서) ---대사성 九容

▲送鄭同年 (졸)安東 (정 동년을 안동 원님으로 보내면서) ---대사성 九容

▲再過楊季平村舍 (양계 평촌사를 두 번째 지나면서) --- 익원공 士衡

▲川方寺 (천방사) ---익원공 士衡

■善竹橋 (선죽교) ---익원공 士衡

▲呈從叔 (척)若齋島配時韻 (종숙 척약재 유배때 보낸 시) ---검교공 休

○送秋 (가을을 보냄) ---참판공 益精

■鎭安馬耳山 (진안의 마이산) ---영의정 壽童 전라감사때 戊午)

■梁山澄心軒 (양산 징심헌) ---영의정 壽童 경상감사때 己未)

■漢江麻浦 (한강 마포) ---영의정 壽童 경기감사때 壬戌7월16일

○題珍島龍藏洞 (진도 용장동) ---감사공 德龍

■題駱谷靜齋詩 (낙곡 정재에 쓴 시) ---감사공 德龍

■題五言絶句 (오언절구를 쓴 시) ---감사공 德龍

■題畵 ---백곡 得臣

■田家 ---백곡 得臣

■暴雨雷聲 (폭우뇌성) ---판삼사공 휘 (장) 10대손 鴻 7세작

■義巖 (의암) ---梨谷 汝仰 (참판공 基正)

○詩文拔 ---遠孫 봉정대부 사간원 헌납 瓚 謹書











▣ 김항용 - 시문류 수록처를 잘 분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개되지 않은 것은 찾아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솔내 -

▣ 김윤만 - 귀한 자료를 분류 소개해 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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