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충렬공의 만년행적 (동녕부를 되찾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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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22 03:44 조회1,743회 댓글0건본문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7/08 20:21 (from:211.57.153.114) 조회 : 36
여름캠프2003 (09-1)---충렬공의 만년행적1 (동녕부를 되찾기 위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황해도 안악 구월산 삼성사에 고구려 고씨 시조 단군을 봉안(357년)하였는데, 신라가 삼국통일(668년) 후에도 황해도 서북부 (안악 등)는 차지하지 못하였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936년)하고 고구려의 후예임을 계승함에 따라 구월산 삼성사는 온존히 보존되어 온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1114년)를 편찬할 당시까지는 동이족 시조 소호김천씨는 神이 아니라 신라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어서 시조로 알고 있었으며, 이때까지 단군은 고구려 고씨족으로 한씨족(=일본인)의 시조이었다. 그래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1114년)하면서 단군은 동이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삼국사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1270년대 원나라가 동녕부(평양 일대)를 설치하자 고려에서는 동녕부가 차지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녕부가 원래 고려 영토라는 주장을 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삼국사기가 편찬(1114년)되고 169년후인 1283년에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첫머리에 (단군 기록이 있는) [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록하였고, 1287년에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편찬하면서 역시 단군본기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록하였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290년에 원나라는 동녕부를 차지한 지 20년만에 평양 동녕부를 철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양에 기자사가 설치되고, 한씨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바꾸고 단군왕검이 우리 민족의 시조로 둔갑하였다.
▶충렬공 할아버지는 1283년 치사(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남)한 뒤에도 고려조정의 원로로서 중요 국정에 대한 자문을 하고 계시었고, 이승휴의 동안거사집에 1296년에 이승휴와 교유한 글이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이승휴와 절친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휴와 교유한 인사들 중에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 등임--- ★이장용은 장인 박익정의 사돈(박익정의 장남 박휘의 장인이 이장용임)이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벌에 따른 고려의 고통을 줄이고자 이장용과 충렬공께서 원나라에 수시로 다녀 왔음. ★유경은 충렬공께서 무고로 고문을 받을 때 죄없음을 극력 변호하였음. ★유천우는 충렬공께서 일본정벌 하심을 시로 읊어 시문이 현재 전하고 있고, ★원부는 충렬공 송자 김승용의 장인이며, ★허공은 사돈임(셋째아들 김순의 장인)
이때의 동녕부를 되찾기 위한 활동을 하였을 것이므로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1283년), 이승휴의 제왕운기 편찬(1287년)에도 관여하지 않았을 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김성호, 월간조선사)
p303
천손 단군이 동이시조가 된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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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북부 즉 안악, 은율, 신천, 송화군은 김유신의 석문패전에 이은 문무왕의 김유신 암살로 신라가 끝내 차지하지 못한 곳이다. 이중 하나인 안악군 구월산에 三聖祠(삼성사)가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남평양(재령)으로 천도(343년)했을 때,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안악고분(357년)에 모시면서 이 일대를 성역화하려고 안악고분의 주맥인 구월산 삼성사에 고구려 고씨 시조 단군을 봉안한 것이다.
그후 신라가 안악을 차지하지 못함에 따라 삼성사는 고구려 멸망후 아무런 병화도 입지 않고 고스란히 잔존하다가 고구려 계승을 발표한 고려 현종9년(1018년)에 안악군이 설치됨에 따라 [고려사] 지리지는 "구월산 장장평의 삼성사에 환인,환웅,단군이 봉안되었다" 고 말한 것이었다.
-----
필자(김성호)는 종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단군을 말하지 않아 형편없는 사대주의 儒生으로 여겼었지만, 단군은 동이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군 : 청주한씨 시조, 한씨족(=일본인)의 시조 천손 단군
***동이족 : 동이시조 소호김천씨는 신이 아니라 신라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어서 시조였던 것이다.
단군신화는 일연선사의 [삼국유사](1283년) 첫머리에 인용된 [古記]에 전해오며, 선사보다 169년 전에 김부식도 이 古記를 보았다. 허나 김부식은 삼국사기(1114년)를 쓰도록 하명한 인종에게 올린 이 책 서문에서 ----- 고 하여 古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던 것이다.
