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충렬공의 입사와 최종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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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14 19:56 조회1,616회 댓글0건본문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1227년(고종14) 16세의 나이로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였던 日兢의 음보로 吏屬 同正직인 양온사 同正으로 관계에 처음 나아갔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散員으로 처음 입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가 처음 받은 실직이 종9품 대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맨 처음 양온사 동정직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어 그는 무반 실직인 隊正을 받았고 나아가 태자부 牽龍, 散員 겸 식목綠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관직으로 출발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종준이 그를 예우할 정도로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선대의 후광아래 거듭 승진되었다.
이어 그는 서북면 병마綠事, 別將, 郎將 監察御使가 되었다.
1247년(고종34) 36세에 그는 서북면 병마判官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給事中 御使中丞, 大將軍, 지합문형부사, 金吾衛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이와 같이 최씨집권기에 그는 백부와 부, 그리고 철원최씨로 재추의 자리를 지켰던 ★최종준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등의 비호아래 급속히 성장하였던 것이다.
1. 최씨무인정권과의 관련
김방경이 최초로 관직을 받은 때는 1227년 (고종14) 인데,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고 최씨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는 대외적으로 고려와 몽고 간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때였다.
1219년 (고종6년) 몽고의 공격에 쫓긴 거란인들이 고려의 강동성에 집결하였을 때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인들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몽고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고려측의 반감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1225년 (고종12) 공물을 걷어 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가 외교를 단절함에 따라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준비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음서로서 동정직을 받았고 이어 무반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관직을 받은 지 5년째인 1231년 (고종18) 마침내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1차 침입을 맞은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장기항전을 준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삼별초>
이로써 고려는 1259년 (고종46) 강화가 성립될 때까지 약 30년동안 6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주도아래 항몽전쟁이 수행되는 이 시기에 김방경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다음 사료를 보자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으며, ----- 중앙으로 돌아와 견룡행수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은 시중 ★최종준의 사랑을 받아 감찰어사, 서북면 병마판관, 견룡 행수 등으로 주요 무반직에 빠르게 승진하였던 것이다.
★최종준은 철원최씨 가문으로 이 가문은 최씨 집권기에 6명의 宰樞를 배출하였으며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최우는 바로 ★최종준의 조카 사위였다. 또한 ★최종준은 강화천도를 주도하는 등 최씨정권에서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 권12 ★최종준전>
이러한 ★최종준이 그를 돌봐 주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백부, 부친에 이어 최씨정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 중에서 최씨 정권과 결탁된 차원의 활동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다음의 사료는 그것을 말해 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중략>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및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35년 3월>
김방경은 감찰어사로 있으면서 재상의 청탁을 거절하고 국고를 비축하려 하였고, 또 금위대로서 왕실 숙위에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최씨정권과 밀착되었지만, 그는 국가재정의 확보와 왕실의 보호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실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국가체제 유지의 노력은 백성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살필 수 있다. 몽고병의 4차 침입을 맞았을 때 조정에서는 북계의 백성들을 섬으로 옮기게 조치하였는데 서북면 병마녹사를 지낸 바 있는 김방경은 이때 (고종 35년 3월)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활동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백성들을 위해 위도의 식량문제와 식수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피난지에서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뒤에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는데, 이러한 치적 등으로 그는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었으며 뒤에 무고를 당했을 때 서북지역의 후원으로 그것을 벗어나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최씨정권 아래에서 최씨정권의 핵심인 ★최종준 등의 비호를 받는 김방경이 최씨정권의 정책에 호응하여 항몽에 노력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김방경은 국가재정과 왕실보호,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안정에도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무인정권에 비판적인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 김윤만 - 하! 그런 사실이 있었군요. 할아버지께서는 무인이시면서도 무인정권에 뇌화부동하지 않으신 면이 존경스럽다 할 것입니다.
김방경은 1227년(고종14) 16세의 나이로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였던 日兢의 음보로 吏屬 同正직인 양온사 同正으로 관계에 처음 나아갔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散員으로 처음 입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가 처음 받은 실직이 종9품 대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맨 처음 양온사 동정직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어 그는 무반 실직인 隊正을 받았고 나아가 태자부 牽龍, 散員 겸 식목綠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관직으로 출발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종준이 그를 예우할 정도로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선대의 후광아래 거듭 승진되었다.
이어 그는 서북면 병마綠事, 別將, 郎將 監察御使가 되었다.
1247년(고종34) 36세에 그는 서북면 병마判官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給事中 御使中丞, 大將軍, 지합문형부사, 金吾衛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이와 같이 최씨집권기에 그는 백부와 부, 그리고 철원최씨로 재추의 자리를 지켰던 ★최종준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등의 비호아래 급속히 성장하였던 것이다.
1. 최씨무인정권과의 관련
김방경이 최초로 관직을 받은 때는 1227년 (고종14) 인데,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고 최씨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는 대외적으로 고려와 몽고 간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때였다.
1219년 (고종6년) 몽고의 공격에 쫓긴 거란인들이 고려의 강동성에 집결하였을 때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인들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몽고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고려측의 반감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1225년 (고종12) 공물을 걷어 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가 외교를 단절함에 따라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준비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음서로서 동정직을 받았고 이어 무반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관직을 받은 지 5년째인 1231년 (고종18) 마침내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1차 침입을 맞은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장기항전을 준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삼별초>
이로써 고려는 1259년 (고종46) 강화가 성립될 때까지 약 30년동안 6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주도아래 항몽전쟁이 수행되는 이 시기에 김방경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다음 사료를 보자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으며, ----- 중앙으로 돌아와 견룡행수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은 시중 ★최종준의 사랑을 받아 감찰어사, 서북면 병마판관, 견룡 행수 등으로 주요 무반직에 빠르게 승진하였던 것이다.
★최종준은 철원최씨 가문으로 이 가문은 최씨 집권기에 6명의 宰樞를 배출하였으며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최우는 바로 ★최종준의 조카 사위였다. 또한 ★최종준은 강화천도를 주도하는 등 최씨정권에서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 권12 ★최종준전>
이러한 ★최종준이 그를 돌봐 주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백부, 부친에 이어 최씨정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 중에서 최씨 정권과 결탁된 차원의 활동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다음의 사료는 그것을 말해 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중략>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및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35년 3월>
김방경은 감찰어사로 있으면서 재상의 청탁을 거절하고 국고를 비축하려 하였고, 또 금위대로서 왕실 숙위에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최씨정권과 밀착되었지만, 그는 국가재정의 확보와 왕실의 보호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실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국가체제 유지의 노력은 백성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살필 수 있다. 몽고병의 4차 침입을 맞았을 때 조정에서는 북계의 백성들을 섬으로 옮기게 조치하였는데 서북면 병마녹사를 지낸 바 있는 김방경은 이때 (고종 35년 3월)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활동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백성들을 위해 위도의 식량문제와 식수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피난지에서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뒤에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는데, 이러한 치적 등으로 그는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었으며 뒤에 무고를 당했을 때 서북지역의 후원으로 그것을 벗어나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최씨정권 아래에서 최씨정권의 핵심인 ★최종준 등의 비호를 받는 김방경이 최씨정권의 정책에 호응하여 항몽에 노력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김방경은 국가재정과 왕실보호,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안정에도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무인정권에 비판적인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 김윤만 - 하! 그런 사실이 있었군요. 할아버지께서는 무인이시면서도 무인정권에 뇌화부동하지 않으신 면이 존경스럽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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