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관동별곡에 대한 소감 (關東別曲序) ---김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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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0-22 03:50 조회1,919회 댓글0건본문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7/12 20:52 (from:211.57.153.106) 조회 : 34
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34
<우리 옛글 백가지, 1997, 한일사>
▣ 관동별곡에 대한 소감 (關東別曲序) ---김득신
관동별곡은 鄭松江(=정철)이 지은 작품이다. 우리 집에는 계집종 한 명이 있었는데, 그 계집종이 관동별곡을 매우 잘 불렀다.
그리하여 나는 어릴 때부터 늘 그 노래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자라서 머리를 묶고 상투를 올렸을 때쯤 되어서야 그 노래가 훌륭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지난 정축년 (=1637년, 병자호란 다음 해에 청에 항복) 전쟁이 끝난 뒤에 나는 관동을 실직(=삼척의 옛 이름)에서 노닌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그 지방의 젊은 기생 한 사람이 이 관동별곡을 매우 잘 불러 늘 그를 竹樓(=?삼척 죽서루) 에 불러다 놓고 노래를 시켰다. 그러면 나의 감흥이 고조될 뿐만아니라 詩文에 대한 상상도 넓어짐을 느꼈었다. 참으로 훌륭한 노래였다.
내 생각에는
백기봉(白岐峰=명종때 학자로서 이름은 광홍)의 관서별곡이나
무인 許 (허전)의 고공가(雇工歌=머슴살이의 고통을 풍자한 노래)나
조현곡(趙玄谷)의 流民嘆歌(조민탄가) 등은
다 그 아류작으로 관동별곡에는 못 미치는 작품들이었다.
내가 옛날 西湖(서호=현재의 한강의 서쪽)의 지장찰이라는 절에서 석달동안을 독서한 일이 있었는데, 나그네로서의 회포가 자못 심각하여서 중을 불러 놓고 唱歌하기를 부탁하니,
중 한 사람이 이르기를 "제가 관동별곡을 좀 부를 수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다듬어 노래를 불렀다. 그의 소리는 속세를 떠난 듯한 기상이 숨어 있어서 마음 속에 품었던 울적함이 단번에 풀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뒤로 여러번 西原縣(=청주)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그 지방의 歌妓를 불러오게 하여 관동별곡을 노래로 청해 듣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는 섬세하고 곱기가 실직(=삼척)에서 듣던 젊은 기생의 노래 소리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몇해전에 나는 館洞(=?)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의 책상 위에 작은 책자가 하나 놓여 있어 무심히 그 책을 들추어 보았더니 뜻밖에 그것은 관동별곡이었다.
거기에는 전편이 한글(언문)로도 씌어 있고 또 한자로도 씌어 있었다. 만일 내가 기억력이 좋았다면 그것을 빌려 보고 모두 외웠을 터인데 나는 성품이 원체 노둔하여 백번을 보아도 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냥 책을 어루만지기만 하고 말았었다.
조우인(=?1602년 이시발 撰 충렬공 김방경 묘갈명 書) 은 이 관동별곡을 듣고 글을 내용을 생각하며 표연히 세속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껴, 마침내 관동지방에 가서 노인 뒤에 續관동별곡 이라는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曹友仁 : 자는 여익, 호는 매호 또는 이재. 첨지중추부사, 우부승지 역임. 시와 그림, 글씨에 능하여 三絶이라고 불린다.
옛날에 이택당(李澤堂=李植)이 나에게 이르기를 "영남의 문장으로는 조우인이 제일일세" 하였는데,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 속관동별곡도 매우 진기한 작품임이 틀림없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읽어 보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이 송강의 작품과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조우인의 별호는 이재이고 송강의 이름은 철이다. [栢谷集}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듣고 그 소감을 적은 감상문인데, 이 글로 보아 당시에 관동별곡이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득신 : 1604(선조37)-1684(숙종10). 자는 子公, 호는 栢谷, 1662년(헌종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선대부 안풍군에 습봉되었다. 화적에게 살해당했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 김윤만 - 계집종까지 관동별곡을 불렀다니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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