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충렬공의 주변인물들(34)최온,최문본=동주(철원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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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0-14 17:57 조회2,400회 댓글0건본문
동주(철원)최씨
동주(東州)는 철원(鐵原)의 옛 이름으로 강원도 북서부, 영서지방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의 철원(鐵圓)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군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主)로 고쳤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이를 없애고, 1018년(현종 9)에 지동주사(知東州事)를 두었다가 고종(高宗) 때 강등하여 현령(縣令)을 두었다.
그 후 승격하여 목(牧)이 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철원부(鐵原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철원군으로 고쳤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경기도 삭녕군(朔寧郡)의 내문(乃門), 인목(寅目), 마장(馬場)의 3개면을 병합하고, 동변과 송내를 합하여 동송읍으로 하였으며, 1931년에 서변면이 철원읍(鐵原邑)으로 승격되었다.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시조 (始祖) 최준옹(崔俊邕)은 득성시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준옹(俊邕)의 증손인 석(奭)은 1051년(문종 5)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려의 최고 중앙정치기관인 좌습유(左拾遺)를 시작으로 1075년(문종 29) 형부시랑(形部侍郞)이 되어 4월 요(堯)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돌아와 전중감(殿中監),
지어사대사(知御史臺史)가 되었고 그 후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한 후 1087년(선종 4)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이르렀다.
최유선(崔惟善),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석(奭)은 나이 70세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당대의 문장가 유청(惟淸)이다 유청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經)과 사(史), 자(子), 집(集)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예종(睿宗)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게 된 뒤라야 벼슬에 오르겠다"하며 두문불출하고 오직 글만 읽었다. 주위에서 벼슬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하며 굳이 사양하였고 오랜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 갔으나 인종(仁宗) 초에 주위의 간계로 물러나 있다가 1132년(인종 10)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진주사(陣奏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 왔다.
그 후 금나라에도 다녀왔으며 경인난(庚寅亂) 및 계사(癸巳)의 난(亂)에 문신(文臣)들이 모두 해를 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그의 덕망에 경복(敬服)하였으므로 친척들과 함께 모두 화를 면했다.
왕이 즉위하자 숙덕(宿德)으로 다시 재상에 올랐고 그가 집필한 저서 [이한림 집주(李翰林集註)]와 [유문사실(柳文事實)]을 왕이 보고 칭찬하여 판목(版木)에 새겨 전하였다.
1161년(의종 15) 중서시랑 평장사에 올랐고 1172년(명종 2) 수사공, 집현전 대학사, 판예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그는 독자로 태어났으나 슬하에 8남 2녀를 낳아 이로부터 가문이 번창하였다. 당( )은 유청(惟淸)의 넷째 아들로 글을 잘 짓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며 명성과 공적을 남겨 명망이 한 시대에 두터웠다.
1197년(명종 27, 신종 원년) 신종(神宗)의 이름을 탁(晫)으로 지어 올렸고, 1199년(신종 2)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하여 아우 선(詵)과 장자목(張自牧), 이준창(李俊昌), 백광신(白光臣), 현덕수(玄德守) 등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한가로이 즐기며 시주(詩酒)로 소일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 하였다.
당의 동생 선(詵)은 문학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렸는데 욕심이 없이 깨끗하고 말이 적으며 선비에게 자기몸을 낮추어 어진이를 예(禮)로써 대우하니 왕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임명하였으나 얼마후 늙음으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났다.
선의 아들 종준(宗峻)과 종자도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종준(宗峻)은 1201년(신종 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 초에 좌승선(左承宣)을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부 상서(吏部尙書) 등을 역임하고 뒤에 문하시중에 이르러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특히 의학에 정통하여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을 저술했다.
종준의 동생 종자도 1225년(고종 12) 위위경(衛尉卿)으로 과거시험의 감독관을 거쳐 1236년(고종 23)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당( )의 손자 인(璘)은 성격이 호탕하여 술과 놀이를 좋아했으며 30세에 독서를 시작한 뒤 강종 때 급제하여 대간(臺諫)을 지내고 여러 차례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적으로 공을 쌓았고 인의 아우 징(澄)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징(澄)의 아들 유(濡)는 1090년(선종 7)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교감(校書校勘), 중서 사인(中書舍人)을 거쳐 1111년(예종 6) 시어사가 되었고 1128년(인종 6)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1138년(인종 16)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종자의 아들 온( )은 유청(惟淸)의 증손으로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1258년(고종 45) 추밀원사(樞密院事)에 올라 권신 최 의(崔 )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김 준(金 俊)등과 참여하였다.