-----
그러면 숙종3년(1098년)에 제작된 古記의 저자는 비록 확인되지 않지만 그는 안악군 삼성사를 관할하던 평양부의 한 문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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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가 지난 묘청반란 진압후 인종은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아마 이때 인종은 평양인이 저작한 古記에 버금가는 역사서를 쓰도록 하명함에 따라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서 古記를 지목하여 노골적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이러한 단군논쟁의 와중에 혜성처럼 끼어든 인물이 일연선사였다. 그의 삼국유사는 최남선씨의 지적처럼 선사가 "78세때인 1283년에 국존"으로 제수될 때 완성되었다.
선사는 그 서문에서 ----- 라 하여 김부식을 정면으로 공박하면서 김부식의 사문난적으로 낙인찍은 古記를 삼국유사 첫머리에 버젓이 인용하였던 것이다.
-----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강요로 일본원정용 선박을 건조하는 한편 원군과 결사항전을 벌였던 삼별초와의 싸움에 시달리던 내우외환의 위기였다. 바로 이때인 원종10년(1270년) 에 서북면절도사 최탄과 삼화현교위 이연령이 평양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고을을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하니, 원군은 즉각 평양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황해도 멸악산맥 이북을 강점해 버렸으니 어처구니 없는 영토의 피탈이었던 것이다.
당시ㅣ 원나라는 아마 한사군 이래의 연고권을 앞세워 평양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했을 터이지만, 고려측 정사인 삼국사기는 평양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음에 따라 동녕부에 대항할 아무런 반증자료를 갖지 못함에 따라 평양을 멀쩡하게 원나라에 뺏길 판국이었다.
바로 이 시기인 1283년에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첫머리에 古記의 고조선을 인용하면서 10개의 주석을 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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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지명들을 가급적 동녕부가 장악한 평양일대로 집중시켜 동녕부가 차지한 영역은 낙랑군 이전부터 고려의 전신인 고조선이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사가 단군신화를 책 머리에 수록한 의도는 실은 동녕부가 차지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선점권의 선포였고, "원나라여! 평양 땅을 내놓고 빨리 물러가라!"는 영토반환 요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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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선사는 김부식이 사문난적으로 지목한 고기를 책머리에 인용하고서도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삼국유사를 완성한 바로 그해(1283년)에 승려로서 최괴직인 국존으로 제수되었던 것이다.
李承休(1224-1301)도 제왕운기(1287년) 상권에서 중국의 역사를, 하권에서 고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칠언한시로 읊으면서 압록강-두만강을 중국과 고려의 국경이라 했으니, 이것 역시 압록강 이남의 동녕부는 물러나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 김은회 -
여름캠프2003 (09-1)---충렬공의 만년행적1 (동녕부를 되찾기 위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황해도 안악 구월산 삼성사에 고구려 고씨 시조 단군을 봉안(357년)하였는데, 신라가 삼국통일(668년) 후에도 황해도 서북부 (안악 등)는 차지하지 못하였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936년)하고 고구려의 후예임을 계승함에 따라 구월산 삼성사는 온존히 보존되어 온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1114년)를 편찬할 당시까지는 동이족 시조 소호김천씨는 神이 아니라 신라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어서 시조로 알고 있었으며, 이때까지 단군은 고구려 고씨족으로 한씨족(=일본인)의 시조이었다. 그래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1114년)하면서 단군은 동이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삼국사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1270년대 원나라가 동녕부(평양 일대)를 설치하자 고려에서는 동녕부가 차지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녕부가 원래 고려 영토라는 주장을 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삼국사기가 편찬(1114년)되고 169년후인 1283년에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첫머리에 (단군 기록이 있는) [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록하였고, 1287년에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편찬하면서 역시 단군본기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록하였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290년에 원나라는 동녕부를 차지한 지 20년만에 평양 동녕부를 철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양에 기자사가 설치되고, 한씨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바꾸고 단군왕검이 우리 민족의 시조로 둔갑하였다.
▶충렬공 할아버지는 1283년 치사(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남)한 뒤에도 고려조정의 원로로서 중요 국정에 대한 자문을 하고 계시었고, 이승휴의 동안거사집에 1296년에 이승휴와 교유한 글이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이승휴와 절친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휴와 교유한 인사들 중에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 등임--- ★이장용은 장인 박익정의 사돈(박익정의 장남 박휘의 장인이 이장용임)이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벌에 따른 고려의 고통을 줄이고자 이장용과 충렬공께서 원나라에 수시로 다녀 왔음. ★유경은 충렬공께서 무고로 고문을 받을 때 죄없음을 극력 변호하였음. ★유천우는 충렬공께서 일본정벌 하심을 시로 읊어 시문이 현재 전하고 있고, ★원부는 충렬공 송자 김승용의 장인이며, ★허공은 사돈임(셋째아들 김순의 장인)
이때의 동녕부를 되찾기 위한 활동을 하였을 것이므로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1283년), 이승휴의 제왕운기 편찬(1287년)에도 관여하지 않았을 까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 (김성호, 월간조선사)
p303
천손 단군이 동이시조가 된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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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북부 즉 안악, 은율, 신천, 송화군은 김유신의 석문패전에 이은 문무왕의 김유신 암살로 신라가 끝내 차지하지 못한 곳이다. 이중 하나인 안악군 구월산에 三聖祠(삼성사)가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남평양(재령)으로 천도(343년)했을 때,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안악고분(357년)에 모시면서 이 일대를 성역화하려고 안악고분의 주맥인 구월산 삼성사에 고구려 고씨 시조 단군을 봉안한 것이다.
그후 신라가 안악을 차지하지 못함에 따라 삼성사는 고구려 멸망후 아무런 병화도 입지 않고 고스란히 잔존하다가 고구려 계승을 발표한 고려 현종9년(1018년)에 안악군이 설치됨에 따라 [고려사] 지리지는 "구월산 장장평의 삼성사에 환인,환웅,단군이 봉안되었다" 고 말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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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성호)는 종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단군을 말하지 않아 형편없는 사대주의 儒生으로 여겼었지만, 단군은 동이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군 : 청주한씨 시조, 한씨족(=일본인)의 시조 천손 단군
***동이족 : 동이시조 소호김천씨는 신이 아니라 신라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어서 시조였던 것이다.
단군신화는 일연선사의 [삼국유사](1283년) 첫머리에 인용된 [古記]에 전해오며, 선사보다 169년 전에 김부식도 이 古記를 보았다. 허나 김부식은 삼국사기(1114년)를 쓰도록 하명한 인종에게 올린 이 책 서문에서 ----- 고 하여 古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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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숙종3년(1098년)에 제작된 古記의 저자는 비록 확인되지 않지만 그는 안악군 삼성사를 관할하던 평양부의 한 문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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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가 지난 묘청반란 진압후 인종은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아마 이때 인종은 평양인이 저작한 古記에 버금가는 역사서를 쓰도록 하명함에 따라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서 古記를 지목하여 노골적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이러한 단군논쟁의 와중에 혜성처럼 끼어든 인물이 일연선사였다. 그의 삼국유사는 최남선씨의 지적처럼 선사가 "78세때인 1283년에 국존"으로 제수될 때 완성되었다.
선사는 그 서문에서 ----- 라 하여 김부식을 정면으로 공박하면서 김부식의 사문난적으로 낙인찍은 古記를 삼국유사 첫머리에 버젓이 인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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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강요로 일본원정용 선박을 건조하는 한편 원군과 결사항전을 벌였던 삼별초와의 싸움에 시달리던 내우외환의 위기였다. 바로 이때인 원종10년(1270년) 에 서북면절도사 최탄과 삼화현교위 이연령이 평양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고을을 이끌고 원나라에 투항하니, 원군은 즉각 평양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황해도 멸악산맥 이북을 강점해 버렸으니 어처구니 없는 영토의 피탈이었던 것이다.
당시ㅣ 원나라는 아마 한사군 이래의 연고권을 앞세워 평양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했을 터이지만, 고려측 정사인 삼국사기는 평양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음에 따라 동녕부에 대항할 아무런 반증자료를 갖지 못함에 따라 평양을 멀쩡하게 원나라에 뺏길 판국이었다.
바로 이 시기인 1283년에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첫머리에 古記의 고조선을 인용하면서 10개의 주석을 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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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지명들을 가급적 동녕부가 장악한 평양일대로 집중시켜 동녕부가 차지한 영역은 낙랑군 이전부터 고려의 전신인 고조선이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사가 단군신화를 책 머리에 수록한 의도는 실은 동녕부가 차지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선점권의 선포였고, "원나라여! 평양 땅을 내놓고 빨리 물러가라!"는 영토반환 요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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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선사는 김부식이 사문난적으로 지목한 고기를 책머리에 인용하고서도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삼국유사를 완성한 바로 그해(1283년)에 승려로서 최괴직인 국존으로 제수되었던 것이다.
李承休(1224-1301)도 제왕운기(1287년) 상권에서 중국의 역사를, 하권에서 고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칠언한시로 읊으면서 압록강-두만강을 중국과 고려의 국경이라 했으니, 이것 역시 압록강 이남의 동녕부는 물러나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 솔내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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