한 때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기도 했으나 장군 이주인(李柱仁)의 청으로 풀려나와 1260년(원종 1) 추밀원사에 복직하고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거쳐 1262년(원종 3) 판공부사(判工部事)를 지낸 후 수태부 중서시랑 평장사로 치사(致仕)했다.
옹(雍)은 유청(惟淸)의 증손이며 정소(貞紹)의 아들로,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대관승(大官丞)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이 태손(太孫) 때 그 스승이 되었고, 1280년(충렬왕 6) 정랑(正郞)으로서 경사 교수(經史敎授)를 겸임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292년(충렬왕 13)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文翰學士)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문신(文臣)들의 권세가 압도적인 비중으로 흘러온 시대에 동주 최씨(東州崔氏)의 대표적인 인물은 고려조의 명장이고 충신인 영(瑩)이다. 영은 유청(惟淸)의 현손(玄孫) 원직(元直)의 아들로 태어나 양광도(楊廣道) 도순문 사(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번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면서부터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무예와 용기가 뛰어난 것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원나라의 요청으로 류 탁(柳 濯) 등과 함께 중국의 고우(高郵), 사주(四州) 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을 토평하고 돌아와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 세력을 용감히 몰아내고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데 큰 영향이 미치도록 하였다.
1358년(공민왕 7) 오예포(五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시켰고, 1359년(공민왕 8)에는 중국의 홍건적 4만 명이 서경(西京)을 침범하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일등도형벽상 공신(一等圖形壁上功臣)이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의 벼슬을 받았다.
그 외 수많은 국내외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를 극복하였다.
그는 성품이 굳세고 충성되었으며 전장에 임하여 적을 대하였을 때에도 그 정신과 의기가 안정되어 있었으며 화살과 포탄이 좌우로 날아와도 두려워 하는 빛이 없었다.
군사를 다루는 데도 엄격하여 군사가 싸움 마당에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당장에 군법을 시행한 까닭으로 크고 작은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죽음에 임하여 "너는 꼭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 하는 말을 경계하여 말했는데,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여 기쁜 마음과 정성스러운 태도로 일하며 결코 재물을 탐하지 않아 의복과 음식은 검약(儉約)하고 소박하였으며 때로는 끼니가 떨어지는 일까지 있었다.
비록 신분이 장상(將上)의 최고 지위에 있었고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비굴한 행위를 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청렴렬백한 뜻에 감복하였다.
옳지 못한 행위를 보면 통렬히 배척했으며 강인한 성품 탓으로 주위의 모함을 받아 한 때 관직이 삭탈되기도 하였고 억울하게 귀양가기도 했었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왕위(王位)를 폐하고 정몽주(鄭夢周)등과 함께 충신들을 참형(斬刑)하니 5백년 고려 사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로 죽음에 임하여서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내가 평생에 탐욕한 마음을 가졌다면 내 무덤위에 풀이 날 것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뒤에 그의
무덤 위에는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하였고, 그가 죽는 날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전국 백성들은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충신들이 정의(正義)의 이상을 위하여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 어려운 고비를 넘겨 왔으나 진정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의 빛나는 업적과 충절(忠節)은 우리 민족의 얼이요, 동주 최씨(東州崔氏) 후손들의 핏줄기 속에 용솟음칠 영원불멸의 수호신이 되었다.
최남선은 해방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하며 역사논문(歷史論文) 집필에 전심하다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기소,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나와 6.25때 해군전사 편찬위원회 촉탁을 지냈고 서울 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저서에는 [백팔번뇌] [시조유취] [금강예찬] [조선역사] [고사통] [조선상식] [조선독립운동사] [단군론] [백두산 관참기]등 다수를 남겼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했고 신문학운동과 국학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동생 두선(斗善)은 서울중앙중학교 교장, 보전상무(普專常務)를 거쳐 1945년 경방사장(京紡社長)을 역임하였고, 1947년 동아일보사장(東亞日報社長)으로 언론계에 몸담았다가 대한적십자사 총재(1960-1972), 유엔총회 한국대표(1960-19961), 국무총리(1963-1964)를 비롯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971년 한국장학재단 이사를 지냈다. 국가로부터 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 국민훈장무궁 화장(國民勳章無窮花章)을 수상했고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도 받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주, 철원 최씨(東州, 鐵原崔氏)는 남한에 총 2,518가구 10,5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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